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에세이스트 비평가의 초상: 이광호, 「작별의 리듬」
[문학 월평] 에세이스트 비평가의 초상: 이광호, 「작별의 리듬」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4.12.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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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널리 읽히지 않는 시대가 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럼에도 비평은 각종 지면에 계속 쓰이고 있다. 읽는 이의 수와 상관없이 그것이 소용되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느슨한 감상의 향연 뒤에 생기는 헛헛함. 이를 넘어 분석을 통한 이해—설득과 납득에 다다르고 싶다는 욕망이 비평을 계속 생존하게 만든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아름다운 텍스트를 대하는 지극한 사랑의 방식 가운데 하나다. 누벨바그의 기수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마따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영화에 관한 글을 써야 하는 것일 텐데, 비평가는 정확히 그러한 방법으로 아끼는 대상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트뤼포는 영화를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진심 어린 사랑의 구현태로 여겼다. 탁월한 문학비평가의 경우는 어떤가. 직접 시나 소설을 쓰지 않더라도, 비평으로 문학의 창조성을 생성하고 독자가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이끈다. 그가 언급하는 작품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오직 비평만으로 독자는 문학적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비평과 문학 비평의 차이다. 아무리 뛰어난 영화 비평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화 그 자체가 될 수 없지만, 특출난 문학 비평은 그 자체로 문학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글을 쓰는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광호다. 1988년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래 그는 비평이 논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문학임을 꾸준한 글쓰기로 증명해왔다. 이와 같은 면에서 이광호는 비평가인 동시에 에세이스트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대표적인 책이 『사랑의 미래』(2011)이다. 역시 비평가인 동시에 에세이스트였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1977)을 떠올리게 하는 이 에세이집을 여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기술한다. “이 책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한 작은 탐색이다. 이를테면, 사랑에 관한 1인칭의 고백과 2인칭의 대화와 3인칭의 묘사가 공존할 수 있을까, 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와 에세이적인 사유는 어떻게 교차할 수 있을까,와 같은 헛된 시도 말이다.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이 뒤섞인 글쓰기를 향한 무모한 동경은 오래되었다.”

 

“작별의 사건은 일종의 리듬이다. 리듬은 내용과
멜로디에 비해 원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리듬이야말로 생성과 작별의 운동 방식이다.
리듬은 반복에 의해 발생하고 그 반복은 다른
반복을 통해 변이된다. (……)
현현은 리듬이 데려오는 순간이 그런 것처럼
‘사건’이다. 리듬이 만드는 사건은 시간에 대한
구획을 넘어서는 무한의 영역에 진입한다.
리듬은 비유보다 원초적이고 급진적으로
‘시적인 것’이다. 리듬의 세계에서 시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파동의 사건이다.
감각과 몸의 영역에 작용하는 리듬은
해석도 인식도 필요하지 않다.”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이 뒤섞인 글쓰기를 향한 무모한 동경”의 결과물이 『사랑의 미래』로 집약되었으나, 본인이 밝힌 대로 이러한 소망은 “오래되었”고, 쓰는 주체로서의 근원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글쓰기에 지속적으로 투사될 수밖에 없다. 이광호가 최근에 낸 비평 에세이 『작별의 리듬』(2024)도 마찬가지다. “문학·예술에 관한 횡단 비평”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듯이 그는 특정한 영역에 귀속되지 않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비평 에세이’를 선보인다. 이광호는 횡단 비평을 지배적 시간·동일성 등을 초월하는 움직임으로 정의하는데,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인상적이다. “횡단 비평은 문학이 문학 아닌 것을 구별 짓는 방식과, 문학 아닌 것이 어떻게 문학을 변화시켰는지를 함께 물어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장르문학과 개념미술까지를 다루고 있는 것 역시 그 작은 횡단의 일부이다.” 문학비평가라면 응당 ‘순문학’만 평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훌쩍 뛰어넘어, 그는 문학성을 구성하고 심문하는 예술성의 구조를 탐색하는 지평으로까지 나아간다.

가라타니 고진이 『트랜스크리틱』(2010)에서 가능성의 자장 아래 마르크스로 칸트를, 칸트를 마르크스를 독해하면서 자본주의와 코뮤니즘의 코드 변환transcoding을 시도한 것처럼 이광호는 “횡단적이거나 전위적인 이동”에 의한 비평(비판)을 수행한다고 평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과정이 딱딱하기만 하거나 지루하지 않아서 그의 글은 읽을 맛이 난다. 에세이스트로서의 역량이 비평마다 한껏 발휘되기 때문인데, 예컨대 “세월호 이후에도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남은 자의 침묵」(2014) 마지막 대목이 압권이다.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불가능성과 침묵의 잠재성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건 이후의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언어의 자리에서 그 모순과 분열을 ‘견디는’ 남은 자의 글쓰기다. 문학은 사라진 자들의 침묵의 능력에 의지한다.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익명으로만 간신히 말할 수 있다. 주어를 알 수 없는 저 목소리들을 통해 이름은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 저 헤아릴 수조차 없는 이름들. 과거이자 이미 미래인 이름들. 무서운 밤처럼 들이닥친 아침의 이름들. 명랑한 다정한 창백한 조각난 흐려진 이름들의 이름으로.”

보다시피 이 문단은 이광호가 지향하는 “시적인 것과 소설적인 것과 에세이적인 것이 뒤섞인 글쓰기”의 전형이다. 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2019)의 해설 「새하기와 작별의 리듬」도 그렇다. “작별의 사건은 일종의 리듬이다. 리듬은 내용과 멜로디에 비해 원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리듬이야말로 생성과 작별의 운동 방식이다. 리듬은 반복에 의해 발생하고 그 반복은 다른 반복을 통해 변이된다. (……) 현현은 리듬이 데려오는 순간이 그런 것처럼 ‘사건’이다. 리듬이 만드는 사건은 시간에 대한 구획을 넘어서는 무한의 영역에 진입한다. 리듬은 비유보다 원초적이고 급진적으로 ‘시적인 것’이다. 리듬의 세계에서 시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파동의 사건이다. 감각과 몸의 영역에 작용하는 리듬은 해석도 인식도 필요하지 않다.”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그가 이번 비평 에세이를 포괄하는 제목으로 왜 ‘작별의 리듬’을 선정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복과 차이가 빚어내는 운동성을 긍정하면서, “해석도 인식도 필요하지 않”는 리듬이 펼쳐내는 “무한의 영역”이 이광호가 추구하는 비평적 세계와 겹친다.

지식을 과시하지 않고, 감각을 포장하지 않으며, 책임을 방기하지 않은 채, 시대 정신과 유리되지 않도록 비평 에세이를 쓰는 일은 굳게 다짐하더라도 쉽지 않다. 그 어려운 일을 이광호는 거듭해 내고 있다. 그의 독자이자 후배로서 나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경이롭다. 1980년대에 등단한 비평가가 30년 넘게 현역으로 문학 현장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데뷔한 지 10년을 조금 넘긴 비평가로 어찌어찌 살고 있는 나로서는 여러 개의 답안 중 하나를 그에게서 발견한다. 언젠가는 『작별의 리듬』과 같은 비평 에세이를 내고 싶다, 우선 그 전에 그러한 독창적이고 미학적인 글을 쓰고 싶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한껏 새로운 글쓰기 동기를 부여받았다.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고,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 글을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저서로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가 있음.

 

 

* 《쿨투라》 2024년 12월호(통권 12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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