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오늘의 영화’ 수상작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 인터뷰] 〈기생충〉, 칸을 넘어 세계로!
‘역사적 쾌거’, ‘기념비적 성취’ 같은 수사는 이럴 때 동원하라고 있는 말 아닐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2019년 제7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그 기세를 몰아, 2월 10일(한국 시간) 개최된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을 휩쓰는 대 파란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후보에 오른 6개 부문 중 미술상과 편집상을 뺀 4관왕에 등극하며, 오스카의 역사는 물론 세계 영화사의 새장을 활짝 열어젖힌 것.
칸 이후 〈기생충〉과 봉준호가 펼치고 있는 신드롬은 유럽과 미국을 넘어, 2020년 내내, 아니 그 이후로도 지속돼 전 세계를 관통할 공산이 크다. ‘방탄소년단(BTS) 신드롬’ 등과 더불어. 아래는 칸 최고 영예를 안은 이후 출간 예정인 단행본에 싣기 위해 했고, ‘봉준호 특집’이었던 《쿨투라》 8월호에 실렸던 인터뷰의 축약판이다.
전찬일(이하 전) 이렇게 시간 내줘 감사해요. 〈기생충〉은 대중적으로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고, 불편함을 넘어 더러는 불쾌하기까지 한 영화인데,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으면서 동시에 이처럼 엄청난 대중적 흥행을 거둔 사례는, 내가 알기론 세계 영화역사에 없어요. 소감 한 마디 부탁할까요?
적나라함을 피하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해진 것
봉준호(이하 봉) 칸 영화제 이후 6, 7주쯤 지났고, 개봉은 4, 5주 됐네요. 프랑스에서 6월 5일 개봉했고, 많은 나라들에서 개봉하고 있죠. 잘 모르겠어요,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감독은 파이널 믹싱하고 프린트, 요즘은 DCP가 완성되고 나면 본업적으로는 마무리되는 거잖아요. 영화제니 홍보니 이어지는 중노동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본업은 아니잖아요. 〈기생충〉은 3월 말에 마무리했어요. 그래서 이번엔 좀 시간 여유가 있었어요. 쫓기지도 않았고. 우리끼리는 3월 말에 잘 마무리를 했고, 그 후로 영화는 단 1cm도, 0.1초도 바뀐 게 없거든요. 단지 그 영화를 둘러싼 소동들이 많이 생겼죠. 영화제 수상을 소동이라고 표현하니까 좀 이상한데, 좋은 의미의 소동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1, 2위를 하고 있고, 대만 홍콩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뭐 엄청난 히트가 되고 있죠. 모르겠어요. 그런 현상들에 대해서는. 특히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뭐라고 말하기 쉽지 않은 거 같아요. 돌이켜서 따져볼 시간적인 거리도 필요한 거 같고. 그리고 평론가 분들이나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객관적으로 보실 거 같고요.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후회 없이 마무리했던 것 같긴 해요. 지금 아직도 상영을 하고 있는 중인데, 그것도 당황스러워요. 이걸 어떻게 본 거지? 외관만 해도 불편한데 영화가. 그런데 불편함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어요. 어차피 불편할 수밖에 없는 영화고, 괜히 어정쩡하게 어디선가 당의정을 입히려고 해봤자 오히려 더 영화가 멍청해질 것이다. 그래서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대신 인물이나 스토리, 그러니까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은 있으니까, 그거는 관객들이 알아주리라는 생각을 하고 갔죠.
전 불편하면 보통은 타협을 하거나 판타지라는 기제를 작동시키거나 그러잖아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이 그렇죠. 리얼하게 가다가도, 결말은 관객들에게 만족을 안겨줘야 하니까, 영화관을 나갈 때 기분 좋게 나가게 해야 하니 통쾌한 무언가를 주려 하거든요. 그런 게 바로 판타지죠. 보통 대중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일부 타협을 해야 해기 마련인데 〈기생충〉은 타협을 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바를 끝까지 밀어 붙였죠.
