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연의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혈연으로 묶인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당연하지만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진실을 조금의 호들갑도 없이 덤덤하게 서술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주인공인 ‘안지’의 이혼 사실을 언급하며 시작된다. 어렸을 적 안지는 ‘전형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부단히 노력했다. 이 노력은 ‘좋아하는 마음’과 관계되는데, 남몰래 호감을 갖고 있었던 수학 선생을 다른 친구들이 싫어하자 따라서 싫어하는 식이다. 평균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며 살아온 안지는 대학 진학과 연애, 졸업, 취직, 결혼, 출산의 루트를 조바심 속에서 남들보다 조금 빠르게 살아내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이혼까지도 성공해 버렸다는 점이다.
안지와 남편은 4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꽤 긴 연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관계란 서로 죽도록 좋아해 본 적은 없는, 어딘지 뜨뜻미지근한 것이었다. 결혼 후 아이가 막 돌을 지났을 무렵 남편은 외도 사실을 고백하며 이혼을 요구한다. 남편에게도 아이에게도 애착이랄 것이 없었던 안지는 남편과 여자(상간녀)에게 아이를 넘겨주고 집을 나온다. 남편의 외도에 그다지 분노하지도 않고 심지어 아이의 사진도 한 장 챙기지 않고 이혼한 안지를 이성애적 사랑도 모성애도 없는 냉혈한쯤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소설은 바로 그런 오해 자체를 핵심 소재로 삼는다.
이혼 이후 혼자 떠난 여행. 식당의 옆 테이블에서 이런 말이 들려온다. “세상에 집 없는 사람도 있나.” 앞뒤 맥락 없이 덩그러니 듣게 된 말에 놀란 안지는 “그건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일까. 집 없는 사람도 있냐니. 60대쯤 되면 집 하나쯤은 갖게 된다는 걸까. 서울이 아닌 이런 소도시에 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까. 하지만 소도시에 살면서도 집이 없는 사람들은 무척 많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반박한다. 여기서 소설은 ‘집’을 건축물로서의 주택house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다루고 있지만 사실 ‘집’은 생활 공동체로서의 가정home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 집 없는 사람도 있나.”라는 말은 ‘세상에 가족 없는 사람도 있나’로 번역될 수 있으며, 가족에게 할당된 당위적 감정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건대 ‘세상에 화목하지 않은 가정도 있나’, 나아가 ‘세상에 자기 가족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나’로 변주될 수도 있다.
근대의 산물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엄마, 아빠, 자녀로 이루어진 형태만을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라고 간주해 무자녀 부부,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면 응당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한다는, 즉 ‘화목한 가정’의 불문율을 주입하는 것 또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임무다. 하지만 우리의 구체적 일상이 가르쳐 주는바 ‘화목한 가정’이란 사회적 환상에 불과하다. 조금의 균열도 없이 화목하기만 한 가정은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해서도 안 된다고 말해볼 수 있다. 많은 경우 무조건적으로 수호되기만 하는 평화 상태는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특정 구성원 내부로 옮긴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가족 내 가장 낮은 지위의 구성원이 암묵적으로 학습하는 규율 ‘나만 참으면 모두가 행복해’는 이렇게 답습되어 왔다.
그래서 소설은 ‘화목한 가정’이라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환상에 ‘세상에는 화목하지 않은 가정도 있답니다’라고 답하는 것을 넘어, 혈연 가족이란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라는 정의를 내리기에 이른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건 이미 주어진 일 같은 거였는데,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 계속해서 사랑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라는 전작 「사랑하는 일」의 토로가, 가족들을 사랑하는 일은 ‘외부에서’ 주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이어가는 일이란 ‘본래’ 쉽지 않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의 안지는 자신의 원가족에 대해 “이제는 거의 연락도 하지 않는, 아마 죽을 때에야 연락이 닿을 사람들”, “좋아하는 마음 없이 함께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데 이 대목에는 혈연 가족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함께 안지가 원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얼마간 담겨 있다. 이혼한 안지에게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리듯” 그럼 이제 어디서 살 거냐고 물었던 부모는 가끔 “생판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안지에게 냉담하게 굴었”던 것이다.
