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100주년 연재6] 박승필에서 심재명까지… 한국 영화 제작자 10인

2019-08-01     전찬일(영화평론가, 콘텐츠비평가협회장)

  어떤 영화건 크고 작은 주목을 끄는 이들은 으레 배우들이거나 감독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자비로 충당하든 외부에서 끌어오든, 다른 업무를 겸하든 그렇지 않든, 필요 자금을 마련해 해당 영화를 만들어내는 책임자는 다름 아닌 제작자다. 역학 관계 면에서 더러는 감독이 주도권을 쥐곤 하더라도, 제작자 없이는 그 어느 영화도 존재할 수 없는 것. 이런 절대적 비중을 감안할 때, 대중관객의 관심권에서는 물론이고 언론에서건 전문가들의 논의에서건 제작자가 좀처럼 거론되지 않는 현실은, 당사자들에겐 유감을 넘어 억울한 감마저 없지 않을 터. 책임은 무한으로 지면서, 영예·영광으로부터는 일정 정도 비켜서 있거나, 기껏 부차적으로밖에 누리지 못하니 말이다.

  이 연재에서도 마찬가지다. 감독과 배우에 이어 세 번째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다. 감독이나 배우 편에서와는 달리, 그 존재를 모르는 제작자들이 없지 않아 한국 영화 100년의 대표작들을 찾아 그 이름을 확인해야만 했다. 한국 청춘영화의 대명사 <맨발의 청춘>(1964, 김기덕 감독)의 제작자 차태진이 그 경우였다. 판단컨대 그를 뺄 수는 없었다.

  반면 부득이 선택하지 않은 이름들도 적잖다. 우선 이만희 감독의 신화적 문제작인 <만추>(1966)의 제작자 호현찬(1926~ )이 그중 한 명이다. 그는 <만추> 외에도 홍성기 감독의 <출격명령>(1954), 신상옥 감독의 <빨간 마후라>(1964) 등과 함께 한국 영화 100년사의 몇 안 되는, 역시 이만희가 감독한 공군 소재 영화 <창공에 산다>(1968)를 비롯해 <묵화>(1969, 김수동)부터 <연>(1970, 배석인)에 이르는 십수 편의 단편 문화영화를 제작했으며,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1965), <날개부인>(1965), <사격장의 아이들>(1967) 등 수작들을 기획한 명제작자요 기획자였다.

  그러나 호현찬에게 그 제작·기획은 “진정한 영화인이 아닌 사이비 영화상인들이 앞장서지 말고 영화계의 실질적이고 참신한 사람들이 앞서 가는 영화계의 풍토가 요망”(www.kmdb.or.kr)된다는 일념에서 뛰어들었을, 일종의 ‘외도’요 ‘일탈’이었을 공산이 크다. 그는 제작자이기 이전에 이 땅의 대표적 문화 전문 기자였고, 『한국영화 100년』(문학사상사, 2000년/2003년 개정판) 등을 저술한 영화 연구자·평론가였다.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영화진흥공사 사장 등 영화·문화 행정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한국 영화사를 대표하는 거대 제작자였으나 감독으로 더, 그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신상옥 등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에서 감독·각본에 제작을 겸했던 <하녀>(1960)의 김기영은 말할 것 없고 강우석, 이준익, 강제규, 윤제균, 김한민 등 적잖은 ‘신상옥의 후예’들도 한국 영화 100주년 제작자 10인에는 포함시키질 않았다. 아래 최종 선정 기준은 제작자로서 집중성, 지속성, 생명력, 대표성, 상징성 등이다. 