봉 음…〈기생충〉이 결과적으로 불편하다는 것은 인정하는데요. 당연히 불편함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죠. 만들어 놓으니까 결과적으로 불편한 거죠. 불편한 게 무슨 훈장도 아니고, “이 영화는 불편해!”라고 자랑할 일은 아니잖아요. 대신, 우리를 둘러싼 현재 이 시대의 상황이라든가 그런 것에 솔직하다보니까, 더 강하게 말하면 적나라함, 그 적나라함을 피하지 않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불편해진 거죠. 저도 불편함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아요. 많은 제작비를 들여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관객을 불편하게 해야지”, “극장을 나갈 때 기분 나쁘게 해야지” 하는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지는 않겠죠, 당연히. 대신 솔직하고 싶은 거죠. 우리 영화 마지막에 우식이가, 기우라는 젊은이가 그 집을 사겠다고 하는데, 사실 굉장히 슬프잖아요? 불편하기도 하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어떻게 보면 잔인하지만, 그걸 마지막에 어떻게 이상한 당의 정을 심어서 포장하면 오히려 그게 관객에게 실례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솔직한 게, 좀 다소 불편하게 극장을 나서더라도, 그게 관객을 향한 예의가 아닌가 하고, 그렇게 생각한거죠.
전 〈기생충〉의 영화적 불편함이 장르적 재미 등으로 상쇄가 되면서 관객들이 많이 본 게 아닐까, 싶어요.
봉 홀리는 거겠네요, 일종의….
전 나는 그런 걸 봉준호식 맥거핀 장치라고 보는데, 관객들이 영화를 보다보면 결말부에 많이들 죽어나가면서, 영화가 무겁고 암담해지죠. 가령 〈설국열차〉에서의 곰과 아이들, 그런 것도 없죠. 기우가 잠깐 꿈꾸는 것을 빼곤….
봉 오히려 더 슬퍼질 수도 있죠. 그런 꿈을 꾼다는 게….
봉 감독의 향후 행보
전 역설적으로 더 그럴 수 있겠죠. 봉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기생충〉이 큰 의미의 일단락일 텐데, 봉 감독의 향후 행보를 기대해봅니다. 이 감독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보통은 칸 황금종려상 같은 정상을 밟고 나면 하강곡선을 타곤 하죠. 그건 역사가 입증하죠.(웃음)
봉 무서워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웃음) 저 아직 49세에요, 49세. 미국 나이로 49센데…
전 나는 벌써, 봉 감독의 칸 두 번째 황금종려상 수상을 기대하고 있어요. 한국 나이로 치면 저와 같은 50대이긴 해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몇 십 년의 세월이 남아있으니까요. 저는 그걸 생명력이라고 부르고 싶고요.
봉 요즘 프로모션 다닐 때나, 해외 영화제 때 질문을 많이 받는데, “황금종려상 이전 이후가 뭐가 달라졌느냐, 이후에 이 상으로 인해서 당신의 계획이 바뀐 게 있느냐” 등이죠. 저는 영화를 찍는 패턴이, 영화를 준비하는 패턴이 숙성 기간을 길게 갖는 편이죠. 〈기생충〉은 〈설국열차〉 후반 작업 때 이미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2013년 구상을 하고, 2014년과 15년 〈옥자〉 프리프로덕션 전에 이미, 스토리라인을 20페이지쯤 써서 다른 제작사랑 이야기했거든요. 그래서 영화 준비 기간들이 다, 디졸브처럼 오버랩 되어 있어요. 그래 〈기생충〉 개봉 전에, 〈기생충〉 이후의 둘 또는 세 가지 프로젝트가 이미 또 겹쳐져 있어요. 변함없이 지금도 그런 식으로 작업하고 있거든요. 저는 최대한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하고 있죠.
