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몰랐던 엄마의 청춘은 푸르고 아름다웠다. 수줍은 문학소녀였던 엄마는 딸을 위해 소중한 꿈을 바다에 묻었다. 자신의 엄마가 꼭 그랬던 것처럼.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잔잔한 감동을 일으키며 국내외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는 힐링 드라마로 사랑받고 있다. 지난 7일 첫 공개된 이 작품은
1960년대 제주도를 배경으로 오애순의 인생 궤적을 쫓으며 삶의 희로애락을 4계절에 빗대 풀어낸다. 서정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는 대사는 한편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처럼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폭싹 속았수다〉는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세상은 빨라지고 편리해졌지만, 현대인은 차가운 디지털 기기를 사이에 두고 더 단절되고 고독함을 느낀다. 이 드라마는 제목처럼 오늘도 주어진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순수하고 인간적이었던 그 시절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면서 말이다.
〈폭싹 속았수다〉에는 시대의 파고를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낸 3대가 등장한다.애순의 엄마 광례는 해방 전후 가난과 힘겹게 싸웠던 조부모님 세대에 해당한다. 제주 해녀인 광례는 남편과 사별한 뒤 아이 셋을 키우기 위해 악착 같이 삶을 살아간다. 귀신 보다 배곯는 자식들이 더 무섭다는 광례는 전복 한 마리라도 더 따기 위해 가장 늦게 바다에서 나온다. 애순은 그런 엄마가 늘 못마땅하다. 광례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똑소리 나는 딸이 자신과 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를 살아가는 애순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남녀 차별이 횡행하던 시절, 여자라는 이유로 늘 부급장에 머물러야 하고 대학은 꿈도 못 꾸고 공장에서 일해서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상천지에 자신의 편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애순은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왜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 가느냐”면서 울부짖는다. 애순을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던 관식만이 조용히 애순을 보듬는다. “노스텔지어도 모르는 섬 놈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던 애순은 무쇠처럼 한결같은 관식의 마음을 결국 받아들인다.


대본을 집필한 임상춘 작가는 남녀 주인공의 쌍방 구원 서사를 유쾌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왔다.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는 스펙이 부족하고 변방에 밀려났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는 청춘들의 성장 로맨스를 그렸고,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사회적인 편견으로 소외받던 미혼모 동백이 경찰 용식의 해바라기 같은 사랑으로 인해 활짝 피어나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담았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의 통찰력이 더욱 깊어지고 짙어졌다.
어느덧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애순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첫째 딸 금명이를 낳은 애순은 “세상이 다 내 품에 들어왔다”면서 행복해하고 “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면서 애써 자신을 위로한다. 고된 시집살이와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시댁 식구의 눈칫밥 때문에 서럽지만, 바람막이가 돼주는 남편 관식 덕에 버티며 살아간다. 거친 비바람이 몰아쳐도 두 사람은 손을 놓지 않고 삶이라는 거친 파도를 함께 넘어간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뚜렷한 악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장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성격파탄자 부상길이 최대 빌런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모습은 상당히 희화화돼 묘사된다.
대신 작가는 도동리 사람들의 연대에 주목한다. 광례와 함께 물질을 했던 해녀들은 엄마처럼 애순의 곁을 묵묵히 지켜주고 주인집 노부부는 텅빈 애순이 집 쌀독에 몰래 쌀을 채워 놓는다. 얄밉게 굴던 새엄마도, 어렵기만 하던 시댁 식구들도 애순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작가는 ‘착한 끝은 있다더라’,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다’, ‘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 리 길도 십 리 된다’는 대사를 빌려 권선징악은 물론 연대의 힘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모성애뿐만 아니라 부성애도 애틋하게 그려진다. 애순에게 ‘소죽은 귀신의 씌었냐’고 핀잔을 들을 정도로 말이 없는 관식은 묵묵하게 가장의 무게를 짊어진다. 대학생이 됐지만 영원히 크지 않는 딸 금명을 하루 종일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딸들의 코끝을 시큰하게 만든다. 순애보를 넘어선 아내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은 사랑도 눈길을 끈다. 주변머리 없던 관식이 애순이 도동리 최초의 여성 계장에 출마하자 바나나 우유를 돌리면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애순이가 가장 똑똑하다”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선거 운동(?)을 모습은 따뜻한 웃음을 자아낸다.

배우들의 호연은 작품에 대한 몰입감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다. 아이유는 젊은 애순과 금명의 1인 2역을 맡아 극을 영리하게 이끌어가고 박보검은 한결 성숙해진 연기력으로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성인이 된 애순과 관식은 배우 문소리와 박해준이 맡아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특히 광례 역의 염혜란은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온 이 시대 어머니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해낸다.
‘살다보면 더 독한 날도와, 살면 살아져’, ‘쫄아 붙지마 너는 푸지게 살아’라는 광례의 대사는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드라마 〈미생〉, 〈나의 아저씨〉 등을 통해 탁월한 연출력을 선보인 김원석 감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세월을 관통하는 메시지로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을 안긴다. 기존의 OTT 드라마들이 몰아보기식 시청 방식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3월 7일부터 매주 4회씩 공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1막은 봄처럼 지나간 애순과 관식의 청춘 이야기를, 14일 공개된 2막은 여름 같은 삶의 변덕을 이겨낸 이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시청자들은 한주씩 드라마를 천천히 곱씹으며 작품을 음미한다. 기존 레거시 미디어와 OTT의 장점을 적절하게 섞은 방식이다.

총 60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작품은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지만 넷플릭스 글로벌 톱 10 시리즈 비영어부문 2위에 등극했다. 한국을 비롯해 브라질, 칠레, 멕시코, 터키, 필리핀, 베트남 등 총 41개 국가에서 톱 10에 올랐다. 지난 14일 방송된 2막부터는 캐나다를 비롯한 영어권 국가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드라마를 공동 제작한 바람픽처스의 박호식 대표는 “기존에 OTT에서 선호하던 장르가 아니지만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품으로 승부수를 띄워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폭싹 속았수다〉는 기존에 OTT에서 선호하던 장르물은 아니지만 사회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시대를 보듬는 메시지가 세대와 국가를 넘어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오늘도 인생의 힘든 고비를 힘겹게 넘고 있는 당신에게 이 드라마는 이렇게 말한다. 살면 살아진다고. 그동안 애쓰고 사느라 정말 수고 많았다고.

이 은 주 서울신문 기자 겸 유튜브 크리에이터. 연세대학교 불문과·동대학원 영상학 석사. 한국 방송대상심사위원 역임. 유튜브 채널 〈은기자의 왜 떴을까TV〉진행. 저서 『왜 떴을까: ‘K-크리에이티브’ 끌리는 것들의 비밀』이 있음.
사진 제공 넷플릭스 (Netflix)
* 《쿨투라》 2025년 4월호(통권 13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