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월평] 2019년의 정태춘 - 정태춘의 '사람들 2019'
1991년 이제 막 초등학생에서 벗어난 나는 사정상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1년을 지내다 오게 되었다. 인터넷도 없던 당시 타지에서 한국을 느낄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한국가요를 듣는 것이었고 미국에서 터를 잡고 살고 있던 친척 누나가 듣던 카세트테이프 몇 개를 빌어와서 들었다. 그중에는 처음 보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음반이 몇 개 섞여 있었는데 거기서 흘러 나오던 음악들은 기존에 듣던 대중음악과 결이 다른 것이었다. 음악뿐만 아니라 가사도 인상적이었는데 이전까지 그렇게 비장하거나 분노에 차 있거나 결연한 노래 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들은 나온지 몇 년 안 된 동시대의 음반들이었음에도 어떤 노래들은 철 지난 옛 시절의 분노를 노래하는 것 같아 어색했고(리메이크 곡이 많긴 했다지만) 어떤 노래들에서는 기존에 듣던 가요에서 듣지 못하던 이야기들에 귀가 끌리기도 했다. 그렇게 낯설음과 흥미로움 속에 <아침이슬>, <광야에서>, <사계> 등의 노래들과 친숙해졌지만 그 시절 이후로 ‘그런 부류’의 노래를 딱히 즐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이런 노래들을 다시 듣게 된 건 대학 입학 후 기웃거린 집회현장에서였다.
정태춘, 박은옥이 그들의 데뷔 40주년을 맞아 7년 만에 새로운 앨범을 내놓았다. 3곡의 신곡에 다시 편곡한 5곡의 옛 곡을 담았다. 다만 박은옥이 앨범에 참여한 비중을 감안하여 정태춘의 솔로 앨범 형태를 띠고 있으며 딸 정새난슬도 노래로 참여하였다.
정·박의 노래는 앞서 언급한 소위 민중가요들과 또 다른 것이지만, 한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같은 서랍에 분류해 넣어두었음을 알게 되었다. 노찾사의 음악과 정·박의 음악을 한데 묶어 인식한 근원은 무엇보다 공통적으로 음악에 짙게 깔린 비감이나 비장함이었고 기술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러한 정서를 담아낸 ‘완연한 단조’의 음악적 구성 등이 주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90년대 이후 한국 대중음악에서 초지일관 완연한 단조 구성의 곡은 찾아보기 힘들다. 메이저 차트에서는 김종서의 <겨울비> 같은 록발라드가 거의 마지막 기억이고 트로트 쪽에서는 전형적인 단조도 많다지만 익살맞은 트로트 리듬으로 흥겹게 풀어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슬픈 노래나 혹은 사회비판적 노래를 만들더라도 풀어내는 감성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주로 담담하거나 담백해진 경우가 많고 단조의 곡이라도 장조의 화성진행이 중간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다. 즉 오롯하고 사무치는 단조 의 노래를 우려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슬픔이나 고독함, 혹은 사회의 부조리함을 다루는 시대의 감성이 달라진 것이다.
데뷔 40주년을 맞아 이어지고 있는 그들의 전국투어 공연에 다녀올 기회를 얻었다. 정태춘은 공연 사이 지난 2000년부터 다음 앨범이 나온 2012년까지 약 10년간 그의 음악 작업이 중단되었던 소회를 밝히며 더 이상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고 느낀 것이 그 원인이었음을 토로 했다. 그리고 2012년에 결국 새 앨범을 낼 수 있었다지만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 해결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면에 솟아나는 창작욕을 어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고백으로 전달됐다.
재능과 감성만큼이나 한 끝 차이의 ‘감각’이 흥행을 좌우하는 대중음악 시장에서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 음악가는 극히 드물다. 왕년의 충성스러운 팬들의 지지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활동하는 것만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대중음악가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이며 정태춘이 토로했던 과거의 고민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늘 새 세대의 감성으로부터 공감받는 음악을 만드는 것, 이것은 성공한 사례가 거의 없을 만큼 힘든 일이며 그렇기에 정태춘의 고민은 어떻게 보면 사실 가장 성공한 음악가의 궁극의 고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꽤 긴 공백 후 7년 만에 선보인 《사람들 2019》에서는 그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신곡은 물론 새롭게 편곡하여 실은 옛 곡들의 선곡과 음악적 방향은 2019년을 사는 정태춘의 감성을 오롯이 드러내기에 의미 있다. 타이틀곡으로 내세운 <사람들 2019>는 물론 <나그네>, <고향>, <들 가운데서> 등 전반적으로 모든 곡의 톤이 2019년의 풍경에 더 어울리는 옷을 입었다. 한편 <빈산>, <연남, 봄날에서> 등에서는 자신만의 색깔을 놓지 않음으로써 음악가로서의 정체성과 시대와의 소통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감을 보여주고 있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