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매거진] 한국 주요 문학잡지의 역사와 미래
[K-매거진] 한국 주요 문학잡지의 역사와 미래
  • 김종회(문학평론가)
  • 승인 2025.03.27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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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적인 문화 제도의 형성과 잡지

‘잡지’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현재의 역할과 미래를 다룬다는 것은 그 검토 영역이 ‘문화 제도’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곧 문화 자체의 내용을 위주로 체계를 세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한, 그리고 그 내용을 형성하게 한 범주이자 형식으로서의 제도를 체계적으로 살펴본다는 뜻이 된다. 잡지의 출현은 기본적으로 서민의식·민중의식의 성장과 상관이 있으며, 그 이름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지리잡박’한 동시대의 온갖 문화적 정보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이는 한 시대의 잡지가 가진 사회사 반영의 소명이기도 하고 또 그 시대와 사회를 잡지를 통해 관찰하고 유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필칭 잡지가 가진 운명론적 의미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역사적 현실 가운데서 잡지의 발생과 성장 그리고 향후의 방향성 등을 살펴보는 일은, 근대 사회의 형성으로부터 현대로의 이행에 따르는 상황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시에 우리 문화의 근대 및 근대성의 전개와 경과 과정이 일제강점기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며 그와 밀접한 상관성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실체적 내용에 있어 우리의 근대는 개항 이후 서구 사조의 도입, 일제의 식민 수탈, 그리고 그 결과로 뒤이은 분단 시대의 전개라는 역사적 실상들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그러한 까닭으로 서구의 근대가 표방한 개인적 자각과 자의식보다는 국가적 위기의식과 공동체적 인식이 더 비중 있게 작용한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 이래 우리 잡지의 현실을 규정하고 그 편집 내용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조건이기도 하다.

근대 초창기에는 문학잡지가 작가의 사상을 피력하는 도구이기도 했으며 《창조》가 퇴폐주의를, 《백조》가 낭만주의를, 《개벽》이 계급주의를, 《조선문단》이 민족주의를 문학 사상으로 내건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근대 초기 집지들을 발표 지면으로 하여 활동한 이광수는, 문학으로서 소설에 주안을 두었으나 시·수필·평론등 여러 장르에 두루 걸쳐 자신의 사상을 담았다. 하지만 《창조》 이후에는 대략적인 장르의 구분이 이루어져서 박종화·박영희·김기진 등이 시와 소설, 혹은 평론과 소설을 동시에 쓰기도 했다. 주요한·김소월·이상화 등은 시를 썼고 김동인·염상섭·현진건·전영택·나도향 등은 소설을 썼으며, 이은상·이병기·조운 등은 시조를 썼다. 이러한 장르의 구분은 작가의 지위가 이들의 활동 시기 이전과 같은, 근대 사회 전체를 향한 ‘교사’ 노릇으로부터 분야별 ‘전문인’의 지위로 변모해가는 것을 말해 준다.

 

2. 문화 저널리즘으로서의 신문·잡지

‘문화 저널리즘’이라 할 때 ‘저널리즘’이란 용어는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넓게는 모든 대중 전달 활동을 의미하여 비정기적인 것, 출판물 이외의 비인쇄물에 의한 것, 내용적으로는 단순히 오락·지식 등을 제공 전달하는 경우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정기적인 출판물을 통하여 시사적인 정보와 의견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활동, 구체적으로는 신문과 잡지에 의한 활동’에 국한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개화기 문화의 중심이 된 문학은 그 이전의 문학 창작과는 달리, 구비전승이나 필사에 의한 소극적 양식을 탈피하여 활자화된 대중 매체에 의해 수용자에게 전달되었다. 즉 저널리즘에 의한 문학 창작이 활성화되면서 문학의 대중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처럼 문학과 저널리즘이 밀접한 상관성을 갖게 된 것은 문학으로서는 신문과 잡지 이외의 마땅한 발표 지면을 확보할 수 없었고, 신문·잡지 또한 문학을 통해 개화 세대를 향한 계몽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는 상호 보완적 성격에 의거해 있다. 이 시기의 신문과 잡지는 문예란에 일정한 분량의 지면을 배정하여 문학 저널리즘의 기능을 감당했던 것인데 신문의 〈사조詞操〉, 잡지의 〈문원〉, 〈문예〉 등의 난이 곧 문예란이었다. 당시의 잡지는 1918년의 《태서문예신보》 이전에 발간된 것이 구한말 38종, 1910년대 34종으로 70여 종에 이르고 있다. 《태극학보》·《대한유학생회학보》·《대한학회원보》·《대한흥학보》·《학지광》 등이 해외 학술지의 면모를, 그리고 《서우·서북학회월보》·《대한자강회원보》가 국내 학술지의 면모를, 그리고 《소년》·《청춘》이 종합 교양지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 가운데서도 《소년》은 월간 교양 잡지로, 1908년 11월 1일 창간되어 1911년 5월 1일 통권 23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잡지협회에서는 11월 1일을 ‘잡지의 날’로 정했다.

이 무렵의 여러 잡지를 통하여 대략 50여 편의 소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절반 이상은 작가의 실명이 밝혀져 있다. 그러나 무기명이거나 필명을 썼지만 본명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대체로 그 잡지의 편집자인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 이 시기 소설 가운데 작가 미상이 많은 것은 수준 낮은 소설로 대중적 판매를 겨냥했던 세태가 반영된 측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문화 제도들은 그것을 이루어간 개화·계몽 시대 이래의 선각적인 문인들의 의식을 담고 있으며, 시대사적 의의와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문화 제도들은 식민 시대의 암울하고 궁핍한 상황이 절대적인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의 긴 터널과도 같은 근대를 통과하여 현대의 문화 환경에 이르는 징검다리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할 것이다.

 

* 기사 전문은 추후 공개됩니다. *

 


김종회 문학평론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 중국 연변대학교 객좌교수, 경남정보대학교 특임교수, 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한국디지털문인협회 회장. 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회장, 국제한인문학회 회장, 박경리 토지학회 회장.

 

 

* 《쿨투라》 2025년 4월호(통권 13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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