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필립스Todd Phillips 감독의 〈조커Joker〉(2019)는 여러모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였다. 지난해 국내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5백 25만 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에도 성공하고 작품성도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실 이 영화는 액션 장면에 치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과는 격을 달리한다. 제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주인공 조커의 원맨쇼에 가까운 일종의 모놀로그monologue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커를 맡은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의 연기가 그만큼 탁월했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주연상 깜이다.
알다시피 조커는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인 배트맨과 적대관계에 있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의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리하여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캐릭터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단독 주연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희대의 악당이라 홀대를 받았었는데, 이번에 〈조커〉라는 ‘타이틀 롤’을 얻음으로써 새롭게 재평가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는 조커의 악행보다는 조커라는 희대의 괴물이 어떻게 해서 고담시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 것이다.
경제적으로 휘청거리고 범죄가 들끓는 회색 도시 고담시가 무대다.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일용직으로 광대 분장의 광고 맨 알바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한다. 병약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나름 꿈을 키워가고 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 소망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특이한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웃기는 상황도 아닌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한번 터진 웃음은 그칠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주변 사람들을 당혹케 하고 심지어 이를 비웃음으로 오해한 사람들의 구타를 유발하기도 한다. 게다가 약간 어리버리 한 그의 행실은 따돌림을 당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동네 불량배들은 그런 그를 괴롭히고, 현금을 갈취한다. 직장 동료들 중 하나가 그런 그를 딱하게 여겨 그에게 호신용 권총 한 자루를 건네주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사연으로 그가 악의 화신인 조커로 돌변하기에는 아직 동기가 약하다. 그런데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아서의 어머니의 동태가 어딘가 미심쩍다. 그녀는 가끔 고담시의 최고 부자인 토머스 웨인(브래트 칼렌)에게 편지를 써서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데, 매번 반송되어오는 편지를 눈여겨보던 아서는 어느 날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가 웨인의 집에서 한때 하녀로 일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웨인의 정부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는 아서 자신이 웨인의 친자임을 의미 했으니까 말이다. 고담시의 최고 권력자이자 부자인 웨인이 자신의 생부임을 확신한 아서는 그의 대저택을 찾아가는데, 마침 산책 중이던 어린 브루스 웨인과 조우한다. (이 아이가 커서 배트맨이 된다). 아서는 친동생을 대하는 그윽한 눈빛으로 웨인을 바라보는데, 마침 집사가 나와서 아서를 쫓아 보낸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싶은 아서의 궁금중은 급기야 웨인을 직접 찾아가 따져 묻게 만든다. 하지만 그가 얻은 것은 멸시와 경멸에 찬 웨인의 한마디였다. “미친놈!”
당사자로부터 부정적인 대답을 들었지만, 아서는 진실을 포기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등기소에 가서 어머니의 이력 및 병력이 담긴 일체의 기록을 강탈하다시피 빼앗아 살펴본 그는 또 다른 충격에 빠진다. 자신이 사생아였고, 어머니가 아동학대자였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울분을 참을 수 없던 그는 어머니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흙 수저에 불과했다는 뼈아픈 사실은 아서가 삐뚤어지는데 필요한 조건 중 하나가 된 셈이다. 필요조건必要條件의 충족이랄까.
아서는 앞서 지적했듯이, 코미디언이 되는 게 꿈이었다. 퇴근하고 귀가하면 TV 앞에 붙어 앉아 〈코미디 쇼〉을 보는 게 그의 낙이었다. 이 프로의 사회자는 머레이 프랭클린인데,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가 맡아 열연을 펼쳤다. 실제로 드니로는 1983년 〈코미디의 왕The King of Comedy〉이라는 영화에서 호연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아마 이에 대한 오마주라 여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서와 머레이의 유사-부자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서는 토머스 웨인을 친부로 생각했지만, 아니었음이 밝혀졌고, 이제 아서는 머레이에게 더욱 강박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사실 아서가 그에게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자신이 방청석에 있을 때 머레이가 자신을 호명呼名했을 때부터였다. 뿌리는 깊다고 하겠다. 물론 우리는 이 같은 설정이 모두 아서 자신의 망상이었음을 후에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런 관계설정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서가 일방적으로 머레이에게 집착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서는 머레이의 도움으로 마침내 무대에 서게 되지만, 머레이가 자신을 대중들 앞에서 조롱거리로 만들자 극도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아서는 고담시 시민들이 모두 보는 생방송 중에 머레이를 살해하고 만다. 상징적象徵的 아버지마저 살해를 한 셈이다. 그렇게 해서 아서는 희대의 악당이 되기 위한 충분조건充分條件까지 갖추게 된 것이었다. 영화 〈조커〉는 한마디로 조커 비긴즈Joker Begins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배들은 어떠했는가?
