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밥 한번 먹자"
우주를 지상에 불러오는 대화의 시
- 이기영 디카시집, 『전화 해, 기다릴게』
디카시 창작과 문예운동의 산증인, 이기영 시인의 두 번째 디카시집
등단 10년을 맞는 이기영 시인의 두 번째 디카시집 『전화 해, 기다릴게』가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10번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디카시집 『인생』이 있다. 시인이 2016년에 낸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은 경남문화예술진흥기금 수혜, 2017년 세종우수도서 선정, 2018년 제14회 김달진창원문학상 수상 등의 영예를 안았다. 그런가 하면 2020년에 낸 시집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는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 2022년 제3회 이병주국제문학상 경남문인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생애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모두 전통 있고 명망 있는 문학상을 받았으니, 그의 문학성은 객관적으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기영 시인이 이번에는 두 번째 디카시집 『전화 해, 기다릴게』를 상재했다. 디카시인으로서의 출간 경력은 간략하지만 그 배면에 숨어 있는 그의 노력과 수고, 디카시를 향한 충일한 열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는 현재 한국디카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디카시연구소 사무국장, 경남정보대 평생교육원 디카시 강의 등의 활동을 하며, 《백세시대신문》, 《미디어시인신문》, 《경남신문》 등의 언론에 필진으로서 글을 쓰고 있다. 디카시 문예운동을 확산하는 길 어디에나 이기영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디카시 창작과 문예운동의 산증인이다. 그의 디카시를 향한 이러한 공로를 익히 알고 있기에, 이번 시집은 더욱 빛나 보인다.
이번에 펴내는 이기영 시인의 디카시집 『전화 해, 기다릴게』는 4부로 구성되어 총 65편의 디카시를 수록했다. 시인은 이번 디카시집에 대해 “순간의 감성이 눈 뜨는 자리에 디카시는 탄생”하여, “순간과 순간, 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라고 일축한다. 우주만물과 교감하며, 우주를 지상에 불러오는 이기영 디카시의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우주와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디카시의 힘
이 디카시집의 제1부에 수록된 시들은, 시인이 모든 사물 또는 풍경과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는 측면을 보여준다. 그는 삼라만상의 존재와 운행에서, 언제 어디서나 시를 찾아낼 수 있는 밝은 눈의 소유자다. 온 우주를 자신의 시세계로 불러올 수 있는 대화체의 기법을 부드럽고 능란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그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지점은, 가장 그 내면을 알기 어려운 사람-독자와의 소통일 시가 분명하다. 그러기에 「픽션」에서는 전봇대·전깃줄과 낙엽들의 조합에 ‘소란스런 짝사랑’을 매설하고, 「봄날 2」에서는 화려한 벚꽃의 만개에 결부하여 ‘하염없는 한량들’을 유추한다. 「너, 다 들켰어」, 「옥구슬이 서 말이라도」 같은 시들도 그렇다. 이 탐색과 교감과 소통의 방정식은 매우 편안한 대화체의 어법을 통해 자연스럽게 구사된다.
아직은 땅이에요 기어다니죠
발톱이 생길 때까지
날개가 달릴 때까지
폭풍우 치는 밤이 올 때까지는
- 「용두사미(龍頭蛇尾)」 전문
바닷가 모래사장이거나 아니면 강가 퇴적지로 보이는 이 물가에, 물의 흔적이 길게 꼬리를 남겼다. 어느 모로 보나 용이나 뱀의 꼬리 형상이다. ‘용두사미’란 제목이 붙은 이유다. 우리 삶의 실상을 돌아보면, 얼마나 용두사미 격의 일이 많은가. 그러한 보편적 공감대 위에서 이 순간 포착의 사진 한 장은, 그 풍경에서부터 뭔가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시인은 아직 땅이라고, 기어 다닌다고 썼다. 그리고 발톱이 생기고 날개가 달리고 폭풍우 치는 밤이 오면,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새로운 세상의 전개가 예비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러할 때 범상한 물길의 형용은, 문득 신화나 전설 속의 개천을 소환하고 일상적인 시각을 우주론적 공간으로 개방한다.
19세기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시인이란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곧 ‘견자(見者, Voyant)’가 되어야 한다.” 는 ‘견자의 시학’을 내세웠다. 우리가 랭보처럼 기발한 상상력의 운용이나 일상에 대한 혁파를 수행하기는 힘들지만,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시적 개념을 찾아내는 견자일 수 있다.
