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판타지다’고 굳이 말할 수 있다면, 그 까닭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A: 상상가능한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으므로.
B: 현실을 잊게 해주므로.
C: 대리만족의 쾌감을 안겨주므로.
D: 생각하기 나름. 그리고 그렇게 만들기 나름.
‘영화는 판타지다’는 말은 새삼스럽다. 여기서 ‘새삼스럽다’는 것은, 위 질문의 보기 A와 B 그리고 C가 담고 있는 내용에 근거한다. 그리고 장르로서 판타지가 아니라 영화가 충분히 판타지적 요소를 갖춘 매체임에 틀림없다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그래서 자칫 고루하기까지 한 인식’때문이기도 하다. 새삼 그에 대해 세밀한 설명을 하는 것도 일종의 ‘관객모독’이 아닐까.
‘영화는 판타지다’는 말은 또 새삼스럽지 않다.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위 질문의 진정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터이다. 세상의 모든 영화, 아니 예술적 작품을 표방하는 모든 것들은 창작자의 의도로서 세상에 나오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이를 향유하는 이들로부터 찾을 수 있다. 향유와 소비하는 자들이 없다면 예술적 작품의 존재감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이 또한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그래서 자칫 고루하기까지 한 인식’이기도 하지만 판타지는 바로 그 향유와 소비의 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 18살의 청년 자말 말릭이 있다. 그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가진 것 없는 그는 백만 달러의 상금이 내걸린 텔레비전 퀴즈쇼에 출연해 문제를 풀어간다. 퀴즈쇼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가 태어나고 자라난 인도 사회에서 퀴즈쇼란 그와는, 정확히는 그의 계급과 신분에는 턱없이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퀴즈쇼에서 거액의 상금을 획득해온 자들은 자말보다는 우월한 계급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말은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니 퀴즈쇼란 그에게 그저 허망하기만 한 욕망일 것인가. 그렇다면 자말은 왜 그 허망할 수도 있는 욕망을 꿈꿨던 것일까.
턱없어 보이는 계급으로 퀴즈쇼에 출연해 거액의 상금을 획득하려 한 것 자체의‘불순함’은 현실에선 용납될 수 없었나 보다. 바로 그 때문에 자말은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데, 이야말로 퀴즈쇼라는 무대가 인도 사회의‘계급적 공간’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셈이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속 자말의 이야기는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야기는 경찰 조사에 시달리는 자말의 진술에서 시작해 그가 퀴즈쇼의 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자말이라는 빈곤한 청년의 신산한 성장사를 펼쳐놓는다.
‘우연하게도’ 퀴즈쇼의 문제는 모두 자말의 과거와 연결되며 새록새록 그 아픈 생채기를 떠올리게 한다. 풀어내야 할 퀴즈의 정답이 바로 자신의 과거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과거 속에는 자말과 그의 형 살림이 있고, 어린 시절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격렬한 종교분쟁의 와중에 죽어간 어머니의 처연한 눈빛이 있다. 앵벌이로 끌려가 고난을 당하는 어린 형제의 비참하고 신산한 현실이 자라나기도 한다. 비루한 현실은 그러나 그렇게 자라난 두 형제에게서 여전히 넘을 수 없는 벽일 수밖에 없다. 거기에서 탈출하려 살림은 갱이 되고 자말은 그저 이동통신사 전화상담원들에게 차를 나르는 일로 벌어먹을 뿐이다.
퀴즈쇼의 문제와 그 정답을 들여다보는 자말의 흔들리는 눈빛은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겪어야 했던 아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비참한 인도 빈곤층의 진짜 현실 속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보는 이들의 헛헛한 가슴 속을 파고든다.
자말은 그렇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퀴즈쇼에 출연한 것일까. 이야기는 생뚱맞게도 자말이 앵벌이의 고통 속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소녀 라티카를 그 정답으로 제시한다. 자말은 라티카를 잊지 못했고 또 다른 어두운 현실에 묶인 라티카 역시 유일한 희망으로서 사랑을 선택한다.
자말이 퀴즈쇼에 출연키로 한 것은 결국 라티카를 험난한 현실로부터 구해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그의 절박한 요구에 “도망가 어떻게 사느냐”며 라티카는 되묻고 자말은 “서로 사랑하면서”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보스를 배신하고 라티카를 놓아버린 살림은 동생을 위해 고통스런 결말을 스스로 맞이한다. 그래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계급적 현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듯하다. 그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져놓은 뒤 결국 한 편의 멜로물로 끝난다.
하지만 바로 이를 눈치챌 즈음, 관객은 이미 켜켜이 쌓아놓았던 이야기의 힘에 이미 빠져들었음을 깨닫는다. 삐그덕거리지 않고 틈새도 없이 흐른, 자말의 놀랍도록 비참한 무게의 현실을 그린 이야기에 빠져들었던 관객이 ‘영화는 판타지다’라는 말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다.
여기서 대니 보일 감독은 그 자신 이미 찬사를 받아온 탁월한 음악적 감각에 얹어 인도영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배우들의 군무로 엔딩 크레딧을 올린다. 관객은 그 흥겹고 유쾌한 음악과 이들의 화려한 군무를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영화의 시작점에 깔아놓았던 퀴즈의 보기가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자말 말릭이 퀴즈쇼의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A:속임수를 써서, B:운이 좋아서, C:천재여서, D:It is written’의 D이다.
남루하고 비참한 과거를 뛰어넘었듯이 퀴즈쇼의 최종 단계까지 통과한 자말이 끝내 라티카를 구해내고 역시 그녀의 아픈 과거가 남긴 상처에 따스한 키스를 전하는 순간, 영화는 보기 D가 정답이라고 말한다.
‘It is written’이라고 말하듯, 자말이 라티카에게 “우린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라며 속삭이듯, 영화는 결국 자말의 운명과 사랑을 그린 이야기였음을 고백한다. 또 이들의 운명과도 삶은 곧 ‘각본에 씌여진(It is written)’ 것이었다는 ‘새삼스럽’고 ‘새삼스럽지 않’은 듯 보이는 ‘판타지=말 그대로 이야기’였음을 털어놓은 셈이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통해 굳이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하기 나름’일 터. 다만 명징하게 남아 오래도록 기억되는 건 ‘판타지’로서 영화 그리고 그 완결된 이야기의 힘이다. 인도 빈곤층의 현실을 외면한 게 아니냐며 ‘문제는, 다시 현실 혹은 현실의 반영이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은 또 이야기의 힘과는 별개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문제는, 다시 이야기의 힘이다!’
윤여수 《스포츠동아》영화 담당 팀장. 스포츠투데이, 스포츠한국, 머니투데이 등에서 일함. tadada@donga.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