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히스 레저Heath Andrew Ledger는 조커라는 똑같은 캐릭터를 두고 저마다 자신만의 특색이 강하게 묻어나는 캐릭터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던 배우들이다. 먼저 잭 니콜슨의 경우를 살펴보자. 팀 버튼Tim Burton 감독이 1989년에 연출한 〈배트맨Batman〉 1편에서는 조커의 탄생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보스에게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화학공장의 기밀서류를 빼내기 위해 투입됐던 잭(사고 후 조커로 개명)은 잠복해있던 경찰과 배트맨의 공격을 받게 되고, 쫓기던 그는 펄펄 끓는 화공약품 용광로 속에 빠져 겨우 목숨만 건지게 된다. 살과 피부가 전부 타버리고 흉측한 몰골로 살아남게 된 잭(조커)에게 온전한 정신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에게는 미美에 대한 가치관마저 전도된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신의 추함을 보고 비웃는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과 불타는 복수심뿐이다.
잭 니콜슨은 정지된 만화 속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어 스크린 상에 살아있는 악당으로 재창조하는데 성공을 했던 것이다. 컬러로 인쇄된 만화 속 캐릭터가 잭 니콜슨의 연기력에 힘입어 스크린 상에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조커는 비록 천하의 악당이지만 행동거지만큼은 유쾌하고 발랄하기 그지없다. 만화적이라고 할까.
당대의 캐릭터 스타인 잭 니콜슨이 조커를 맡아서 악당 캐릭터의 극치를 보여줌으로써 더 이상의 배우는 없을 것이라는 통념은 히스 레저로 인해 무색해지고 말았다.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2008)에서 히스 레저가 맡은 조커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요점을 말하자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만화 속 캐릭터와는 판이하게 다른 조커가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마른 입술에 연신 혓바닥을 굴려 침을 묻혀가면서 어눌한 듯하면서도 성마른 태도로 그러나 단호하게 할 말을 해대는 조커의 모습은 기존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히스 레저는 2008년 정월 29세의 한창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히스 레저는 사후에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으로 2009년에 열린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그해 열린 제18회 MTV 영화상에서 ‘최고 악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미 그의 사망소식을 접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맡은 조커 캐릭터는 그 어느 등장인물보다도 어둡다는 느낌을 주었다. 심지어 잭 니콜슨이 맡은 조커에 비해볼 때도 그렇다. 히스 레저가 조커가 되어 내뱉는 섬뜩한 대사들, 그의 회칠한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퀭하게 번득이는 매서운 눈초리, 그리고 연신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는 혓바닥의 놀림은 마치 사악한 뱀의 그것처럼 관객들의 뇌리에 섬뜩한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편함마저 주기도 했다.
이처럼 만화 속 악惡의 화신인 조커는 잭 니콜슨으로 인하여 낙천주의적樂天主義的 미치광이로, 히스 레저로 인하여 염세적厭世的 파괴주의자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본 것처럼 호아킨 피닉스가 맡은 조커는 보다 인간적인 얼굴을 한 광대였음이 밝혀졌다.
김시무 _ kimseemoo@hanmail.net
영화평론가. 평론집 『영화예술의 옹호』, 감독론 『Korean Film Directors : Lee Jang-ho』가 있음. 부산국제영화제연구소 소장과 책임연구원, 한국영화학회 회장 등 역임. 이장호영화연구회 회장.
* 『202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