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잡지의 역사와 역할,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다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책이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마음산책, 2014)이다. 이 책을 집필한 문학·문화연구자 천정환은 1945년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123편의 잡지 창간사를 검토하면서 한국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낸다. 우선 그는 잡지의 역사를 파악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강조한다. 다른 매체에 비하여 잡지는 다종다양한 형태로 제작될 수 있고, 또한 그만큼 알게 모르게 소멸하는 탓이다. 시곗바늘을 해방기로 돌려보자. 당시 신문을 창간하는 일에 비하면, 잡

나는 직함을 써야할 때 ‘아트 저널리스트’라고 쓴다. 잡지사를 떠난 후의 시간이 잡지사에 근무했던 시간을 곧 따라잡을 만큼 오래 지났지만 아직은 다른 직함을 찾을 생각이 없다. 여러 매체에 고정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가끔 기고를 하거나 출판이나 편집, 그 밖에 미술 관련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널리스트’라는 직함을 고집하는 이유는 첫 직장으로 미술 잡지사를 들어가서 형성된 나의 세계관이 다른 일을 하는 지금에도 유효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세계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때는 모든 출판물

음악잡지는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힘겨웠던 일제강점기에도, 또한 한국 전쟁기에도 출간되었다. 인간이 음악 없이 살 수 없다는 증거다.이러한 음악 잡지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전문잡지가 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지적,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있음을 보여줘 반가운 현상일 수밖에 없다.”(《매일경제》 1984. 4. 4.) 1982년 9월 《피아노 음악》, 1984년 3월 《객석》, 4월 《음악동아》가 창간됐다. 그때 사람들의 교양을 담당했던 음악 잡지들이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유일하게 《객석》만 20세기를 지

영화잡지는 당대를 살았던 대중들의 취향과 영화의 흐름을 반영한다. 아울러 그 시대의 미적 감각과 유행, 배우의 인기 판도, 인쇄 수준은 물론, 언어 관습, 표현의 경향까지 엿보게 한다. 초창기의 잡지를 보면 ‘활동배우(영화배우)’, 또는 ‘애활가(영화팬)’, ‘활계(영화계)’, ‘연속사진(연속활동사진)’ 등 생소한 언어들이 자주 나오고, 희극배우 채플린을 ‘잡후린雜侯麟’이라 적고 존칭까지 붙이는 등 익숙지 못한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그동안 발간된 영화잡지는 《씨네21》 등 주간지를 제외하고도 모두 50여 종에 이른다. 이는

1. 근대적인 문화 제도의 형성과 잡지‘잡지’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현재의 역할과 미래를 다룬다는 것은 그 검토 영역이 ‘문화 제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곧 문화 자체의 내용을 위주로 체계를 세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한, 그리고 그 내용을 형성하게 한 범주이자 형식으로서의 제도를 체계적으로 살펴본다는 뜻이 된다. 잡지의 출현은 기본적으로 서민의식·민중의식의 성장과 상관이 있으며, 그 이름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지리잡박’한 동시대의 온갖 문화적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는 한 시대의 잡지가 가진 사회사 반영의 소명

개화기에서 일제 강점기최남선의 근대잡지 《소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이다. 신체시新體詩 「해에서 소년에게」가 창간호에 실려 우리 문학사에 이정표를 세웠다는 사실은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누구나 배웠을 것이다. 《소년》에 앞서 발행된 잡지도 있었지만, 잡지협회는 《소년》이 근대 잡지사를 선도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어 1965년부터 이 잡지 창간일인 11월 1일을 ‘잡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최남선은 《소년》 이후에도 여러 잡지를 발행했다. 《붉은져고리》(1913), 《새별》(1913), 《아이들보이》(1913), 《청춘》(191

갤러리10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 가능하지만 경험 바깥인: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_강수미18 쿨투라 기획전시: 유성민 작가 | 전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신비 - 《우주의 비전》_박영민28 책을 여는 미술 | 초봄의 눈, 초록의 마음 - 김은정 작가_최영건 인터뷰32 〈플로우〉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 | 인간보다 고양이의 여정을 지켜보는 게 훨씬 더 감정적으로 와닿을 것 같았어요_설재원40 제46대 한국잡지협회 백동민 회장 | 잡지협회의 새로운 미래와 K-매거진산업_손희 Theme K-매거진52 한국 잡지의 역사와