전 봉 감독이 그 평상심을 유지하려는 것을 나도 느끼고 있어요. 그래 일반적인 하강곡선을 타지는 않겠구나, 생각하고 있어요. 나는 특별히 영화역사를 중시하는 영화 평론가인데,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잖아요? 그래 한국영화 역사를 둘러보고, 세계 영화 역사를 같이 짚어보면 정말 생명력들이 너무 짧지 않나, 싶어요. 생명력이 중요한데, 수십 년간 지속되는 감독들이 거의 없어요. 대개들 잠깐 반짝하고 말죠. 다른 나라도 큰 차이는 없긴 해요. 그래서 켄로치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감독이 위대한 거죠. 그 분들은 수십 년에 걸쳐 생명력을 유지해오고 있죠.
봉 〈더 뮬〉, 아 〈라스트 미션〉 보셨어요? 영화 대단하던데요?
전 봤어요 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자기를 조롱하고, 자기를 승화시키는 독보적인 감독이죠. 그러니 극보수인데도 불구하고 존경하게 되는 거죠.
봉 좌파 평론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죠. 좌파 우파의 문제를 넘어서 있죠.
전 평론가건 감독이건, 우리가 닮고 싶은 어떤 모델이 있기 마련인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처럼 존경받는 감독이 한국에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봉 감독과 그 분과는 40년 가까운 터울이 있긴 해도, 봉 감독이 그런 감독이 되길 바라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네요.
봉 제가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그럴만한 역량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회의적이긴 해도, 그럴 수 있다면 있다면 좋겠죠. 노력을 해야겠죠.
전 참, 며칠 전에 〈아사코〉(2018)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기생충〉에 대해 쓴 글을 읽었는데 인상적이더군요 .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뇌수를 강타당한 듯 충격”
봉 그 감독과 잠깐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어요. 한데 그 감독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없네요…
전 그 감독이 〈기생충〉을 보고 난 후 이런 평을 했어요. 세계 영화사를 잘 아는 것 같더군요. “뇌수를 강타당한 듯 충격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영화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라고요. <아사코>는 2018년 칸 경쟁작인데, 그렇게 잘 나가는 현역 감독이 그렇게 말하는 건 사실 흔치 않은 경우거든요. “동시대 영화를 보고 그런 감각에 휩싸이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기에 상영이 끝난 뒤 스스로의 체험을 믿을 수 없어 현기증마저 느꼈다”라고 덧붙였어요. 내 느낌과 비슷한 거죠.
〈기생충〉은 두 가족이 아니라 세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질서 체제, 월드 시스템을 비판하는 데로 나아가는데, 그게 먹힌 거고, 그래서 한국적 맥락을 넘어 외국에서 더 영화가 환영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가족은 모두에게 공통된 이슈이고, 경제적 불평등 문제라든지 빈익빈 부익부 문제 등은 쉬운 해결책이 나올 수 없죠. 거기에서 느끼는 공감이 큰 것 같아요.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걸 아니까, 녹록치 않다는 걸 아니까….
〈기생충〉은 두 가족 아닌 세 가족 이야기
봉 그렇죠. 실은 세 가족이죠, 두 가족이 아니라. 하지만 세 번째 가족을 처음부터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 세상은 보통 이분법적으로 나뉘곤 하나, 봉 감독은 〈기생충〉에서 세 개의 층으로 나눴어요. 지상, 반지하, 지하로. 그렇게 〈기생충〉은, 인물들을 통해 세상을 외연과 내포, 미스터리 세 부분으로 나눠 접근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과 연결이 되죠. 저는 〈버닝〉과 〈기생충〉을 이란성 쌍둥이로 보고 있어요. 세상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게 아니고, 사실은 삼중 구조, 나아가 다중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죠. 보통은 지하와 지상인데 중간층을 설정해, 반지하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바둥거리는데 그 수단과 방법이 옳지 않죠. 나는 그래서, ‘봉준호식 윤리’라고 진단하고 있죠.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어도 그 수단과 방법이 옳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봉준호식 윤리를 제시한다고 해석하고 있죠.
