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월평] 순간을 담는 또 다른 방법, 도미닉 밀러의 《Absinthe》

2019-04-04     서영호(음악가)
Ⓒ도미닉

  즉흥성은 재즈의 미학을 이해하는 키 포인트이다. 같은 연주자가 연주한 곡이라도 언제 어디서 어떤 감정적 상태에서 연주했는지에 따라 매번 결과물이 다르다. 클래식이나 뉴에이지 등 다른 연주 음악 장르에서도 연주자의 당시 감정 상태가연 주에 어느 정도 반영되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물의 차이의 정도를 비교하자면 재즈에서는 완전히 다른 곡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또 연주자 간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결과물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야말로 순간을 포착하는 음악인 것이다. 아무 준비된 바 없이 ‘즉석’에서 이루어진 연주라니 음악의 마법에 대한 동경이 있는 이에게는 한없이 어필할 만한 아이디어다.

  하지만 재즈에서의 이 즉흥성은 어느 정도 일정한 약속 내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가장 전형적인 전개라고 한다면 보통 ‘헤드(head)’라 불리는 곡의 메인 멜로디를 연주한 후 같은 화성진행의 바탕 위에 각 악기들이 돌아가면서 솔로 연주를 펼쳐 보이는 식이다. 이때 심지어 멜로디를 연주할 수 없는 리듬악기도 솔로 연주에 동참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이러한 개인들의 ‘경연’ 후에는 곡을 일정한 마디 단위로 나누어 솔로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곡의 헤드 멜로디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곡을 마치는 식이다. 여기서 개별 주자들의 솔로 경연 시간은 가장 중요한 메인 순서라할 만하며 그렇기에 대부분의 재즈 연주자들은 일평생을 주어진 멜로디와 화성을 즉석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솔로 연주에의 기량을 갈고닦는데 몰두한다.

  그런데 가장 자유로운 음악이라는 재즈를 다른 음악과 차별화시키는 ‘즉흥 연주’를 위해 고안된 이러한 곡 전개의 틀은 모순적이게도 재즈의 양식 구성뿐 아니라 방법론, 연주자들의 솔로 연주에서 또 다른 매너리즘을 유발하고 연주자의 음악성을 솔로 역량으로만 평가하는 풍토를 가져왔다. 연주자들은 각 곡이 주장하고자 하는 이야기나 주제에 대한 고민 없이, 같은 화성진행이 나오면 이 곡에서나 다른 곡에서나 습관적으로 같은 음악적 어휘들을 나열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게다가 청자들은 누가 솔로를 잘했는지를 유일한 미적 판단의 근거로 삼기가 일쑤여서 음악이 연주 뽐내기의 각축장이 되고 만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음반의 주인공인 기타리스트 도미닉 밀러는재즈에 대한 그러한 고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별 흥미를 끌지 못하는 연주자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그동안 재즈라는 범주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차라리 우리에게는한국에서 유독 사랑받는 스팅의 〈Shape of My Heart〉의 기타 테마를 만든, 스팅의 사이드 맨이자 곡의 공동 작곡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동안 들어본 그의 음악을 떠올려 보면, 클래식에 바탕을 둔 안정적이고 깔끔한 연주력을 바탕으로 록, 블루스,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어법을 두루 겸비하고 있지만 섬세하고 예민하며 전형적이지 않은 곡 전개는 그 누군가가 기대할만한 이렇다 할 화려한 솔로나 연주 뽐내기가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고 있었다.

  이번 앨범 《Absinthe》도 언뜻 들으면 그간의 그의 작업들과 별반 차이 없이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앨범은 기존 작품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에 대한 이해가 조금이라도 동반된다면 음악에 대한 감상에는 큰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이 작업은 도미닉 밀러가 녹음 직전 날에 연주자들에게 큰 얼개와 곡이 표현하고자 하는 심상만을 전해주었다. 익일 이루어진 녹음에서는 곡 구성에 대한 최소한의 약속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연주자들의 곡의 주제에 대한 느낌 표현과 그것들의 공유에서 만들어진 총체적 결과물을 담았다. 연주자들은 순서대로 솔로를 한다거나 하는 구성에 대한 약속 없이상대방의 연주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으로 음악을 이끌어 나가며 따라서 모든 악기의 들고 남이 매우 섬세하고 예민하게 이루어진다. 상기했던 재즈 연주의 일반적인 구성에서 연주자들이 자신만의 일정한 발언 시간을 부여받아 주제에 대한 해석을 제각기 주창했다면, 《Absinthe》에서는 주제에 대한 기민한 대화를 통해 공통의 주장을 만들어 간다. 여기서는 음반의 타이틀을 쥐고 있는 도미닉 밀러가 대화의 자리를 마련한 주선자이고 사회자일 뿐이다. 한 주제에 대한 이 음악적 대화에는 따라서 상대방의 말에 너도나도 손뼉 치고 공감하며 이야기를 보태 고조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다음 발화의 계기를 위해 서로를 살피는 침묵의 시간도 발생한다.

  이 음반은 순간의 포착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 위해 이제는 재즈 장르에서조차 일반화된 후시 보정작업이 전혀 가해지지 않았으며 10트랙의 모든 곡은 이틀 동안 이루어진 단 한 번이나 두 번의 연주 중에서 그대로 담았다. 이러한 시도는 재즈 본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즉흥성에 관한 또 다른 접근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의 콘셉트나 주제의식에 더 무게를 둔 작업들을 선보여 왔던 재즈 레이블 ECM을 통한 그의 두 번째 앨범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서영호
음악가, ‘원펀치’와 ‘오지은서영호’에서 활동. 《쿨투라》 신인상 공모에 ‘영화음악평론’으로 당선.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19년 4월호(통권 5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