이 시집의 제2부에서 이기영은, 그렇게 순정한 시의 눈으로 디카시의 여러 모형을 탐색한다. 「주문」, 「끝이라는 시작점」, 「소금꽃」, 「이만하면」 등 매우 ‘신박’한 사진을 앞세운 디카시들이 바로 그와 같은 시의 행렬에 해당한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인사치레로 건넨 말인 것쯤 아는데
아는데, 밥이라는 말이 너무 따스해서
함께 먹고 싶은 밥 고르고 골라
주머니에 꼬옥 넣고 다녀
- 「전화 해, 기다릴게」 전문
이 시집의 표제작인 「전화 해, 기다릴게」는 봄날의 꽃밭처럼 백화난만한 식당의 메뉴판을 눈앞에 두었다. 몇 사람의 손님이 그 메뉴를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복잡다단하고 다양다기한 삶의 현장을 반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매일같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진다. 시인은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대화의 레토릭을 서두에 가져다 두었다. ‘인사치레’인 줄 알지만 ‘밥’이라는 말이 너무 따스하다. 그래서 함께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주머니에 ‘꼬옥’ 넣고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크고 화려한 자리를 욕심내지 않고, 작고 소박한 만남에 방점을 둔 마음 약한 소시민!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공이 물었다. “평생토록 실천할 만한 한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의 대답이다. “그것은 용서다!(其庶乎.)”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자.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이 누구일까. 여기에 정답이 있을 수 없겠지만, 어쩌면 그 대답은 ‘나 자신’이기 쉽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자책과 아쉬움의 감정을 안고 산다. 그런데 시에, 문학에 이 모난 정신을 추스르는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아는가.
이기영의 시집 제3부 ‘JAZZ’에는 「JAZZ」, 「장주지몽(莊周之夢)」, 「구룡포」, 「맨발의 탁본」 등 따뜻한 이해 또는 용서의 형이상학 같은 힘이 숨어 있다. 이 시들은 먼저 현실의 상황과 그것을 반영한 사진을 적시(摘示)하고, 그 내면에 숨은 의미망을 발굴함으로써 사태의 진면목을 드러내 보인다. 안과 밖을 모두 알고 나면 우리의 심사가 더 이상 각박해질 수가 없다.
폭염 속을 걸어온 여름이
더운 몸을 담그고
몸을 식히는 한낮
적막과 고요가 서로의 몸을 부비며
찬란한 눈빛을 빛내고 있다
- 「물의 정원」 전문
‘물의 정원’이란 명호가 달린 이 시에 연초록 입김이 배어 있는 것을 보면 봄날의 한때인 것 같은데, 시인은 ‘폭염 속을 걸어온 여름이 더운 몸을 담그고 몸을 식히는 한낮’이라 한다. 적막과 고요, 찬란한 눈빛 등의 어휘들이 제 몫을 다하는 것은 나무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연못이 함께 펼쳐져 있는 까닭에서다. 이 데칼코마니를 이룬 대칭과 반사의 구도가 작동하고 있기에, 사진과 시는 입체적이 되고 깊이를 자랑하며 종내 형이상학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호심(湖心)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우리도 거기에서 숨은 우리의 모습을 찾고, 이해하고 또 용서한다.
인간의 생애가 유한한 것이 아니었다면, 인류사에 명멸한 그 많은 예술 작품이 존재했을까.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있는 그 무엇도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에 따라 속절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은 한시적 순간을 오래 또는 영원히 붙들어두는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기영의 이 시집 제4부에서 「세월 앞에 장사 없다」를 보면, 물살에 침식하는 큰 나무의 밑동을 볼 수 있다. 비단이 나무뿐이겠는가. 「하루 또 하루」, 「바람의 공수표」, 「폼페이 최후의 날」 같은 시들이 아프고 슬프고 마침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를 표상한다. 참 좋은 시들이다.
비가 와서 기다리는 일도 따분하고
비새는 지붕이나 고쳐야겠는데
이곳을 고치면 저곳이 샌다
서러운 건 나인데 왜,
글썽이는 건 너일까
- 「공치는 날」 전문
넓게 펼쳐진 거미줄, 거미의 집이다. 천망(天網)은 아니더라도 소이불루(疎而不漏)할 것 같은데, ‘공치는 날’이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에 그렇게 공치는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인은 ‘서러운 건 나인데 왜, 글썽이는 건 너일까’라고 반문한다. 당연하다. 이 곡진한 정황의 감정이입에 의하면 ‘나’와 ‘너’가 각각이 아닌 연유에서다.
