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가사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면서 과거의 음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특히,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 때의 내가 어떤 음악과 가사들을 사랑했었는가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2000년대 중반으로 발라드 음악이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바이브레이션을 위시한 보컬 기술을 중시하는 R&B 음악, 그리고 웅장한 오케스트라 스트링이 사용되는 팝 음악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 2000년대 한국형 발라드는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여러 발라드 팀들이 인기를 끌고 있었으나, 나의 가장 귀에 들어왔던 것은 가수 테이의 곡들이었다. 어린 시선으로 보아도 테이의 곡에는 뭔가 다른 요소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만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대중들이 그의 곡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데뷔곡을 비롯하여 2005년에 이어지는 앨범까지 차트에서 1위를 여러 번 차지했던 것이 그 사실을 반증한다.
시간이 지나 테이의 곡들이 다른 발라드 곡들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한 연원을 생각해본 결과, 하나의 명확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물론 뛰어난 가창력과 좋은 멜로디들이 이유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하는 시적인 가사에 있다. 따라서 테이의 성공에는 작사가 조은희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구체적인 상황을 최대한 구체적인 방식으로 묘사하는 주류 발라드의 작사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추상적 관념들을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작사 철학을 드러낸다.
2004년 발매된 테이의 데뷔곡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의 가사를 살펴보자.
가슴 아파서 목이 메어서 안간힘을 써 봐도
피해 갈 수도, 물러지지도 않는 이별인가 봐
너무 놀라서 자꾸 겁나서 웃음으로 이기려 해도
눈치 빠른 눈물이 더 먼저 알고 날 흘러
난 소란스레 사랑했나봐 널 줬다 이내 뺏는 걸 보니
분 넘친 행복을 또 시기했나봐, 널 보내야만 하나 봐
화자는 슬픔의 감정을 동반한 채 이별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슬픔은 이별 상황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동반되는 감정이기에, 일반적인 발라드 가사에서는 이 당연한 상황을 당연하게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눈치 빠른 눈물이 더 먼저 알고 날 흘러’라는 가사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눈물은 화자로부터 ‘눈치’를 부여받으면서 의인화된다. 화자와 다른 존재로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다. 이 눈물은 더 이상 화자로부터 흘러나오는 화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또 하나의 다른 존재로서 슬픔을 먼저 알고 느끼며 흘러내린다. 여기서 화자의 슬픔과 ‘눈물’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며 간극을 형성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는 ‘분 넘친 행복을 또 시기했나봐, 널 보내야만 하나봐’에서 등장하는 중의성이다. 화자는 자기가 사랑했던 대상을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시기한다. 행복을 시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미 간극이 벌어져버린 시간, 혹여나 연인과 계속 만나고 있었다면 느낄 수 있었던 현재 혹은 미래의 그 시간을 시기한다는 것이다. ‘널 보내야만 하나봐’에서 ‘널’은 연인을 지칭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앞서 언급한 ‘행복’을 지칭할 수도 있다. 따라서 또 다시 추상적 관념의 구체화된 형태, 의인화된 형태가 등장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화자가 지니고 있었던 슬픔과 행복은 또 다른 시공간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서 각각 분리된다. 감정을 하나의 살아 있는 존재로서 분리시키면서 화자는 영리하게 슬픔의 감정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킨다고 볼 수도 있다.
I miss the love that I shared with you
온 세상이 취한 것 같아
눈부셨던 우리 추억이 열 오르듯 비틀대잖아
네 품에 살았던 날들과 꿈꾸었던 사랑이
다 부서져 또 흩어져 향기로
I can’t live without your love
후렴구에서도 존재들을 분리하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화자는 자기 자신이 취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온 세상이 취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이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영향 없이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취한 존재로 만든다. 취해버린 자기 자신을 ‘세상’이라는 존재로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세상을 ‘눈부셨던 우리 추억’이 이어받는다. 추억이라는 추상성이 ‘열 오르듯 비틀대는’ 취한 존재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화자와 분리된 존재로서의 세상과 추억은 이제 화자의 것이 아니다. 분리된 하나의 존재로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부서져서 향기로 돌아온다. 이 향기는 단순히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체취의 기억, 물리적 기억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모든 분리된 존재들이 부서지며 작디작은 입자가 되어 화자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루 이틀이 가고 눈에 멀어져 살다가 보면
언젠간 또 가슴에서도 무뎌지는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하기 까지 얼마나 싸워야만 할지
보이지 않는 나와 또 볼 수 없는 널 앞에 두고
브릿지의 3행 ‘그렇게 말을 하기 까지 얼마나 싸워야만 할지’에서 화자의 싸움의 대상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대체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던 관념들을 각각의 존재로 분리해 냈기 때문에 화자는 ‘보이지 않는 나’가 된다. 눈물, 행복, 세상, 추억 등으로 나누어진 존재들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여기서 ‘볼 수 없는 너’는 사랑했던 대상인 연인을 지칭하는 동시에, 자신이 분리해 낸 존재로서의 감정들을 지칭한다. 결국 이 싸움은 사라진 ‘너’와의 싸움뿐만 아니라 분리된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되는 것이다.
테이의 곡들은 다른 발라드들보다 한 차원 높은 층위에 있다. 테이의 노래가 우리에게 지속적인 향기로서 남아 있는 이유는 시적인 가사의 요건이 곡 안에 풍성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하는 작사가 조은희의 작사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녀는 사랑과 이별을 단순한 스토리 서사에 기대어 표현하지 않고, 추상적 관념을 의인화의 방식으로 화자로부터 분리하여 각각의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표현들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경험을 곡 위에 살포시 올려놓을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며, 사유할 수 있는 틈을 내어준다.
이준행 음악가. 락 밴드 벤치위레오 보컬, 기타로 활동 중.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박사과정 수료. 시와 음악의 연관성, 그리고 시와 음악이 주는 즐거움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 《쿨투라》 2022년 10월호(통권 100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