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인 것’의 존재론과 동시대 한국시의 미학을 제시!
시에 대한 믿음으로 2023년 이후의 풍경을 꿈꾸게 될 것이다.
시인, 동료문화예술인 100명이 선정한 시 44편 수록
‘2023 오늘의 시’ 수상자는 「숨」의 박소란 시인!
작년 한 해 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기억에 남았던 좋은 시를 모아 『202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이하 『2023 오늘의 시』)를 내놓는다. 『2023 오늘의 시』 기획위원으로는 유성호(한양대 교수), 홍용희(경희사이버대 교수), 허희(문화평론가) 문학평론가가 참여했다.
우리는 매체 환경 측면에서 보면 가장 급진적인 과도기를 살아가고 있다. 활자 중심 시대를 영상 주도 시대가 탈환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창작 주체의 실존적 문제가 긴급한 화두가 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만큼 종이와 활자 중심의 시 쓰기는 어느덧 인류의 오랜 역사로 기록되어가는 듯이 보이기까지 한다. 그만큼 시의 유통성과 위상도 많이 좁아지고 낮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시인들은 이러한 시의 주변화 담론을 돌파하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버린 현상을 인정하지 않고 기억과 소비라는 역동적 유통 회로를 펼쳐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발의를 하나 할 수 있겠는데, 우리 시대의 시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폐허 위에서 가장 오롯한 존재 근거를 마련해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2023 오늘의 시』를 통해 우리 시단에서 최근 거두어낸 그러한 성취들을 일별함으로써 여전히 심미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우리 시대의 균질적이고 지속적인 서정적 흐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 책에서 우리가 강렬하게 경험한 서정의 실례들은, 시를 왜 쓰는가, 이 폐허의 땅에 언어는 무엇인가, ‘시적인 것’의 전위성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하는 등의 연쇄적 질문을 지속적으로 수행해가고 있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편 언어에 대한 복고적 향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독자적인 언어가 철저하게 주변화된 방식으로 발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분들의 고민이자 실천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바로 시의 존재 조건과 발화 방식을 사유하는 것이 ‘시적인 것’의 존재론을 제고하는 태도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시인들은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 회복을 통해 이러한 태도를 한껏 제고해가고 있다. 이행기적 속성을 현저하게 지닌 시대일수록 시를 쓰는 작업에 대해 밀도 있는 자의식이 있어야 하고, 또한 시인의 존재 방식에 대한 모색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흐름은 매우 중요한 시정신의 바탕 자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러한 ‘시적인 것’의 주변성과 주체들의 다양한 욕망 사이에 개재하는 자의식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는 요청에 대한 응답의 결실들이 책에 많이 실렸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좋은 시를 선정하기 위해 『2023 오늘의 시』는 100명의 시인, 문화예술인을 추천위원으로 추대, 좋은 시 44편(시조 15편 포함)을 선정하였다, 설문 조사 결과, 지난 한 해 동안 발표된 근작 가운데 박소란의 「숨」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이 작품은 삶의 층위와 윤리의 층위를 밀착시키면서 역설적 희망에 대한 믿음을 놓치지 않은 가편으로 많은 동료들의 평가를 받았다.
