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대마초는 여전히 금기어다. 한 시절 일부 연예인들이 대마초 합법화를 주장했지만, 대마초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정서로 인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1975년 12월 터진 연예계 대마초 사건은 우리 대중음악이 빅뱅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가수 몇 명을 구속하거나 활동중단 시킨 사건이었지만 모처럼 발아하기 시작한 한국적인 록과 포크 음악이 이로 인해 뎅강 싹이 잘렸다.
우선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자. 경향신문 1975년 12월 4일과 5일 자에 이장희·윤형주·이종용 등 3명의 가수가 습관성의약품관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고 보도했다. 이틀 뒤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신중현과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의 가수 김추자도 구속됐다. 이들 외에도 가수 이수미, 김세환, 김정호, 장현 등을 비롯하여 정훈희, 임창제, 임희숙 등이 구속되거나 출연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2차 대마초 파동 때 막 인기 가도를 달리던 조용필까지도 소위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구타를 당하는 등 곤욕을 치른 뒤에 출연 정지를 당했다.
이 사건은 그 해 일어났던 굵직굵직한 시국사건을 한꺼번에 덮어 버렸다. 말하자면 국민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려놓은 셈이다. 1975년 2월 실시된 헌정사상 최초로 유신헌법의 찬반을 물었던 국민 투표, 훗날 무죄를 선고받은 이른바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에 대한 사형 집행(4월),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 등이 그해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도 위기상황이었다. 1973년 오일쇼크로 인한 충격이 나타나면서 물가가 급등하면서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획책하면서 벌인 일련의 범죄(?)들이 연예인 대마초 사건으로 다묻혀버린 것이다. 총칼로 국민을 짓누르던 정권이 배운 건 연예인들을 앞세운 사건을 정권의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이었다. 대마초 사건 직후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강성발언을 쏟아냈다. 박 대통령은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 내부의 국민정신 속의 녹슨 것을 벗기는 것”이라면서 “대마초·마리화나 또는 남녀를 분간하기 어려운 머리 모양을 비롯하여 음악·영화·책 속에 나타나기 쉬운 불건전 요인들이 그것”이라고 콕 집어서 언급했다.
또 그다음 해 초 법무부 순시에서 “지금 젊은이들이 대마초를 피우고 있다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일”이라며 “반사회적, 반시국적 범죄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대마초를 수출입·매매·수수·흡연한 사람에게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까지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대마초 관리법안이 제정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한 마디로 대마초 가수들만 고초를 겪은 게 아니었다. 윤항기와 남진 등 몇몇 정상급 가수들이 ‘장발’로 찍혔고, 장미화·옥희·소연·윤복희·박경희·김세레나·문주란 등은 퇴폐적인 복장과 제스처로 출연을 제한받았다.
연예계, 특히 가요계에 대마초가 유행한 것은 미8군 무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수들이 동두천이나 파주 등 미8군 클럽에서 밤일을 자주 했었기에 자연스럽게 대기실 등에서 대마초를 접한 것이다. 조용필도 당시를 회고하면서 “어렴풋이 미8군 클럽에서 누군가가 담배의 일종이라고 피워보라고 권해서 무심코 피웠던 기억이 있다”라면서 “내가 명성을 얻자 누군가가 그때 일을 밀고하면서 끌려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렜을 때 통치자의 한 마디로 대마초 연예인들이 된서리를 맞았지만, 한국 대중음악은 그 사건으로 장례를 치렀다.
60년대 말부터 새로운 대중음악의 기류를 만들면서 우리 가요를 업그레이드시킨 포크가 몰락했다. 이장희와 김세환, 윤형주 등 포크 1세대들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대중음악이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으나 이내 사그러 들었다. 또 하나의 큰 손실은 신중현의 몰락이었다. 신중현은 누구인가? 한국적 록 음악을 주도하는 연주자이자 창작자로, 김추자 등 대형스타를 키우는 기획자로 자리잡아가는 시점이었다. 훗날 한국의 대중음악은 신중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신중현은 탁월한 엔터테이너이자 기획자였다. 그가 이카로스처럼 날개가 꺾인 것이다.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의 동반 몰락 이후 한국 대중음악계의 풍경은 어땠을까? 1976년 연말 가수왕은 ‘해뜰 날’을 부른 송대관이 차지했다. 또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부른 김훈과 ‘처녀 뱃사공’의 김인순 등이 10대 가수 반열에 올랐다. 물론 이들의 음악을 폄훼하고 싶은 뜻은 아니지만, 직전의 대중음악계의 수준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누구든지 알 수 있다. 역사에서 ‘만약’은 없지만, 대마초 사건이 없었다면 70년대 후반 한국 대중음악계는 가히 전성기를 맞았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아들 지만 군이 대마초에 손을 댄 것을 알고 크게 역정을 내면서 대마초 사범 단속이 시작됐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 박지만은 성장하면서 대마초는 물론 히로뽕 등 약물에 손을 대면서 구속되는 등 평탄치 않은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지만 군이 그 당시 대마초에 손을 댔는지 밝혀진 건 없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뒤에 대마초로 활동이 묶여있던 연예인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창밖의 여자’로 큰 성공을 기록한 조용필이 대표적이다. 그가 여전히 대마초 연예인으로 발이 묶여있었다면 지금의 조용필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서울의 봄’이 끝난 뒤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대마초 가수들이 다시 탄압을 받았다. 보컬 그룹 ‘사랑과 평화’(1980년 8월 12일), 국악인 5인(1980년 10월 2일)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됐다. 1983년에는 연예인 17명이 연루된 대마초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대마초와 연예인과 정치가 한 묶음이 되어 음모가 난무하던 시절을 뚫고 우리 대중음악은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광풍이 없었다면 한국의 대중음악은 훨씬 더 일찍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 《쿨투라》 2020년 7월호(통권 73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