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비어 있는 강렬함, 평양냉면 같은 쳇 베이커의 음악

2024-06-04     김철수(재즈피아니스트, 광운대 교수)

재즈와 평양냉면은 뭔가 생뚱맞은 조합 같지만 ‘평양냉면’ 외에 그 사람의 음악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또 있을까 싶다. 그 사람은 바로 쳇 베이커다. 쿨 재즈의 대표 아이콘이자 노래하는 트럼페터로 잘 알려진 쳇 베이커는 재즈계의 평양냉면 같은 존재이다. 처음 접하면 ‘이게 뭐지?’ 싶다가도 시간이 지난 뒤에 슬금슬금 다시 생각나는 그런 매력을 가진 존재. 그의 음악은 어디 하나 강하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구석이 없다. 그럼에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고 선명하게 기억되며 결국 다시 찾아 듣게 된다. 그래서 누가 재즈 음반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쳇 베이커의 《Chet Baker Sings》를 권한다. 물론 처음에는 좀 심심할 수 있다는 핑계 같은 경고와 함께 말이다.

《Chet Baker Sings》가 발매되었던 1954년은 이제 막 쿨 재즈1라는 새로운 스타일이 세상에 등장하며 재즈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가져다주던 시기였다. 빙 크로스비나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중후하고 한층 멋을 부린 노래에 익숙한 세상에 스물다섯의 잘생긴 백인 청년은 기존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노래와 트럼펫 연주를 보여주었다. 그 흔한 바이브레이션도 거의 하지 않은 채 아무런 꾸밈없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뚜렷한 구분이 가지 않는 미성의 목소리로 흔들림 없는 호흡의 전례 없는 창법을 담아낸 음반이었다. 비웃는 사람도 많았다. 호불호가 갈렸지만 쳇 베이커 인생의 역작이 되었고 재즈 애호가들에게 역대 가장 위대한 재즈 음반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앨범은 총 여덟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A면에는 〈But Not For Me〉, 〈Time After Time〉, 〈My Funny Valentine〉, 〈I Fall In Love Too Easily〉, B면에는 〈There Will Never Be Another You〉,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The Thrill is Gone〉, 〈Look for the Silver Lining〉이다. 자작곡 없이 모두 대중적인 스탠다드 재즈 넘버로 구성되어 있다. 바로 한 해 전, 53년에 발매된 베이커의 전작 《Witch Doctor》에서 들려줬던 빠르고 화려한 비밥2 사운드는 단 한 트랙에도 담겨 있지 않다. 모두 미디엄 템포 혹은 발라드 넘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즉흥연주보다는 각 트랙의 테마를 부각시켰다. 쿨 재즈 대표 명반이라 불리는 데이브 부르백의 《Time Out》이나 마일스 데이비스 《Birth of Cool》의 사운드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듣기 쉬운 상업적 의도가 다분히 보이는 음악이지만 확실히 ‘쿨’하다.

음반의 성공은 2년 뒤 몇 곡을 추가해서 리이슈 음반 발매로 이어진다. 기존 곡들에 〈Like Someone in Love〉,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My Buddy〉등 총 6곡이 추가되었는데 이중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는 쳇 베이커 전기 영화 〈본 투 비 블루Born to be Blue〉 후반부에 에단 호크(극중 쳇 베이커)가 직접 노래하는 명장면으로도 유명한 곡이다. 특히 악기 없이 목소리 혼자 시작하면서 반음씩 하행하는 피아노가 등장하는 편곡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세련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사실 별 기술을 요하는 편곡도 아닌, 그저 비우고 절제하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편곡임에도 세련미가 느껴지는 건 다시금 쳇 베이커의 음악에서 정갈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평양냉면의 육수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여담으로 영화의 에단 호크 버전의 편곡 역시 이를 따르고 있는데 중간에 트럼펫 솔로로 넘어가는 부분에 쳇 베이커의 버전과는 다르게 전조를 주며 음악을 담당했던 테란체 블랜차드의 개성을 담은 부분이 인상적이다.