기획위원 유성호 평론가는 박소란의 시는 “공동체의 기억과 그 안에 잔잔하게 침전된 사랑과 슬픔의 노래”이며, “「숨」은 특별히 “겨울의 한 모퉁이”에 서서 무언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마음의 은유”라고 말한다. “‘숨’을 택해, 일상의 한복판을 관통해가는, 버릴 수 없는 것들, 가만히 바라보아야 하는 것들”, “어째서 이런 게 생겨났을까 알 수 없는/하나의 이야기”를 침묵음으로 들려주고, “모든 슬픔 있는 것들을 내면화하는 조용한 숨결이 그 안에서 우리 시대를 따뜻하게 위안하고” 있다고 평한다. 그리고 박소란 시인은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김명순의 소설 「나는 사랑한다」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외롭고 갈데 없는 사람일수록 자유를 구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자꾸 김명순 이야기를 해서 그렇습니다만(웃음), 되짚어 보면 이와 비슷한 마음으로 쓴 시가 아닌가 싶어요. 결국은 자기 자신, 그 오롯한 혼자에 대해…….아무리 삶이 척박해도 결국은 나라는 혼자가 있으니까 그로써 견딜 수 있다 하는 마음이랄까요. 세상에는 대단한 것이 수두룩하지만, 그럼에도 가장 귀하고 신비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나’ 자신일테지요. 이토록 당연한 사실이 불현듯 또렷이 확인되는 때가 있고, 그때를 기적처럼 간직하는 것으로 우리는 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창하다면 거창한 이런 마음을 되도록 작게, 소박하게, 가장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 「「숨」의 박소란 시인 인터뷰」(최지은 시인) 중에서, 본문 122-123쪽
이 책의 말미에 붙인 박소란 시인 시평과 인터뷰는 ‘2023 오늘의 시’ 수상작 박소란 시인의 시 「숨」에 대한 매혹적인 해석을 선사한다.
허희 평론가는 “그녀는(박소란 시인은) ”섬세하게 생각하되 차갑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되 비굴하지 않다”며 “이는 정확하게 박소란 시와 조응한다”고 말한다. 이 시의 제목인 ‘숨’은 살아 있음의 증표로, “추천위원들이 이 작품을 올해 쿨투라 어워즈 시 부문 수상작 ‘오늘의 시’로 뽑은 공통점”은 “이 작품이 고단한 생활의 층위와 윤리적 서정의 거리를 밀착시켰다는 사실과 결부된다”고 평한다.
최지은 시인은 박소란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수상작 「숨」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겨울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시는 “시린 발을 구르며,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도 기다리며 서 있는 화자를 떠올리다가 이내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허공에 피어나듯 하얀 숨이 터지고, 박동하듯 숨이 부풀고, 그길로 아주 멀리 번져가는 숨을 그리게” 되며, “한낱 한 호흡의 숨이라는 의미의 차원에서 벗어나 존재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앞으로 우리 시단은 시에 대한 믿음으로 2023년 이후의 풍경을 꿈꾸게 될 것이다. 근자의 성과들은 이러한 과제에 확연하고도 분명한 미학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탄탄한 미적 완결성을 두루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쪼록 이 책이 우리 시대의 이러한 과제들에 대해 유추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박소란 시인
2009년 《문학수첩》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가 있음. 신동엽문학상, 내일의한국작가상, 노작문학상, 딩아돌하작품상 등 수상.
2023 오늘의 시 수상작
겨울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것이다
시린 발을 구르며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버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 해도
기다리는 것이다
이따금 위험한 장면을 상상합니까 위험한 물건을 검색합니까
이를테면,
재빨리 고개를 젓는 것이다
남몰래 주먹을 쥐고 가슴을 땅땅 때리며
어쨌든 기다리는 것이다 시도 쓰고 일도 하며
어쨌든
주기적으로 병원도 다니고 말이죠
과장된 웃음을 짓기도 하는 것이다
오지 않는 것들에 목이 멜 때마다
신년운세와 卍 같은 글자가 비스듬한 간판을 흘끔거리는 것이다