봉 슬프지만 대가를 치르죠, 기택네 가족은. 막내 기정을 잃게 되고, 기택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면 셀프감금 하듯이, 햇빛이 없는 지하로 유배시키잖아요. 기택의 관점에서만 영화를 거칠게 요약하면, 계단을 올라가려 했던 자가 계단을 내려가면서 끝나는 이야기죠. 어떻게 보면 슬픈 이야기인데, 그게 또 어떻게 보면 영화의 최소한의 윤리죠. 그런 전개 내지는 플롯이 가능할 수 있었던건, 세 번째 가족 덕분이죠. 시나리오를 준비할 때 처음에는 세 번째 가족이 없었어요. 2015년에 바른손 제작사에 20쪽짜리 트리트먼트 비슷한 걸 주고, 〈기생충〉이라는 영화를 하자고 했죠. 그때는 제목이 ‘데칼코마니’였어요. 데칼코마니라는 게 좌우대칭, 그야 말로 두 가족이라는 말이잖아요. 제3의 것은 없는거잖아요. 〈기생충〉으로 바뀌게 되는 건 훨씬 뒤죠. 제가 그 날짜를 기억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날 너무 기뻐서였죠. 제 아이패드에 시나리오와 관련된 수십 쪽짜리 공책 같은 게 있어요. 2017년 8월 어느 날, 영화의 구조와 모든 게 다 떠올랐어요. 그때 기뻐서 메모를 해놨어요. 그게 세 번째 가족이 등장하게 된 날이에요. 지하와 문광, 근세. 그 전에는 두 가족만 있었어요. 2017년 여름까지요. 제가 집중적으로 혼자 시나리오를 쓴 게 2017년 9월부터 11월인데, 그 직전인 8월에 그 구조가 만들어진 거죠.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작은 알감자 같은 게 넝쿨처럼 쫙 올라올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그 날이에요. 2017년 8월 초의 어느 날. 그날의 기록들이 노트에 있는데, 그 세 번째 가족이 마케팅에서는 불가피하게 감춰졌지만, 그 지하의 커플이 없다면 영화는 훨씬 더 평범해졌겠죠. 평범하고 차별성 없고, 새로움이 없었을 거예요. 계단을 올라가려 했던 남자가 계단을 더 내려갈 일이 없겠죠. 그리고 주인공 가족들이 반지하였다는 의미…반지하는 뒤집어 말하면 반지상인 거잖아요. 길을 지나가며 반대 시점에서 반지하를 내려다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하에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인 거잖아요. 잔인한 앵글에 의해. 지하와 지상에 반씩 걸쳐 있는 인물들이 그 계단을 올라가서 지상의 2층집으로 침투해 들어갔는데, 결국은 오히려 더 자기보다 아래에, 지하에 있던 가족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인 거죠. 주제뿐 아니라 플롯의 기술적인 면에서도 이 세 번째 가족이 아니었다면 시나리오를 풀어내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들이 떠올랐던 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었어요.
〈플란다스의 개〉에서 〈기생충〉까지 이어지는 노숙자 모티브
전 분위기를 바꿔 큰 맥락의 질문을 하나 할까요? 〈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봉 감독 영화에는 노숙자가 반복적으로 나와요. 하다 보니 그런 건지, 아니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지요?