지난 20년간 한국뮤지컬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2001년 한국에 상륙한 〈오페라의 유령〉이 예상밖으로 흥행을 거둔 뒤 한국 뮤지컬시장은 전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00년 전후 연간 매출액이 100억 원도 안 되던 뮤지컬 시장은 2024년 매출액 4,651억 원을 기록했다. 포스트 코로나 이후 성장세가 두드러져 2023년에는 공연 시장이 영화 시장의 매출을 앞지르기도 했다.이처럼 뮤지컬시장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좋은 작품을 만든 제작자도 있었지만 재능 있는 뮤지컬 배우들의 공도 상당히 컸다. 1세대 뮤지컬 배우

주지하다시피 이 나라의 ‘뮤지컬영화’, 일명 ‘무비컬’은 SF 영화와 더불어 대표적인 비인기·미발전 장르다.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언급할 만한 무비컬 편 수가 기껏 10편 전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서 그 역사와 현실의 초라함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아 성황 리에 공연 중인 〈명성황후〉를 비롯해 〈알라딘〉, 〈지킬 앤 하이드〉, 〈웃는 남자〉에 이르기까지, 2월 25일 기준 ‘많이 예매한 공연’ 순위에서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네 편이 모두 뮤지컬이란 점을 감안하거나, 2009년 초연 이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뮤지컬로 자

뮤지컬 〈마리 퀴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아마 많은 이들이 마리가 라듐을 발견한 극적인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꾸준함을 넘어서서 집착적으로, 한껏 집요하게 새로운 물질을 찾아내는 데에 몰두한 마리 퀴리. 작품을 보는 이로 하여금 삶에 대한 의지마저 느끼게 만드는 뜨거운 장면이다. 그리고 이 정서는 비단 한국에서만 유효하지 않았다. ‘열정’, ‘의지’, ‘고통’, ‘극복’ 등 마리 퀴리라는 인물에게서 발현된 여러 가지 키워드들은 이 작품이 외국어로 공연된 순간에도 빛을 발했다. 2024년, 〈마리 퀴리〉 는 영국 웨스

2024년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의 통계에 따르면, 공연계 매출 상위권 안에 〈시카고〉 〈레미제라블〉 〈지킬 앤 하이드〉(이하 〈지킬〉) 〈헤드윅〉 〈킹키부츠〉 〈하데스타운〉이 확인된다. 이들은 모두 외국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저작권료를 지급하고 한국어로 공연하는 라이선스license뮤지컬에 해당한다. 라이선스는 원작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레플리카replica와 각색이 가능한 논레플리카(스몰라이선스)로 나뉜다. 위 흥행작에서 〈레미제라블〉 〈시카고〉 〈킹키부츠〉는 레플리카, 〈지킬〉 〈헤드윅〉은 스몰라이선스이다. 뮤지컬이 급부상되던

2024년 8월 기준, 가장 큰 뮤지컬 시장이라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의 흐름은 크게 다양성, 익숙함, 다시 쓰기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젠더와 인종의 다양성이 뮤지컬 〈서프스Suffs〉, 〈앤줄리엣&Juliet〉에서, 미국인에게 익숙한 노래나 소재가 뮤지컬로 재탄생한 〈물랑루즈!Moulin Rouge!〉, 〈아웃사이더스The Outsiders〉, 〈헬스 키친Hell’s Kitchen〉, 고전 작품을 다시 쓴 뮤지컬 〈하데스 타운Hades Town〉, 〈캣츠: “젤리클 무도회”Cats: “The Jellicle Ball”〉 등

구독하는 OTT가 여럿이고, AI가 작성한 리포트인지 판별해야 하는 일이 교수의 일상인 첨단의 디지털 시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아날로그 예술장르인 뮤지컬이 2025년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우리 옛말처럼 무대의 현장성은 ‘날 것이 주는 생동감’을 생생히 전달하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모든 공연이 호황이란 뜻은 아니다. 연극이나 오페라, 클래식 등 전통적 공연예술들은 여전히 애호가를 중심으로 하는 장르적 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태생적 배경을 보면 이해가 쉽다. 뮤지컬의 등장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한 도

