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전성시대를 보내고 있는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장기하의 랩은 대다수 힙합 뮤지션들의 랩보다 그 가사 내용이 한 귀에 더 잘 들린다. 장기하가 랩퍼냐 아니냐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튼 그는 자신의 음악에서 종종 랩을 하고 있고, 그의 랩이 더 잘 들리는 이유는 가사인 한국어 본연의 발음이나 억양, 호흡에 더 충실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벌써 추억 속 단어가 되어버린 ‘지구촌’ 시대에 한국의 힙합은, 혹은 한국어 랩은 보다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더 쉽게 잘 들리는 랩이 더 좋은 랩이라는 얘기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현재 아주 많은 뮤지션들이 한국어로 된 랩을 최대한 영어처럼 들리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혹은 최소한 그렇게 보이고), 또 그것이 실력 있는 랩퍼로서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쉽게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굳이 ‘랩의 한국화’ 같은 것에 매달릴 필요는 없으나 한국어 가사를 최대한 흑인들의 영어 구사처럼 들리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만이 과연 최고의 선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냐는 것이다.
영어와 유사하게 발음될만한 한국어 단어를 찾는데 공을 들이고 소위 ‘본토적 감성’이 약해질 때 즈음 떨어진 약발을 끌어올리듯 ‘필’ 살리기를 위해 딱히 필연적이라 보이지 않는 영어를 애써 찾아 끼워넣는 행태에 대해 관대함을 보여온 우리를 되돌아볼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어 랩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놓으라면 그것은 매우 쉽지 않은 문제이다. 다만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랩 이외의 장르들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에서 생각을 출발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방과 독창성의 문제는 서구의 대중음악이 들어와 수용과 토착화의 과정을 거처 지금의 한국 대중가요로 녹아들기까지 다른 장르에서 이미 수없이 많이 고민되고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번안이나 모방에서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은 정체성과 창조성에 대한 의식적인 회의와 시도를 거치거나 혹은 자연스레 우리의 어떤 것이 반영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록이 그렇고 우리의 포크가 그렇고 이제는 K-발라드라고도 불리는 우리의 발라드가 그렇다.
여기서 ‘우리의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한국의 전통문화 같은 것에 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20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은 거쳐 만들어진 어떤 것이다. 거기에 전통적으로 말하는 한국적인 것이 꼭 동반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점은 지금껏 어떤 문화나 예술도 수용과 모방에서 그친 것은 별로 멋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카피품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따라쟁이이기 때문이다. 닮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욕망의 현현 이상으로 취급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오히려 남의 것을 받아들여 행하는 주체가 달라질 때 결과물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나윤선의 재즈 보컬이나 아이돌 중심의 K-pop이 그것이 기본적인 음악적 토대를 빌어왔던 본토에서 매력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거꾸로, 푸른 눈의 백인이 최대한 한국인과 유사하게 국악의 창을 흉내 내보려고 노력한 결과물과 자신들만의 무언가를 가미해서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놓았을 때 우리가 어느 쪽에 더 문화적 가치를 느끼게 될지 생각해보면 어떨까. 한국인은 흑인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인이 한국어로 랩을 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밖에 없고 되어야만 한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랩에 관해서 이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인 이유는 랩이라는 장르에서는 분노와 토로를 실어 보내기 위해 비트에 얹힌 흑인들의 어투 자체도 랩의 음악적 특색을 규정짓는 중요한 질료이기 때문이다. 다른 장르에서 그것이 특정한 악기의 구성이나 사운드 혹은 곡을 끌어가는 리듬의 종류 등 이었던 것과는 상이하다. 창작자들의 치열한 탐구정신이 필요한 지점이다.
한국어로 구사하는 랩이 모두 장기하의 랩처럼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한국 대중가요계가 랩을 구사한 지도 30여 년이 되어가고 랩이라는 음악적 어법이 이미 글로벌한 보편적 음악기법이 된 오늘에 이제는 우리의 랩도 ‘못내 영어처럼 들리고 싶었던 한국말 가사’의 처지는 벗어나게 해주어야 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장기하의 한국어 랩은 그것이 시장에서의 포지셔닝을 위한 선택이건 한국어 랩에 대한 고민의 발로이건 어쨌든 최소한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의 측면에서 생각의 폭을 넓혀줄 작은 계기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미 일찍이 모방과 창조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한국 힙합계의 일부 뮤지션들에 의해 이러한 고민의 명맥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보다 주류의 영역에서도 다양하고 많은 시도가 표면으로 올라올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은 차별화된 또 다른 재미를 주어왔고 이러한 매력은 이번 앨범 <모노>에도 담겨있다.
* 《쿨투라》 2019년 3월호(통권 5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