봉 〈플란다스의 개〉와 〈기생충〉은 묶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인물의 역할도 굉장히 비슷한 면이 있고요. 소위 정상이라고 부르는 세계에서, 인정하기 싫어하고 않으려고 하는 존재들이죠. 가족이건 아파트 단지건 간에. 한데 그들은 엄연히 존재하죠. 〈플란다스의 개〉 때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기에 실제로 그런 뉴스가 많았어요. 노숙자들이 겨울철에 힘드니, 공사하다가 중단된 아파트 단지가 텅 비어있고 경비도 없다고 하니까 거기에 들어가서 기거한다는 뉴스들이요. 〈기생충〉의 경우, 그 집에 일했던 문광(이정은 분)이라는 가정부의 남편 근세(박명훈)가 어떻게 그 집에 들어온 건지에 대한 배경 설명이 대사로 나오잖아요. 배경의 세팅보다도 더 중요한 건, 엄연히 우리 옆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유령 취급당한다는 사실이죠. 심지어 조여정이 분한 연교의 대사를 들어보면 “언니 귀신 믿어요?”, 같은 이런 말을 짜파구리 먹으면서 하죠. 그 이후에 근데, 뭐 귀신 나오는 집이 사업 잘되고 돈 잘 번다고 그러더라고, 라는 무당이나 할 법한 이야기를 하면서, 빚에 쫓겨서 지하에 숨어 있는 사람을 유령 취급하는 것으로 모자라 일종의 자신들의 부적 정도로 생각하는 거죠. 조여정이 짜파구리 마지막 한 젓가락을 먹으면서 “실제로 우리사업이 잘 되긴 해”, 라고 말할 때 근세가 유령의 경지를 넘어서 살아있는 인간 부적이 되는 거죠. 웃기면서도 슬픈 거죠. 〈플란다스의 개〉에서 김뢰하 캐릭터도 마찬가지죠. 엄연히 존재하고 살아있는 인간인데 유령 취급을 당하는 거죠. 유령이나 괴물로 취급하고 심지어 〈기생충〉 끝 부분 뉴스를 보면 그 사람이 그 집 지하에서 나왔다는 상상조차 못하기 때문에, 매스미디어는 그를 가리켜 노숙자라고 하잖아요. 신원을 알 수 없는 노숙자가 부잣집에서 묻지마 칼부림을 벌인 것이라고 말하죠. 끝까지 근세는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그 집에서도, 부인에게서도, 그 집 막내아들에게서도. 그 집 막내아들이 본 유령 취급을 받다가, 그 사람은 노숙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마지막에는 뜬금없이 매스미디어에 의해 노숙자로 네이밍되는 거죠. 그게 참 슬픈 운명인 거죠. 그래서 〈기생충〉에서는 근세 그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봉준호 감독이 서민의 삶에 시선을 던지는 이유?
전 편의상 노숙이라고 칭하죠. 봉 감독은 예술가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그 과정에서 생존에 고통을 느끼거나 그런 것 없이 무난하게 살아온 걸로 아는데, 어떻게 그런 시선을 취하게 된 것인지 궁금하네요. 봉준호의 인간에 대한 배려, 고려로 나름 해석은 하고 있는데, 어떤가요?
봉 네, 저는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자랐죠. 그래도 실제 경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표현해내야만 하는 것이 모든 창작자들의 공통된 십자가죠. 그렇지 않으면 사실 소설가들은 평생 고뇌하는 소설가들을 주인공으로만 써야 하고, 저 같은 경우는 정신없는 영화감독의 스토리만 써야 한다는 것인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쓰고 극화하는 것, 제가 살인을 해보지 않고 〈살인의 추억〉을 찍었듯이, 그게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짐, 또 나쁘게 말하면 권리일 수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기생충〉의 경우 박 사장 집, 2층에 사우나가 있는 그런 부자들의 세계는 저도 경험해보지 못했거든요. 대학교 적 과외할 때 그런 집에 가본 적은 있어요. 중학생 과외를 하러 갔는데, 그때 아이가 자기 집 2층에 사우나가 있다고 데려가서 보여주더라고요. 단독주택은 아니고 되게 좋은 빌라였는데, 그 당시 저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어요. 집안에 사우나가 있다니! 영화에서 보면 영화 중반에 연교와 기택이 사우나에서 이상한 대화를 하잖아요. 손 씻으셨어요? 사우나 장면을 꼭 넣고 싶었어요. 대학교 다닐 때 과외하러 갔다가 본 그 집의 사우나가 제게는 되게 쇼킹했었거든요.
전 부자에 대한 가치판단을 오히려 하지 않으려고 더 노력한, 보통 이런 유의 영화를 보면 선과 악까진 아니지만, 부자들을 천박하게 그린다든지 싸구려, ‘갑질’하는 것을 보여주곤 하는데, 그런 거 없이 그들도 인간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다소는 있었던 거겠죠?