알바가 주춤거리며 건넨 헬스 요가 전단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버릴 수 없다는 것,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디라 해도
한숨을 쉬면 마스크 위로 터지듯 새어 나오는 입김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지나치게 희고 따뜻한 것 어느 고요한 밤 찾아든 귓속말처럼
몹시 부풀었다 이내 수그러지는 것
텅 빈,
다시 부푸는 것
다시 속살거리는 것
어째서 이런 게 생겨났을까 알 수 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곁을 맴도는 것이다
말갛게 붙들린 채로 다만 서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길
무슨 중요한 볼일이 남아 있기라도 한 듯
기다리는 것이다
아 신기해라, 조용히 발음해보는 것이다
- 박소란 「숨」 전문, 본문 40-43쪽
본문 속으로
박소란 시는 개별적인 숨에서 공동의 삶을, 공동의 삶에서 고유한 서사를 발견한다. 세상살이를 쉽게 하려면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면 된다고 설파하는 자들에게 이 시가 주목하는 광경은 부차적이고 쓸데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윤리적 서정을 견지하는 이는 다르다. 내면과 연동하는 풍경이 일깨우는 감각을 그는 다음과 같이 발화한다. “아 신기해라, 조용히 발음해보는 것이다”. 고단한 생활의 층위만 그려내거나 윤리적 서정만 강조하는 시들 속에서, 박소란은 양자를 횡단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시가 있음을 「숨」으로 증명해낸다
- 허희, 「고단한 생활과 윤리적 서정-박소란, 「숨」에 대하여」, 본문 116-116쪽
시는 누가 뭐래도 소중한 존재이니까. 그러니까 가급적 오래 시 곁에 머물고 싶죠. 오래 시인으로 살고 싶어요. 그렇지만 이런 일이 제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일까. 이런 모진 기대와 욕망이 도리어 시 쓰는 저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생각을 바꿨어요. 절대 그만둘 수 없다가 아니라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시를 떠날 수 있다, 시인을 버릴 수 있다고……. 하다 하다 안 되면 그렇게 해야죠.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으니까. 시가 저를 원하지 않을 때, 시가저를 견딜 수 없이 상처 입힐 때는 억지 부리지 않고 돌아서겠어요. 그렇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볼 거예요. 최선을 다해볼 거예요.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돌아설 수 있도록. 하지만 부디 이런 상상은 먼 훗날의 일이기를. 지금은 시 아닌 다른 존재를 도무지 생각할 수 없고, 그만큼 시를 좋아하고 있어요.
- 최지은, 「숨」의 박소란 시인 인터뷰」 중에서, 본문 122-123쪽
차례
펴내면서
2023 오늘의 시
곽효환 「나의 유년, 노을 지는 집」 _11
김명인 「죽변도서관」 _14
김선태 「빈 의자」 _16
김숙희 「둥근 것의 힘」 _17
김양희 「이상의 집」 _18
김완하 「마정리 집」 _20
김용락 「나무」 _22
나태주 「시루봉 아래」 _24
나희덕 「세포들」 _26
도종환 「오후」 _30
문정희 「비누」 _32
박기섭 「무작정의 봄」 _34
박명숙 「서해에서 기다릴게요」 _36
박미자 「감실부처바위」 _38
박소란 「숨」 _40
박시교 「지극히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_44
박화남 「맨발에게」 _46
서숙희 「판타지풍으로」 _48
송재학 「눈사람」 _50
송종찬 「눈사람」 _52
송찬호 「호박벌」 _54
신달자 「종이의 울림」 _56
신용목 「옥상의 조건」 _58
안도현 「유산가」 _60
안상학 「가문비나무」 _62
안희연 「광장한 삶」 _64
이기영 「그믐의 문」 _66
이남순 「발아래 공손히」 _68
이달균 「바람 노래」 _70
이수명 「성묘객들은 밝은 옷을 입는다」 _72
이승은 「그늘을 놓아주다」 _74
이 원 「모두의 밤」 _76
이재무 「한사람 1」 _80
이정환 「박 넝쿨 그늘」 _82
이지아 「넓고 가득한 그것」 _84
이토록 「책을 펼치자 십자가들이 쏟아졌다」 _90
임성구 「공명 동굴」 _92
장재선 「신안의 평안」 _94
정용국 「볼로냐 블루스」 _96
진은영 「충족이유율 유감」 _98
천융희 「여기서 말한 건 여기서」 _100
최동호 「경이로운 빛의 인간」 _102
허 연 「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_104
홍일표 「독주」 _108
「숨」 시평 허희 _112
박소란 시인 인터뷰 최지은 _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