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학파 무용/동작 치료사인 화이트하우스M. White house는 내가 움직이고move, 동시에 움직여지는being moved, 의식적 원천과 무의식적 원천에서 모두 나오는 진정한 움직임Authentic Movement을 추는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나를 찾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외적 세계의 자아를 초월하고 내면심층의 자기the Self를 성취함으로써 진정한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칼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심리학을 기반으로 한다. 의식과 무의식,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의 양극의 통합을 통해 내면의 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인데, 무의식을 발견하기 위해 시도되는 인간의 예술적 상징 활동들, 예를 들어 그리기, 글쓰기, 놀이, 제의식 등 중 가장 자연스럽고 강렬한 방법은 아마도 춤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3월 30일~31일 서울 남산국악당에서 공연된 〈춤의 연대기〉는 한국 춤을 대표하는 무용가 김매자, 그리고 그와 40여 년을 함께한 그의 제자들이자 중견 무용가들이 춤의 인생에서 다다른 경지를 발견한 시간이다. 30여 년 전 창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매자의 춤을 지탱하고 나아가 한국창작춤의 기본이자 근본으로서 연구·체계화되어 온 〈춤본〉을 위시한 이 공연은 완숙한 무용가들의 몸에 체화된 우리 춤의 원리와 정서,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발산되는 심층의 에너지를 목격할 수 있는 무대였다.
한국 춤의 구조이자 외적인 틀을 형성하기 위한 작업으로 1987년 초연된 김매자의 〈춤본〉은 우리 민속춤인 〈승무〉와 궁중무용인 〈춘앵무〉, 그리고 작법 중 〈나비춤〉으로부터 탐색된 우리 춤의 본질에 대한 춤이다. 이를 상징하듯 이번 공연은 〈승무〉와 〈춘앵무〉, 〈나비춤〉이 한 무대 위에서 공존하며 시작했다. 〈춤본Ⅰ〉은 초연 이후 지금까지 김매자와 창무회의 대표 레퍼토리이자 방법론으로 연구되고 공연되어 왔는데, 이번 무대에는 김매자를 비롯해 최지연, 김지영, 윤수미, 손미정, 김미선 등 창무회의 다섯 명의 중견무용가들, 그리고 거문고를 통해 한국음악의 동시대성을 실험하는 박우재 음악감독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땅으로부터 시작해 하늘, 그리고 우주로 나아가는 한국 춤의 구조적 원리와 미학에 관한 탐구에 의해 탄생한 〈춤본Ⅰ〉은 창무회의 무용가들에게 주어지는 수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번 무대를 채운 다섯 중견 무용가들은 〈춤본Ⅰ〉의 구성 원리를 시각화한 군무를 통해 〈춤본Ⅰ〉이 하나의 기본이자 방법론을 넘어 완성된 무대 작품으로서도 그 미적 가치를 지님을 증명하며 그것의 원리와 에너지를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해 관객들에게 전달했다.
〈춤본Ⅰ〉이 한국 춤의 구조적 원리의 탐색 끝에 창작된 작품이라면, 〈춤본Ⅱ〉는 한국 춤에 내재한 내적 충동인 신명에 천착하며, 나아가 춤꾼 김매자의 춤의 길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불교의식의 제의성, 민속춤의 자유분방함, 무속 춤의 주술성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춤을 추는 자로 하여금 그것들을 탐색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마주하고 이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한다. 김매자를 비롯해 원로무용가 한혜경과 이애현, 그리고 중견의 최지연, 김지영, 윤수미, 손미정, 김미선이 함께한 이번 무대는 아주 오랜 시간 춤의 길을 걸어온 춤꾼들이자 신만의 내적 충동과 무의식을 마주하고 그것을 춤으로 풀어내는 진정한 움직임Authentic Movement의 시간을 선사했다. 특히 〈춤본Ⅰ〉이 우주의 기운을 내면으로 끌어모으며 우리 춤의 구조적인 원리 탐색을 위한 춤인 만큼 무용수들의 표정이 매우 정적인 편이라면, 〈춤본Ⅱ〉는 내면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흥과 신명이 환희에 찬 표정으로까지 이어지며 동적인 움직임들과 함께 관객들을 신명의 리듬으로 끌어들였다.
이 외에도 〈살풀이〉(한영숙제김매자류), 〈숨〉(김매자류 산조), 〈光, Shining Light〉 등 〈춤본〉 전후로 창작되어 꾸준히 공연되어온 대표작들을 통해 김매자와 창무회의 춤의 연대기를 보여준 이번 공연은 특히 김매자의 안무를 하나의 전통으로 답습하는 것을 넘어 중견 안무자들의 개성과 창조성에 의해 재해석됨으로써 동시대성을 확보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창무회의 공연들을 지속적으로 관람해온 필자는 이번 공연을 통해 오랜 시간 수련을 거쳐오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몸에 체화된 한국 춤의 뿌리와 정서, 그리고 그것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는 창작적 영감에 대해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외적 세계에서 기능적으로 만들어진 춤이 아닌 내면 심층 무의식으로부터 뻗어나와 내가 움직이고 동시에 움직여지는, 진정한 움직임의 경지에 이르는 춤에 압도되는 시간이었다.
한국 창작춤의 대모라 불리는 김매자의 춤은 오랜 시간 동안 창무회를 중심으로 연구되며 긴 시간 그의 후배 무용가들에게 전승되어왔다. 특히 그의 역작인 〈춤본〉은 한국 춤의 원리와 정서를 종합적으로 구조화하며 동시에 동시대성을 부여한 것으로, 창작 후 30여 년의 시간 동안 창무춤의 기본이자 뿌리가 되었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 춤의 길을 걸어온 중견무용가들은 그의 스승이 그렇듯, 우리 춤이 체화된 몸으로 동시대의 춤을 추는 진정한 한국 현대무용가가 되어 있다. 지난한 창무회의 춤의 연대기가 앞으로도 오랜 시간 지속되기를 희망해본다.
임수진 퍼포먼스연구 및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토대로 무용을 비롯한 다양한 공연예술에 대해 연구, 글을 쓰며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강의하고 있다. 한양대에서 무용을 전공하고 뉴욕대(NYU)에서 퍼포먼스연구(performance studies) 석사, 성균관대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무용월간지 《몸》 편집장을 역임했다.
* 《쿨투라》 2022년 5월호(통권 9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