봉 후반으로 가면 레이어layer가 벗겨지면서, 박 사장이 지하철 냄새를 이야기할 때 관객들은 약간씩 박 사장과 멀어지기 시작하고, 그런 감정을 느꼈을거예요. 매너 있고 세련된 사람이고, 또 애들한테 하는 걸 보면 잘 하잖아요. 지자식들이니 그렇겠지만. 인간적인 면모들을 보이지만, 한 꺼풀 한 꺼풀 얇게 겉껍질을 벗겨나가다 보면, 가까이 하기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느끼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해 있는 거죠.
기택이 박사장을 그렇게까지 죽여야 했나?
전 관객들의 제일 큰 불만은 기택이 박사장을 그렇게까지 죽여야 했느냐하는 것일 텐데요. 왜 죽음까지 가야하느냐, 하는 불만이 많이 나오더군요.
봉 따져보니까 1번 가족은 기정이가 죽고, 2번 가족은 박 사장이 죽고, 3번 가족은 다 죽었네요. 그런 식으로 배분을 한 건 아니지만요 물론. 공식적으로 봤을 때 박 사장 캐릭터가 죽을죄를 지은 건 없죠. 지하철 냄새 이야기를 했지만, 그걸 공식적인 석상에서 한 것도 아니고, 누구를 공격하기 위해 한 것도 아니니까요. 죽인 것, 그 행위를 한 건 기택인데, 기택조차도 스스로 후회할 정도로 우발적인 범죄였잖아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우리가 표면적으로 ‘우발적’이라고 치부하는 많은 범죄들이 있는데, 뉴스를 보면 그런 우발적인 범죄가 있었구나 하는데, 우리가 단순하게 우발적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그런 사건에도, 어떻게 보면 아주 미묘한 어떤 맥락이 있다는 거죠. 물론 사회적 맥락이나 그런 것 때문에 그런 우발적 범죄의 나쁜 결과를 정당화할 수는 없죠. 그래서도 안 되고요.
박 사장이 죽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분명히 절대 타당한 일은 아니고, 죽어 마땅한 사람도 당연히 아니죠. 사실 박 사장에게 무슨 죄가 있어요? 말을 싸가지 없게 했다고 죽을 이유는 전혀 없는 거죠. 그건 명백히 기택의 우발적 범죄인데, 그 우발적 범죄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감정적으로 누적되어가는 과정을 영화는 최선을 다해서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물론 기택의 행동이 과하긴하죠. 그런데 왜 그 과한, 우발적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었냐 하는, 그 미묘한 맥락은 있는 거잖아요. 그 맥락이 있다고 해서 기택의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요. 당연히 그건 잘못된 거고, 공식적인 법리적인 세계에서는 감옥에 가야 마땅한 행위인데,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그 미묘한 맥락을 볼 수 있고, 그 미묘한 맥락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을 영화에서 섬세하게 다뤘어요. 법리적, 법적 세계에 갔을 때는 전혀 고려조차 될 수 없는, 변호사의 의견서든 판사의 판결에서든 한두 줄로 요약되기조차 쉽지 않은건데, 영화라는 섬세한 매체를 통해서 그 미묘한 맥락을 한 번 보여줄 수 있는거죠. 기택 본인조차 아주 금방 후회하는 행동이잖아요. 자기가 우발적으로 저질러놓고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리잖아요. 그래서 그 맥락을 짚어보는 거죠. 필연적으로 죽였다, 또는 죽어 마땅하다, 같은 윤리적인 어떤 깃발을 꽂은 것은 절대 아니었고요.
전 의도를 했든 안했든 인물들을 적절하게 안배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봉 모두가 대가를 치른 거죠. 세 가족이 다, 각각의 대가를 치른 거죠. 박 사장은 좀 과하게 대가를 치렀다고 볼 수는 있지만요.