소설의 이런 설정은 아주 섬세한 독해를 요구한다. 안지가 부모와 형성한 관계를 그녀가 아이와 맺는 관계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만큼 「좋아하는 마음 없이」를 오독하는 해석은 없을 것이다. 안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못한, 즉 사랑을 받아 본 적 없기에 줄 줄도 모르는, 애정의 교환 행위 자체가 서툰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녀는 이혼 후 5년 뒤에 이번에는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을 골라 재혼을 했고 현재 그와 함께 고양이를 키우며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중이다. 안지는 부모와의 관계가 남긴 모종의 상처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관계, 자기다운 관계를 꾸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는 곧 스스로의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정직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혼한 지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여자의 연락을 받은 안지는 전남편이 사고로 죽었으며 남편의 사망보험금 수령인이 안지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의 거취 문제와 사망보험금의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만난 안지와 여자는 둘 다 뻔뻔하리만큼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다. 안지는 여자에게 “저는 그 애를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여자는 안지에게 보험금 전액에 육박하는 금액을 아이의 양육비로 달라고 요구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여자가 먼저 일어난 자리에는 지갑이 떨어져 있다. 안지는 여자의 지갑에서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발견하고 사진을 꺼내 자신의 지갑에 옮겨 넣는다. 상간녀와 죽은 전남편, 그리고 내가 낳은 아이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안지는 왜 지갑에 넣고 다닐까? 아마도 이 부분이 소설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그런데 안지가 “찬반 투표를 할 때면 눈치를 보다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슬그머니 손을 들”던 사람에서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모두가 싫어하는 가지라자냐를 “정말 맛있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녀가 “한 번도 좋아한 적 없는 세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을 자신의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도 너무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누군가는 지갑 속에 죽은 전남편의 가족사진을 넣고 다니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 소설에서 그 사람은 안지였지만 현실에서 그 사람은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있다. 그런 호오好惡는 해괴한 에피소드로 분류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갑의 사진을 꺼내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다. 요컨대 우리는 세상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것들을 싫어할 수도 있고, 반대로 해괴하다고 일컬어지는 것들을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소설의 주장이다.
한편 안지가 혈연 가족 안에서 겪었던 과거의 홀대에 대해서도,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람”과 살고 있는 현재의 충만함에 대해서도 소설이 줄곧 무미건조한 문체를 유지한다는 점도 짚어두고 싶다. 문장의 일관된 건조함이 인물의 건강함으로 성공적으로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우리’를 주장하기 위해 함부로 ‘너희’를 만들지 않는다. 안지가 현재 행복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과거를 단순히 불행한 것으로 축소하지 않고,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직접 겨냥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마음껏 공격하기 위해 샌드백으로 세워두지 않는다. 작품 안에 샌드백이나 쉐도우 복싱이 없는 이야기. 그리하여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야기는 언제든 값지다.
공격의 대상 없이 홀로 산뜻한 이 소설이 애쓰지 않는 방식으로 끝내 성취한 것은 ‘그럴 수도 있다’라는 낡은 진리다. 그럴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물론 부모-자식의 혈연관계에서 과잉된 감정을 떼어내는 이런 식의 가족 해방 서사가 누군가의 무책임을 변명하는 일에 가장 먼저 오용될 위험이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제안하는 가족-감정의 해방을 반기게 되는 것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인간의 본능이라는 통념이 아이의 양육에 무관심하기로 마음먹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상식’은 아이의 돌봄을 전적으로 가정 내부로 떠넘기는 데 복무한다.
결국 안지가 그랬듯이 ‘핏줄’에 대한 학습된 집착을 거두고 ‘좋아하는 마음’의 이동을 정직하게 살필 때 우리는 비로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망도 자기연민도 없이, ‘주지 못한 사랑’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내가 여전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하는 조금쯤은 냉담한 단단함이 청풍淸風처럼 시원한 까닭이다. 다소 서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바람에 실려, 지금 한국 문학의 가족 서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상쾌하게 넘어서는 중이다

박다솜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네가 틀리는 곳에서 나는 옳다」가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2023년 「연대가 분열할 때-이미상론」으로 제1회 고석규신인비평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양대·경희대에서 강의하며 글을 쓴다.
* 《쿨투라》 2025년 2월호(통권 12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