1.박승필(朴承弼; 1875∼1932) : 영화 제작 100주년 기점작 <의리적 구토>의 그 제작자

  그 이름은 언급조차 하진 않았으나, 한국 영화 제작 100주년 기점작 <의리적 구토>의 제작자다. 김종원도 진단했듯, 일찌감치 ‘활동사진’에 눈을 떠 투자를 할 만큼 걸출한 문화의식과 사업적 수완을 겸비한 천부적 흥행사이자 명제작자였다. 나운규의 제작자 버전이랄까. “그의 전성기는 단성사 시절이었다. 1914년 9월, 일본인 다무라(田村)에게 넘어갔던 단성사의 경영권을 이어받아 영화 전용관으로 바꾸고, <아 무정Les Misérables>(1913), <명금>, <채플린의 권투The Champion>(1915) 등 해외의 화제작을 소개하는 한편 국내 영화의 제작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의리적 구토>와 같은 날 선보인 한국 최초의 기록영화 <경성전시의 경(京城全市의 景)>, 김도산 감독의 <의적>(1920)과 <국경>(1923), 그리고 토착 자본과 인력으로 제작된 첫 한국 영화 <장화홍련전>(1924) 등 총 10편이 그 역사적 국내 영화들이었다. 민족 영화 자본의 유일한 거처 단성사의 사주였던 박승필 그가 없었다면, 비단 일제식민기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사 전체가 얼마나 초라했을까.

2.차태진(車泰辰; 1924~2003) : 다름 아닌 <맨발의 청춘>의 산파

  일본 영화 <진흙투성이의 순정(泥だらけの純情)>(1963, 나카히라 코우)을 노골적으로 표절했든, 몰래 ‘원안’으로 활용했든 ‘국산 청춘영화의 대명사’로 간주·평가돼온 신성일, 엄앵란, 트위스트 킴 주·조연의 <맨발의 청춘>(김기덕)을 탄생시킨 산파다. 《한성일보》 기자, 《연합신문사》 문화부장 등 언론계 출신으로, 김기덕 감독과 함께 극동흥업을 창립해 김기덕 감독의 <5인의 해병>(1961), 엄심호 감독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1962),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의 딸들>(1963) 등을 제작했다. <맨발의 청춘>이후에도 청춘영화를 포함해 장르 영화의 달인이었던 파트너 김기덕 감독과 <남과 북>(1964), <흑발의 청춘>(1965), <내 주먹을 사라>, <말띠신부>(1966), <대괴수 용가리>(1967), <청춘고백>(1968)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정진우 감독의 <초우>(1966), <춘희>, <폭로>(1967), <청춘>(1969), 임권택 감독의 <십년세도>(1964), 김수용 감독의<날개부인>(1965), 이성구 감독의 <과부의 딸>(1965) 등 명작들도 그의 산물들. 개인적으로는 ‘제작자의 발견’으로 손색없다. 

3.한갑진(韓甲振; 1924 ~ 2018) : ‘미워도 다시한번 시리즈’와 ‘난쏘공’의 숨은 주역

  한국 멜로 영화의 영원한 대명사 <미워도 다시한번>(1968, 정소영)의 제작자다. 1967년 김형근(<갯마을, 1965, 김수용>, <돌무지, 1967, 정창화), <육체의 길, 1967, 조긍하>)과 함께 만들었다는 대양영화사를 통해서 였던 듯. 정소영 감독과는 1969년과 1970년 두 편을 더 선보였다. 이후 1972년 설립한 명 제작사 ‘한진흥업’을 통해 숱한 한국 영화사의 문제작들을 빚어냈다. 그 중에는 ‘영화천재’라 일컬어졌던 하길종의 <여자를 찾습니다>(1976)와 <한네의 승천>(1977),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저평가된 명장 이원세의 문제적 걸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과 <엄마없는 하늘아래> 시리즈(1977/1977/1978),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 장길수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1991), 김영빈의 <김의 전쟁>(1992) 등이 있다. 그 이름은 알고 있었어도, 차태진과 더불어 ‘발견’으로 손색없다. 한갑진은 외화수입업자로도 일가를 이뤘는바, 일본을 통한 수입 관행을 깨고 국내 최초로 미국과 직접 계약을 통해 수입가를 낮춘 <록키>(1976),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가 대표작들. 

4.이우석(李于錫; 1935~ ) : 긴 생명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현역 제작자

  1970년 설립된 동아수출공사의 그 이우석 회장이다. 대개의 다른 동료, 선후배 제작자들과는 달리 50년 가까운 긴 세월을 제작자 등으로 현역 활동을 펼쳐왔다. 그 생명력에서 배우 안성기, 감독 이장호 등에 견줄 만하다. 그가 제작한 일련의 영화 목록들에는 가히 숨이 가빠질 터. 단지 한국 리얼리즘 영화나 1980년대 이후 한국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100년사의 어떤 변곡점인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장호)을 비롯해, 그 전에는 김기영의 <파계>(1974), <육체의 약속>(1975), <이어도> (1977)와 문여송의 <진짜 진짜 잊지마>(1976), 변장호의 <을화>(1979) 등이, 그 후에는 이원세의 <매일 죽는 남자>(1980), 김호선의 <세번은 짧게 세번은 길게>(1981), 배창호의 <적도의 꽃>(1983)과 <깊고 푸른 밤>(1984),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와 <그들도 우리처럼(1990), 그리고 또 다른 한국현대 영화의 어떤 분수령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홍상수) 등이 있다. 잇단 ‘발견의 감동’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평론가로서 무지 또한 마찬가지고….

