최근 발표된 스포츠 동아 조사에서 '살인의 추억' 정상 영예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아, 한국 영화 역대 100편을 선정해보면 어떤 목록이 작성될까? 아직은 나도 모른다. 그 100선을 전격 시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긴 한 일간지의 요청에 의해 열흘쯤 전후로 그 100선을 뽑아 보내긴 해야 한다. 그 최종 결과는 내게도 궁금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선두 10편 정도는 당장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부산영화 평론가협회(이하 부산영평) 설립 60주년을 맞아 지난 해 2월 경 선택해 보낸 목록이 있어서다. 간략한 이유와 함께 그때 그 영화들을 순위 순으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하녀>(김기영, 1960) - 한국 영화 모더니즘의 여전한 정점.
2.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 - 한국 영화 리얼리즘 및 한국적 로드 무비의 진정한 최고봉.
3. <1987>(장준환, 2017) - 거대 사회사와 미시적 개인사를 영화 미학·예술적으로 거의 완벽히 조화, 구현하다.
4. <우묵배미의 사랑>(장선우, 1990) - 한국적 서민 정서를 형상화한 대표적 영화 사례.
5.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영화사를 결정지은 터닝 포인트이자 ‘이장호 영화 세계’의 새 출발.
6.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 <바람 불어 좋은 날>의 ‘봉준호 버전’.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아니다).
7. <시>(이창동, 2010)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감히 욕망했던 초로의 여자 시인 지망생을 축으로 펼쳐지는 최상 수준의 휴먼 드라마.
8. <형사 Duelist>(이명세, 2005) - ‘매혹(Attraction/s)으로서 영화’의 치명적 진수.
9.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2002) - ‘박찬욱 월드’의 최고봉. <올드 보이>(2003) 이전에 이 걸작이 있었다.
10. <천년학>(임권택, 2007) - 거장 임권택의 과소평가된 문제적 걸작. <서편제>(1993)보다 한층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이다!
지난 호에 한국 영화 100년 최고의 영화 2편을 <하녀>와 <삼포 가는 길>이라고 내세운 것은 위 선정에 의거해서다. 어트랙션을 우리말로 옮긴 매혹은 시각·청각·이야기·주제 등 영화의 어느 층위에서든 “관객으로 하여금 감정적 혹은 심리적 영향을 끼치는”,달리 말해 어떤 강도. 정도로든 관객을 시각적·청각적·이야기적·주제적으로 잡아끌어 당기는 “영화의 모든 요소들”을 가리키는 개념·용어다. 따라서 1990년대 후반 접한 이후 Cinema of Attraction/s 은, 평론가로서만이 아니라 관객으로서도 내가 영화를 대할 때 가장 중시하는 으뜸 태도다. 내게 영화란 무엇보다도 매혹들Attractions의 총합으로서 매혹Attraction인 것이다.
참고삼아 1958년 이후 영화들을 대상으로 꼽았다는 부산영평의 베스트 10을 소개해보면 어떨까. 1위작은 역시 <하녀>다. 2위작부터는 나와는 크디 큰 차이를 보인다. 2위 <휴일>(이만희, 1968), 3위 <살인의 추억>, 4위 <마더>(봉준호, 2009), 공동 5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1996), <올드 보이>(박찬욱, 2003), 7위 <오발탄>(유현목, 1961), 공동 8위 <길소뜸>(임권택, 1985), <송환>(김동원, 2004), <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배용균, 1989)이다. <인의 추억> 외에는 겹치는 영화가 없다. 이렇듯 위 전문가들의 영화적 지향·취향·시선은 다르기 련이다.
내친 김에 또 다른 한국 영화 베스트 10을 끌어와 보자. 한국영상자료원이 영화 관계자 62인에게 의뢰해,개원 40주년을 맞이해 2014년 1월 발표한 한국 영화 총 101편 중 최상위작 12편이다. 현존 가장 오래된 영화인 1934년 작 <청춘의 십자로>(안종화 감독)부터 2012년 12월 말까지 극장 개봉된 한국 장편영화를 대상으로 했다. 3편이 공동 1위에 올랐다. <하녀>와 흔히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정점으로 간주되는 <오발탄>, 그리고 한때 ‘영화천재’로 일컬어졌던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이다. 4위는 정비석 원작, 한형모 감독의 기념비적 멜로드라마 <자유부인>(1956), 5위는 한국 영화사의 영원한 아버지 김승호의 열연이 돋보이는, 강대진 감독의 서민형 걸작 휴먼 드라마 <마부>(1961), 6위는 이장호 감독의 출세작이자 한국 멜로 영화의 어떤 변곡점 <별들의 고향>(1974), 공동 7위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살인의 추억>, 공동 9위는 ‘신상옥 월드’의 집대성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김호선 감독의 빛나는 사회성 멜로 영화<영자의 전성시대>(1975), 100년 한국 영화사의 일탈적·성공적 실험 <바보 선언>(이장호, 1983), 한국적 한恨의 영화적 구현인 <서편제>다. 참여 인원도 상대적으로 많은 데다 대상 영화의 범위도 넓어, 나는 물론 부산영평과의 차이도 상당히 큰 편이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아니나 한 감독의 영화가 무려 3편이나 되고, 균형감이 결여됐다는 느낌을 떨칠수 없다. 하튼 그 비교의 맛이 제법 짙을 만하다.
