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초에는 각종 음악축제나 시상식을 통해 지난 한 해의 음악계를 결산하고 한 해를 빛낸 음악과 음악인 등을 선정하는 자리가 마련되곤 한다. 이 지면에서는 최근 발표된 앨범 중 다분히 필자의 주관적 시선에서 얘기하고 싶은 거리가 있는 음반들을 소개해 왔으므로 어떤 타이틀을 정해 순위를 매기고 특정 음반을 선정할 계제는 아닐 테다. 하지만 지난해 이 지면을 장식했던 음반들을 쭉 더듬다 보니 이런저런 사유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앨범들이 생각나 그중 하나를 다시 꼽아 보는 것으로 나름의 한 해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주인공은 듀오 ‘뜨거운 감자’가 지난 6월, 7년 만에 발표한 정규앨범 《Liquor Storage》이다. 2000년에 1집을 낸 ‘뜨거운 감자’가 2018년 싱글 《중력의 여자》까지 근 20년간 엄연히 모던록에 뿌리를 둔 음악을 해왔다면 이 앨범에서는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를 전자음으로 채운 완연한 일렉트로니카를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전자음 놀이’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이벤트는 아니다. 두 멤버 모두 밴드 외의 개인적 활동을 통해 이미 전자음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드러내 왔다. 김C는 2012년 발표한 자신의 첫 솔로 앨범을 ‘Dub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 작업임을 천명했고, 또 다른 멤버 고범준 역시 틈틈이 각종 장비를 만지며 기계소리에 심취해왔고 그 결과물로 몇 장의 앨범을 내놓은 바 있다. 다채로운 음악적 시도를 위해서거나 트렌드와의 접점을 의식해서거나 아니면 또 다른 다양한 이유로 밴드 사운드에 바탕을 두었던 록 밴드들이 전자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시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의 록 사운드를 중심에 유지한 채 일렉트로니카적 색채의 덧칠이라는 외연을 두른 형태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번 《Liquor Storage》에서 보이는 ‘뜨거운 감자’의 시도에는 깊은 근저에만 록의 자세가 아른거릴 뿐 지배적인 어법에서 전자음악의 그것을 메인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로 라벨링 해야 마땅하다.
전자음은 전자회로를 통해 아날로그 악기와 유사한 소리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한한 변수로 매번 다른 울림을 내는 자연의 소리와 달리 회로를 통한 일정한 발음 프로세스를 거쳐 만들어진 전자음은 음량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소리 자체는 매번 수학적으로 완벽히 똑같은 소리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연주한 북(drum)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반복할지언정 매 순간 사람의 터치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타이밍이 엄밀히는 모두 다른 파형과 시점으로 발생한다면, 전자드럼은 한 치의 오차 없는 균일한 비트와 소리의 반복으로 그야말로 수학적으로 완벽히 똑같은 파형의 복사물로 이루어진 루프(loop)를 형성한다. 이러한 본질과 더불어 아날로그 소리 모방을 넘어 기존에 없던 소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전자음은 그가 모방하려 했던 대상과는 또 다른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내게 되었고 이것이 곧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주는 즐거움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전자드럼 소리는 일정한 동작을 무한 반복하는 기계의 움직임을 연상시키고 여기에 얹힌 각종 신스 소리들은 기계들의 신호음처럼 공간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공간에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질 때면 인간과 기계만 남은 어느 세상의 황량한 디스토피아적 정취가 스쳐가기도 하고, 혹은 오히려 건조한 기계음을 인간의 따스한 온기로 끌어안아 야릇한 낭만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러한 묘한 심상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일렉트로니카가 주는 영감 중 하나일 테다.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봤을 때 《Liquor Storage》는 전자음악에 대한 두 록커들의 축적된 관심과 노하우가 이 장르에 대한 이해를 어디까지 다다르게 했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물론 그럴듯한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구현한 것 만으론 좋은 전자음악이 될 수 없다. 특히 《Liquor Storage》가 구현하고 있는 사운드의 기술적 완성도나 정밀함 등이 이 장르의 현재 단계에서 보이는 최정상급의 어떤 것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 음반이 훌륭한 일렉트로니카 음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장르의 정수에 대한 충실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를 구현하기 위한 적절한 스타일의 멜로디와 가사가 완성도 있게 구사되었기 때문이다. 록 작곡을 통해 숙련된 멜로디 메이킹 능력은 장르에 어울리는 분절되면서도 유기적 전개와 구성을 보여주는 멜로디를 뽑아내도록 함으로써 ‘노래’로서의 즐거움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있다. 오직 5곡만으로 구성된 이 음반을 미니 앨범으로 치부하지 않고 자신들의 6번째 정규앨범이자 ‘뜨거운 감자’의 공식적인 행보로 규정한 점에서 이 작업에 대한 스스로의 신념과 확신을 볼 수 있다.
* 《쿨투라》 2020년 1월호(통권 6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