5.박종찬(朴宗瓚; 1938 ~ ) : 이장호에서 하길종, 김호선을 거쳐 임권택까지…

  29세의 신예 이장호를 기용해 <별들의 고향>(1974)의 기념비적 대박을 기획·제작한 주역이다. 동아수출공사 등과 더불어, 한때 외국 영화 수입 및 한국 영화 제작에서 독보적 맹위를 떨쳤던 화천공사의 주인공.
무역회사에서 출발해 대 변신에 성공한 그 화제의 영화사는, 이장호 감독과 함께 <어둠의 자식들>(1981),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 <과부춤>(1983), <바보선언>(1983) 등을 더 만들어냈다. 하길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속 별들의 고향>(1978), <병태와 영자>(1979) 등, 김호선의 <겨울여자>(1977) 등도 박종찬의 자식들. 그는 그저 “영화를 잘 만드는 중견 감독에 불과했던 임권택에게 작가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주기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안개마을>(1981), <만다라>(1981), <오염된 자식들>(1982), <길소뜸>(1985), <아다다>(1987) 등이 그 산물들. 또한 <에덴의 동쪽>(1955), <가위손>(1990), <언더그라운드>(1995) 등 최고 외화를 엄선·소개해 한국 대중문화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이태원(李泰元; 1938 ~ ) : 임권택의 분신을 넘어, 그 주목할 만한 영화적 폭과 깊이

  위 박종찬과 더불어 ‘임권택의 오늘’을 가능케 한 핵심 주역이다. 그에 이어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부터 <하류인생>(2004)까지 10편 이상을 제작했다. 그중에는 한국 영화 흥행사의 획을 그었던 장군의 아들(1990)과 <서편제>(1993)가, 조정래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옮긴 <태백산맥>(1994)도,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칸 경쟁 부문에 입성한 <춘향뎐>(2000)과 수상작<취화선>(2002)도 있다. 십수 년간 이태원과 임권택 촬영감독 정일성 ‘삼인방’은 한국 영화에 크고 작은 활력·동기를 제공했다. 그 기간 동안 이태원 없는 임권택은 존재 불가능했다. 임권택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권택만은 아니다. 이장호(<무릎과 무릎사이, 1984>, <어우동,1985>)도, 배창호(<기쁜 우리 젊은날, 1987>, <꿈, 1990>)도, 이두용(<장남, 1984>, <뽕, 1985>)도, 곽지균(<그후로도 오랫동안, 1989>, <젊은 날의 초상, 1990>)도, 장선우(<경마장 가는 길, 1991>, <화엄경, 1993>) 등도 이태원은 함께 했다. <미지왕>(1996, 김용태) 같은 ‘미친 문제작’도 성원했다. 그 영화적 폭과 깊이에 감탄한다. 

7.황기성(1940~ ) : ‘황기성 사단’의 그 황기성, 구 제작자와 신진 제작자 간의 가교 역할

  ‘황기성 사단’이란 표현이 유행어처럼 회자될 때가 있었다. 우리 영화의 과도기인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를 관통하면서였다. 황기성이란 이름은 마치 제작자의 대명사인 양 돌아다녔다. 하지만 여기 소개되는 다른 제작자들의 필모그래피와 비교하면 그 무게감에서 다소 떨어지는 영화들이 적지 않다. 내 숨을 가쁘게 하는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문제작들이 거의 없다. <고래사냥2>(1985, 배창호), <성공시대>(1988, 장선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강우석), <닥터봉>(1995, 이광훈), <고스트 맘마>(1996, 한지승), <찜>(1998, 한지승), <오! 해피데이>(2003, 윤한열), <아홉살 인생>(2004), <후궁: 제왕의 첩>(김대승, 2011) 등이다. 그러나 “황기성 사단은 1950년대 이래로 충무로에서 전개되었던 기존의 제작 체계와 1992년 <결혼 이야기>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기획영’시대의 신진 제작사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하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활동”(www.kmdb.or.kr)했다. 당시 황기성은 맏형 격인 제작자였다. 그 역할이 그 사단 출신 이춘연 씨네2000 대표에게 넘어가기 전까지는.