김종회(문학평론가, 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교수는 해설에서 “이기영의 시들은 이렇게 여러 유형의 감정, 여러 절목의 각성, 여러 방식의 대화 기법을 활용하면서 시야의 넓이와 생각의 깊이를 가진 디카시가 어떤 것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앞으로도 그의 디카시에 대한 변함없는 열의와 빼어난 창작으로 인하여, 우리의 디카시가 여러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고 밝혔다.
“파르르 파르르 눈꽃이 피”(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고, “4억 2천 년 전부터 돌이 된 기분”(궁금해!) 궁금해진다면 “우주를 불러오는” 이기영 시인의 디카시와 대화해 보자.
저자 이기영 시인
2013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나는 어제처럼 말하고 너는 내일처럼 묻지』, 디카시집 『인생』이 있다. 경남문화예술진흥기금을 수혜하였으며, 세종우수도서와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에 선정되었다. 김달진창원문학상, 이병주문학상 경남문인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한국디카시인협회, 한국디카시연구소 공동 사무국장, 백세시대 신문, 미디어시인신문, 경남신문 필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의 말
‘순간의 감성이 눈 뜨는 자리에 디카시는 탄생한다’
순간과 순간, 그 사이에 존재하는 나!
2023년 11월, 이기영
- 「시인의 말」, 본문 5쪽
본문 속으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달랑게
집 앞마당에 흔적이 한 가득이다
내리쬐는 한여름 땡볕에
놀라 흘린 커피맛 구슬아이스크림
- 「너, 다 들켰어」, 본문 12-13쪽
모든 날들이 매 순간
저토록 눈부시게 빛났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 「청춘」, 본문 28-29쪽
4억 2천 년 전부터 돌이 된 기분과
2억 5천 년 동안 돌 속에 갇힌 세월 중에서
어느 게 더 황당할까?
- 「궁금해!」, 본문 30-31쪽
그렇고 그런 수많은 날들 중에
한순간 이렇게 반짝 불 들어오면
그 온기로 평생을 살아
내내 환하고 따뜻하고 찌릿찌릿해서
나는 그걸 추억이라고 불러
- 「태양의 나라」, 본문 58-59쪽
꽃눈이 막 눈 뜨려는 나뭇가지에
밤새 눈이 내려
파르르 파르르 눈꽃이 피었다
-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본문 76-77쪽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에서 차용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어느 날, 섬이 나타났다
너, 다 들켰어 ● 12
월식 ● 14
픽션 ● 16
용두사미龍頭蛇尾 ● 18
옥구슬이 서 말이라도 ● 20
황금 동산 ● 22
휴식 ● 24
눈싸움 ● 26
청춘 ● 28
궁금해! ● 30
어느 날, 섬이 나타났다 ● 32
일시정지 ● 34
필법 ● 36
미친 짓 ● 38
봄날 2 ● 40
적막 ● 42
제2부 전화 해, 기다릴게
주문 ● 46
전화 해, 기다릴게 ● 48
끝이라는 시작점 ● 50
등대 ● 52
소금꽃 ● 54
보이지 않는 손 ● 56
태양의 나라 ● 58
완벽한 밤 ● 60
터널 ● 62
이만하면 ● 64
풍등 ● 66
보금자리 ● 68
어머니 ● 70
우화 ● 72
측은지심 ● 74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76
제3부 JAZZ
JAZZ ● 80
음서 ● 82
알비노 ● 84
물의 정원 ● 86
편견 ● 88
연목구어 ● 90
장주지몽 ● 92
구룡포 ● 94
시간의 낙하법 ● 96
맨발의 탁본 ● 98
눈 먼 길 ● 100
크레인 생각 ● 102
무이네 사막 ● 104
빅뱅 ● 106
웜홀 ● 108
완전범죄 ● 110
제4부 ING
세월 앞에 장사 없다 ● 114
느닷없이 ● 116
난생 ● 118
공작쇼 ● 120
하루, 또 하루 ● 122
공범 ● 124
비애의 문양 ● 126
불평등 시대 ● 128
공치는 날 ● 130
묘지 ● 132
바람의 공수표 ● 134
안나 카레니나 ● 136
서리꽃 ● 138
지구온난화 ● 140
일본인 가옥 거리 ● 142
폼페이 최후의 날 ● 144
ING ● 146
해설 / 우주를 불러오는 대화의 시_김종회 ●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