갤러리10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 어디에서 왔나요?: 김성환의 ‘은유로서 하와이’ _강수미18 박신양 작가 특별전 | 숙명을 들쳐 메고 제 길을 가는 당나귀처럼 그리겠다 _박영민28 유성민 개인전 《우주의 비전》 | 정체성과 이질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창의적 지평 _유성호34 책을 여는 미술 | 회복과 재탄생의 흰 빛들 – 이수진 작가와 홍지희 작가 _최영건 인터뷰38 소설가 한지수 | 제 소설은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소설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_고승철44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 | 누군가는 가야할 길이라면,

1. 문화전반의 이슈와 동향動向손정순 2025년 을사년 새해에 편집위원님들을 한 자리에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지난 해 한국사회의 가장 큰 이슈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계엄령 선포로 이어진 탄핵정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수선한 정치적 상황 속에 2025년 새해를 맞이했는데요. 《쿨투라》는 새해에도 변함없이 문화전문지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며 문화현장에서 중핵을 짚어내는 매체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자 합니다.해마다 신년 초에는 편집위원들과 함께 쿨투라 어워즈 좌담을 진행하는데요.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졌던 우리 문화의 동향을

체험과 애착…장소로서의 하얼빈하얼빈은 한국인에게 ‘안중근의 도시’이다. 구체적으로는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도시로 기억된다. 얼어붙은 북국의 하늘에 울려 퍼진 그 총성으로 인해 하얼빈은 한국인에게 공간이 아니라 장소가 된다. 이-푸 투안에 의하면, 공간과 장소는 그 의미가 다르다. 공간은 추상적인 개념이며, 공간에 개인의 삶과 체험, 애착이 녹아들면 장소가 된다. 특정 도시가 누구에게는 공간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애틋한 고향이 되는 배경이다. 하얼빈은 한국인의 집단적인 경험과 애착과 정서가

인터뷰어 김민정(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사 진 김태웅일 시 2025년 1월 20일 오후 2시 장 소 광화문 인근 우민호 감독 사무실인터뷰를 불과 보름 앞두고, 안중근 장군이 지나갔던 그 길을 나 역시 지나왔다. 러시아 연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를 거쳐 중국 하얼빈까지. 그래서였다. 그와 그들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미래의 대한민국’에서 만난 영화 〈하얼빈〉이 반가웠고, 영화 〈하얼빈〉을 만든 우민호 감독과의 인터뷰는 더 반가웠다. 그의 사무실에서 러시아에서 사온 알료카 초콜렛을 건네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다. 김민정 영

2025 쿨투라 어워즈 | 오늘의 영화 수상자 〈하얼빈〉의우민호 감독 매해 문화예술인 100명의 설문 추천을 통해 선정하는 〈쿨투라 어워즈〉의 오늘의 영화부문에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이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한 해의 최고작으로 선정되었다.우리 가슴에 불을 지피며 2024년의 마지막을 뜨겁게 달군 우민호 감독을 만나 작품의 뒷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우민호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졸업. 연출작으로 〈파괴된 사나이〉(2010), 〈간첩〉(2012), 〈내부자들〉(2015), 〈마약왕〉(2018), 〈남산의 부장들〉(2020), 〈하얼빈〉(

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조금의 호들갑도 없이 덤덤하게 서술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안지’의 이혼 사실을 언급하며 시작된다. 어렸을 적 안지는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다. 이 노력은 ‘좋아하는 마음’과 관계되는데,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던 수학 선생을 다른 친구들이 싫어하자 따라서 싫어하는 식이다. 평균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며 살

인터뷰어 허희(문학평론가) 사 진 김태웅일 시 2025년 1월 20일 장 소 카페 느티3년 전 여름 김지연을 편집자로서 처음 만났다. 얼마 후 나는 그녀가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발표하는 작품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부터였다. 문예지 업무와 관련한 회의가 주기적으로 열려 그때마다 그녀와 대면했지만, 둘 다 말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드러내 놓고 표현하지 않았으나 내심 그녀의 소설을 애독하며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작품을 특히 동료 문인이 아꼈다.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