8.신철(申哲; 1958~ ) : 한국 최초로 영화 기획의 개념을 도입한 제작자

  이춘연과 더불어 ‘황기성 사단’이 배출한 대표 기획·제작자다. 1988년 설립한 영화 전문 기획사 신씨네를 통해 영화 기획의 새장을 열었다. 강우석 데뷔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비롯해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90, 김유진), <베를린 리포트>(1991, 박광수) 등을 기획하며 한국 최초로 영화 기획의 개념을 도입한 것으로 평해진다. <결혼 이야기>에서 2년에 걸쳐 신혼부부들의 일상을 조사해 12번에 걸친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했다는 일화는 영화계의 전설로 전해진다. 신철은 1992년을 기해, 기획을 넘어 제작자로 나아간다. 강우석의 <미스터 맘마>(1992)를 필두로, 강제규의 역사적 판타지 멜로 <은행나무 침대>(1996), 이정국과 김유진의 감성 멜로 <편지>(1997)와 <약속>(1998)에 이어, 장선우의 <거짓말>(2000)을 거쳐 곽재용의 <엽기적인 그녀>(2002)로 공전의 대성공을 일궈낸다. 그 이후 숙원 사업인 ‘이소룡 프로젝트’와 <로버트 태권 V> 등의 영화화를 추진 중이나, 가시적 성과를 이루진 못하고 있다.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을 겸하고 있다. 

9.차승재(車勝宰; 1960~ ) : <살인의 추억>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명제작자

  1995년 (주)우노필름 설립해 한국 영화 제작계를 풍미했던 명제작자다. 김상진의 <돈을 갖고 튀어라>가 제작자 신고작. 1992년 장현수의 <걸어서 하늘까지> 제작지휘를 맡으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후 특유의 뚝심과 추진력으로, 허진호를 발견(<8월의 크리스마스, 1998>)했고 계속 지지(<봄날은 간다, 2001>)했다. <기생충>으로 칸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에게 장편 데뷔(<플란다스의 개, 2000>) 기회를 제공했고, <살인의 추억>(2003)을 통해 데뷔작의 부진을 말끔히 떨쳐내게 하면서 한국 (스릴러) 영화사의 신기원을 이루게 했다. 장준환과 한재림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들인 <지구를 지켜라>(2003)와 <연애의 목적>(2005)을 발견한 이도, 유하의 <결혼은, 미친짓이다>(2002)부터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를, 최동훈의 <범죄의 재구성>(2004)과 <타짜>(2006)를, 김성수의 <비트>(1997)부터 <무사>(2000)까지 가능케 한 이도 차승재였다. 영화 목록을 굳이 더 나열할 필요 있을까. 

10.심재명(沈載明; 1963 ~ ) : 휴머니즘 색채 가득한 ‘착한’ 영화들 주로 제작

  “서울극장에서 공모한 ‘영화광고 카피 공채’에 응시, 당선되어 영화 홍보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극장에서 2년 반, 극동스크린에서 2년을 일한 후에 프리랜서로 영화 홍보일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95년에 ‘명기획 사무실’을 냈고 그것이 후에 ‘명필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www.kmdb.or.kr). 명필름 심재명 대표의 영화계 입문 배경이다. 한때 차승재와 대결 구도 아닌 대결 구도를 형성하며, 한국 영화 제작계를 양분했던 명제작자다. 그는 차승재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 스타일, 취향, 지향, 주제의 영화들을 ‘꾸준히’ 제작해왔다.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부터 육상효의 <나의 특별한 형제>(2019)까지 20편을. 그 중에는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도, 국산 애니메이션 최고 흥행 기록을 지니고 있는 <마당을 나온 암탉>(2011, 오성윤)도, 임권택의 <화장>(2014)도, 김현석의 <아이 캔 스피크>(2017)도 있다.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휴머니즘 색채가득한 ‘착한’ 영화들이 주를 이룬다. 그는 부군인 명필름 이은 대표이사와 늘 공동으로 함께 해왔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