열 명의 캐릭터를 분배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고 그것이 배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전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 때, 어쩔 수 없이 역점을 두는 지점들이 있기 마련이죠. 역점의 우선순위가 있는 거랄까요. 〈기생충〉에서 인물들을 그런 식으로 분배한 것, 그것이 굉장히 중요했고, 그런 분배가 배우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지 않았나, 싶어요. 〈기생충〉은 무려 열 명의 주, 조연을 멀티캐스팅했죠. 다들 살았는데, 특히 문광 역의 이정은 씨와 근세 역의 박명훈 씨 두 배우가 요새 가장 조명 받고 있죠.
봉 세 번째 가족이 중요하죠. 〈기생충〉은 사건이 숨 가쁘게 전개되는 편이잖아요. 느긋하게 인물들 하나하나를 그리지는 않죠. 미니시리즈 16부작이라면 오늘은 이 인물을, 다음 회는 저 인물을 느긋하게 다루겠지만, 2시간 10분의 러닝타임 안에 숨 가쁜 여러 사건들이 있잖아요. 몰랐던 가족까지 하나 더 나오고, 또 뒤에 가면 에필로그까지 있잖아요. 사실 시나리오 때는 그렇게 배려할 여유는 많진 않았어요.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상황들, 특히 후반으로 갈수록 급변하는 전개를 매끄럽게 감당해내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어요. 그런건 있는 것 같아요. 아역까지 챙겼다고 말씀을 하시니까 굳이 말하자면,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제가 콘티를 그리면서 추가한 것이 있어요. 연교가 문광을 해고하는 장면이 있어요. 연교가 사우나에서 기택과, “저는 결핵 뭐 이런 거 얘기도 안할 거예요. 다른 핑계 대서 깔끔하게 해고할 거고. 그 방법이 좋더라고”…이런 유의 대사인데, 장면이 바뀌면 도대체 무슨 핑계를 대서 해고하는지는 안 나오고 뒤에 잔디밭에 이런 자세로 앉아 있거든요 연교가. 이 자세를 제가 특별히 주문을 했어요. 어색한 침묵이 있고 햇빛이 들어오고, 당연히 이제 해고되겠구나, 하고 관객은 알죠. 시나리오에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콘티에서 바꾼 게 무엇이냐면 그 장면을 다송이, 부잣집 막내의 시점으로 바꿨어요. 시나리오에는 두 여인들, 문광과 연교만 등장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저의 콘티에서는 처음 씬이 바뀌면 인디언 모자를 쓴 다송이가 나와요. 다송이가 평소답지 않은 가라앉은 얼굴로 무언가를 보고 있어요. 숏이 바뀌면 이제 그 침묵의, 해고의 순간이 나오거든요. 그러고 다시 숏이 바뀌면 롱숏이고, 늦은 오후의 쓸쓸한 햇빛이 출렁거리면서 아이가 아주 작게 뒷모습이 보여요. 그 다송이라는 애가 처음으로 정적으로 나와요. 맨날 까불고 움직이고 그러는데, 상당히 정적인 그 아이의 쓸쓸한 뒷모습이 나오죠. 전체 메인 스토리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순간적으로 다송이, 그 부잣집 꼬마의 외로움을 보여주려 했어요. 실제 제가 과외했던 아이가 그랬기도 했고요. 조여정 씨와 시나리오 이야기를 하며 설명했던 건데, 이 엄마는 아들에 대한 집착은 매우 강하지만 의외로 영화 전체를 보면 연교와 다송이가 스킨십하는 순간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일부러 그렇게 찍었어요. 조여정 씨가 연기한 그 부잣집 사모님 연교는 애를 안아주는 것보다는, 길에 나갔을 때 처녀처럼 보이고 싶고, 필라테스를 하고, 그런 스타일의 캐릭터인 거예요. 그래서 애를 안고 있거나 모유를 먹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이 되고, 스킨십이 아예 없는 거죠. 그래서 다송이가 문광 아줌마와 막 뒤엉켜 노는 게 나오잖아요. 처음에 기우한테 월급을 주면서 얘기할 때 보면, 보이 스카우트 차림으로 다송이가 문광과 아이처럼 노는 게 나오거든요. 문광이 빙빙 돌리고 둘이 아주 강하게 얽혀서 노는데, 다송이에게는 문광이 유일한 친구인 거예요. 누나는 이미 나이 터울이 크죠. 누나가 얘랑 놀아주겠어요? 맨날 꿀밤 때리고 구박하고. 다송이의 유일한 친구가 문광인데, 문광이 해고되고 사라지는 순간인 거예요. 그래 원래 시나리오에는 없었는데, 그 숏을 다송이 시점으로 스토리보드에 바꿨고, 그 느낌을 조여정 씨도 굉장히 좋아했어요. 콘티를 보고 “이 씬이 다송이 시점이 되니까,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 라고 여정 씨도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지만, 그런 것이 연출자가 계속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전체 스토리에서 잠시 벗어나지만, 어쨌든 다송이를 위한 모멘트가 되는 거죠. 문광이 비오는 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러잖아요. 막내 다송이하고는 아직도 문자를 한다고요.