특기할 점은 무엇보다 <하녀>의 압도적 존재감이다. 상기 세 선택에서 공히 정상을 차지했다. 그야말로 세계의 영화 식자들에게 으레 역대 최고작으로 손꼽히곤 하는 <시민케인>(오손 웰즈, 1941)의 한국버전, 이라 할 만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왔듯시각·청각·이야기 등 영화의 전 층위에서 두루, 그만한 감흥·충격을 안겨준 우리 영화는 아직까지는 없다. 영화 미학·예술적 견지에서는 말할 것 없고 영화 역사적·시대적 차원에서도 이 걸작을 능가할 예와 조우하기란 여의치 않을 것 같다.
<살인의 추억>의 존재감도 큰 주목감이다. 다시 단언컨대, “19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는 이 영화를 기점으로 나뉜다.” <1987>를 가리켜 “거대 사회사와 미시적 개인사를 영화 미학·예술적으로 거의 완벽히 조화, 구현하다.”라고 평한 바, 그 진단은 고스란히 이 걸작에도 해당된다. 고백컨대 <1987>을 <살인의 추억>보다 우위에 둔 내 평가가 객관적으로 지지받기 쉽지 않다는 것쯤은 익히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지난 1월 나도 보냈던 스포츠 동아 한국 영화 100주년 설문에서, 정상의 영예를 안았다. 감독·제작자·홍보마케터·평론가 등 100명이 참여했다는데, 영화 역사보다는 상대적으로 현장성에 강한(?) 종사자들이대거 포함된, 어느 모로는 파격적인 결과로 읽힌다. 한국 영화사에 대한 평가에서 무게중심이 ‘구세대’에서 ‘신세대’로 전격 이동하면서, 일종의 ‘지각 변동’이일어났다고 할까. <오발탄>과 <올드 보이>, <하녀>, <서편제> 등이 그 위를 이었다고.
임권택 감독의 최고작이 다채롭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렇다면 자문해보자. 보지 못한 영화들이 더 많을 터인즉, 102편에 달하는 임권택 감독의 전작(全作)을 염두에 두진 않으련다. 그 동안 보아온 수십 편의 임권택 영화들 중 최고작이 과연 <천년학>이란 말인가. 그건 아니다. 내게 임권택 감독의 최고 영화는 <티켓>(1986)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임권택의 가장 어두운 영화 가운데 한편”으로 “<길소뜸>과 함께 표면적 서사와 그 안에 잠복한 정념의 에너지가 충돌하는 1980년대 임권택 영화의 또 다른 문제작.”(2013년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한때 <서편제>을 최고 자리에 위치시킨 적은 있어도,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티켓>을 그 어느 감독 그 어느 영화 못잖게 사랑해왔다. 지금도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상기 10선에 <천년학>을 포함시켰던 까닭은, 2017년 프랑스 몽펠리에를 방문해 페스티벌 ‘여기에 한국이 있다’(Corée d'ici)에서 10년만에 영화를 다시 보며 맛본 감흥이 워낙 강렬해서였다. 일찍이 눈 여겨 보지 않았던 그 ‘포스트-서편제’의 영화적 복합성도 그렇거니와 그 정치적 함의·저류Undercurrents 등이 치명적 매혹으로 다가섰다.
영상자료원 목록에는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3편이거늘 부산영평이나 스포츠동아에서는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이나, (이장호 감독 본인도 동의하지 않은 바) <바람 불어 좋은 날>보다 <별들의 고향>의 순위가 더 높다는 사실 등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으나, 더 이상 짚진 않으련다. 내 선정 또한 이러저런 비판·지적을 면키 어려울 테니 말이다. 이쯤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상기 내 목록은 변함없는 것일까. 아니다. <천년학>에 대해 말하며 시사했듯, 1년여의 시간이 흐르며 그 목록은꽤 큰 변동을 겪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 아닌가.
이미 밝혔듯 1, 2위는 변함없다. 하지만 2위부터는 상당히 다르다. 지난 해 5월 첫 선을 보인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새로 진입했다. 그것도 당당히 3위로. “문제적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출발해 문제적 작가 윌리엄 포크너로 나아가는, 문제적 감독 이창동만의 영화적인 너무나도 영화적인, 기념비적 모험이”자 “한국, 아니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문제적 걸작.” 그 매혹이 <하녀>에 필적할 만하다. 대신 <시>를 뺐다. 가능하면 1인 1편을 고수하고 싶어서다. <천년학>은 <티켓>으로 바뀌었다. <복수는 나의 것>도 <올드 보이>로 교체됐다. 국제적 시선으로 조망하면, 이른바 ‘코리안 시네마’는 <올드 보이>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는 바, 그 기준을 적용시켰다. 당연히 순위 변동도 일부 발생했다. 아래 목록이 지금 이 시점,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뽑은 한국 영화 최종 10선이다.
1. <하녀> 2. <삼포 가는 길> 3. <버닝> 4. <바람 불어 좋은 날> 5. <우묵배미의 사랑> 6. <1987> 7. <살인의 추억> 8. <올드 보이> 9. <티켓> 10. <형사 Duelist>….
선정 기준은 그 영화의 매혹, 시대성, 영화사적 의의·영향력, 생명력·지속(가능)성, 비평적 평가 등이다(계속).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