쳇 베이커의 전성기였던 50년대 중반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냉전의 시대로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세상의 긴장감은 날로 커져만 갔다. 문화계에서는 로큰롤 음악이 탄생하고 TV가 등장했다. 십 대들은 로큰롤에 열광했다. 블루스를 기반하여 만들어진 로큰롤은 흑백의 경계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기존 질서는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아마도 쳇 베이커의 음악은 인류에게 잠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쉼표 같은 것이었을까? 《Chet Baker Sings》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쳇 베이커를 재즈계의 대표 연주자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는 양날의 검이 되어 쳇 베이커의 남은 생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쳇 베이커를 트럼페터로 불렀지만, 트럼페터의 노래를 더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절제되고 담백한, 쿨한 음악을 들려주던 쳇 베이커는 음악 외 삶에 있어서 절재를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반복되는 결혼과 외도 그리고 이혼, 대마초, 헤로인, 코카인 등 다양한 약물 중독은 쳇 베이커의 인생에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베이커의 무절제한 삶은 60년대로 접어들며 본격적으로 그의 삶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쿨 재즈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던 무렵 대중음악계에서는 비틀스를 위시한 영국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물론 비밥의 등장 이후 재즈는 애호가들의 음악이 되었지만 영국의 록 열풍은 재즈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산업 규모의 축소 외에도 음악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쳇 베이커를 더욱 궁지로 몰았다. 마일스 데이비스로 대표되는 퓨전 재즈 혹은 재즈 록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입은 줄고 약물에 대한 의존은 커져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6년 쳇 베이커는 성한 이빨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구타를 당한 상태로 발견된다. 마약상들에게 폭행을 당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문제는 마우스피스를 사용하는 트럼펫의 특성상 트럼페터는 앞니로 악기를 지지해야 한다. 즉, 이가 없다는 것은 트럼펫 연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트럼페터 쳇 베이커는 결국 원하든 원치 않든 노래를 놓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쳇 베이커는 결국 1988년 암스테르담의 어느 호텔 앞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베이커는 같은 호텔 3층에 투숙하고 있었는데 시신 옆에서 그의 방 창문의 빗장이 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창문에 기대었다가 빗장이 부러지며 추락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당시 현장에는 증인도, CCTV도 없었다. 경찰의 조사 끝에 결국 타살이 아닌 실족사 혹은 자살이라는 잠정 결론으로 사건은 마무리된다.

쿨하고 평온한 느낌의 쳇 베이커의 음악과 그의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기록은 매우 대조적이다. 비어 있으나 강렬했던 그의 음악도 그렇고, 잘생겼으나 아름답지 않았던 그의 삶도 그렇듯이 모든 것이 모순이었다. 그러한 모순 속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남긴 유산이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바쁜 일상 잠시 숨 고르기를 할 때 쳇 베이커의 쿨한 음악은 한여름 무더위에 잠시 열을 식혀주는 시원한 냉면 국물 같다. 독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오늘 잠시 시간을 내어 쳇 베이커의 음악과 만나보는 것을…. 물론, 처음에는 조금 심심할 수 있다.

 

 


1 40년대 말에 등장하여 50년대에 성행한 재즈의 서브 장르로서 쉔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와 같은 현대 클래식 음악적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40년대 주류 재즈 스타일을 차지하던 비밥과는 반대로 차분하고 냉소적인 사운드를 갖고 있다하여 쿨 재즈라 불린다. 브라스 편곡에서도 다소 클래식 현악기적 접근을 하며 기존 재즈 브라스 밴드 특유의 스윙 섹션 느낌이 많이 축소되었다. 미국 서부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웨스트 코스트 재즈라고도 한다. 대표 아티스트로는 제리 멀리건, 데이브 부르백, 쳇 베이커, 마일스 데이비스 등이 있다. 쳇 베이커는 52년부터 53년 까지 제리 멀리건 밴드의 트럼펫 주자로 활동하였던 이력이 있다.

2 스윙 빅밴드 시대 이후 등장한 재즈의 서브 장르이다. 40년대 성행하였고 대중음악이었던 재즈를 예술음악의 영역으로 진입시킨 장르이다. 대중성을 중시하던 스윙 빅밴드 재즈에서의 제한된 연주에 반발로 시작된 음악이다. 연주자들은 직업 연주인 스윙 빅밴드 연주가 끝난 후 작은 재즈 클럽에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연주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일종의 즉흥 연주 콘테스트를 갖기 시작했는데 이를 잼 세션이라고 한다. 비밥 음악은 잼 세션을 통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이른바 모던 재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장르가 되었다. 한마디에 보통 두 개 이상의 화성이 존재하고 업 템포의 빠른 스윙 리듬을 기반으로 한다.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가 대표 뮤지션이다. 쳇 베이커는 찰리 파커와도 잠시 협연했던 적이 있다. 본문에 언급한 53년 음반 《Witch Doctor》에서는 베이커의 비밥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김철수 재즈피아니스트, 광운대학교 교수

 

* 《쿨투라》 2024년 6월호(통권 12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