전 계단 이미지나 계단 시퀀스들도 인상적이었어요. 계단과 물 이미지를 굉장히 깊이 있고 길게 보여주죠.
봉 그래서 기우를 계단에서 한 번 세우기도 했어요. 빗속을 계속 가다가 한번 서서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잖아요. 계단을 타고 물이 막 폭포처럼 흘러 내려가는데. 그 장면을 정말 찍고 싶었어요.
전 그래서 상승과 하강이라는 진단이 나오는 거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물이나 계단의 이미지 그런 것들에 특히 더 반한 게 아닐까요. 많은 영화들이 물성을 구현하기보다는 대사로 처리하거나 그러죠. 한데 〈기생충〉은 복잡한 플롯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미지로 물성을 확실하게 보여주죠. 그야말로 영화에 대한 극찬이죠.
한국영화가 조금 더 미래적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전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왔는데,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잖아요? 혹시 조명을 하거나 한번 좀 짚어주면 좋겠다 하는 게 있습니까?
봉 칸에서는 계속 언급을 하고 싶더라고요. 아무래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요. 100주년이나 된 지도 모르고, 워낙 해외에 널리 알려진 감독들이 홍상수, 박찬욱, 김기덕 감독들이다 보니, 그 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모르잖아요. 한국영화 역사가 얼마나 됐는지, 서구인들은 많이 모르니까 일부러 더 말했죠. 심사위원들도 잘 모르고, 기자회견을 해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갑자기 어느 날 나타나 상을 받는 게 아니라는 걸요.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 이야기도 했어요. 〈하녀〉 정도는 평론가, 기자들이 어렴풋이 알아요. 그래서 마틴 스코세지가 칸에서 소개한 〈하녀〉의 김기영 감독님을 내가 되게 좋아하는데, 그 영화도 계단이 나오는 영화고 〈기생충〉도 그런 맥락이 있다, 라고 친절하게 설명을 했어요. 한국영화 역사를 모르니까요. 우리에게도 영화역사가 있고, 너희가 이제 시네마테크나 이런 곳에서 회고전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은근히 강압적으로,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알리려고 이야기를 한 거죠. 한국 내부에서는 100주년 관련된 모든 행사들이…물론 ‘베스트 10’ 뽑고 그런 것도 좋은 거지만, 더 미래적으로 많이 하면 좋겠어요. 미래 100년이 어떻게 될 것이냐. 지금 우리 주변에서도 단편영화를 찍고 있고, 아무도 모르는 골방에서 막 시나리오 쓰고 있을 텐데, 그들을 우리가 어떻게 영화산업 안으로 맞아들일 것인가. 이후 100년을 감당할 재능들이 분명이 있는데, 현재 우리 영화산업이 그들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는지 조금 더 미래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면 좋겠어요. 한국 내의 관점에서는요. 외국에서는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등 그런 감독님들의 회고전을, 100주년을 핑계로 더 하면 좋겠고요.
전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칠 시간이 다 되었네요. 오늘, 봉 감독의 영화 세계에 대해 깊이 들어볼 수 있어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바쁜 일정에도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습니다.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