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춤을 춘다. 갈대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넓은 벌판. 그 벌판 가운데 머쓱하니 서 있던 여자가 조금씩 어색하게 몸을 흔들다가 팔을 올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든다.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살풀이같은 이 춤의 정체는 무얼까? 영화의 첫 장면은 이렇게 열려진다. 그러다가 한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린다. 팔밑에 드러나는 입술이 벌어지고 이빨이 슬쩍 드러난다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웃는 것일까? 벌판에 놓인한 여자의 몸짓. 광대한 배경과 인물의 내면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아나모픽 렌즈의 효과적 기능이 살아나는 이미지. 거기 담겨진 이 여인은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실성한 듯 보이기도 하고 속내 응어리를 바람결에 풀어내는 것처럼 영화를 닫는 장면 역시 그녀의 춤이다. 이번엔 춤추기 전 그녀만의 의식이 동반된다. 관광버스 안. 엄마는 침이 담긴 꽃무늬 철통을 열고 꽃무늬 아롱진 치마를 걷어 올린다. 그리고는 허벅지 어딘가 침자리를 찾아 침/바늘로 찌른다. (이 장면은 자동적으로 독수공방 옛 여인네들이 허벅지를 찌르며 성적 욕망을 다스렸다는 전래담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그리고 버스 통로로 나가 무리 중에 묻혀 몸을 흔든다. 아래위로 흔들리는 버스의 움직임과 좌우로 흔드는 카메라가 결합한 프레임의 흠들림 속에 그녀의 춤은 묻혀진다. 첫 장면에서 마치 세상밖에 홀로 떨어진 처연한 새처럼 보이던 그녀의 몸짓은 이제 사람들 속에, 무리 속에, 세상 속으로 흡수된다. 버스 안을 통과하는 작열하는 석양빛이 일군의 엄마들/아줌마들을 무리진 그림자로 녹여낸다.
홀로 추는 몸짓/춤에서 시작하여 군무로 마감하는 〈마더〉는 춤/몸짓의 살풀이같은 격정을 엄마라는 캐릭터에 응축시키고 풀어내며 드라마를 구축해낸다. 우리가 기억하는 봉준호는 이렇듯 블랙유머로 무장한 명민한 세상 관찰을 약재를 써는 작두질의‘써걱’소리 만큼이나 섬뜩하게 드러내 보인다. 〈괴물〉이나 〈살인의 추억〉, 그리고 〈플란다스의 개〉에 비해 보다 압축된 배경과 사건 속에서 보다 집요하게 인물들, 특히한 인물/엄마를 탐색하고, 그녀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본다. 즉 드라마의 토대인 엄마란 존재, 소위 모성애란 개념의 정체, 그것이 태생적인 것인지, 혹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인지, 그 양자가 복합하여 짜내는 억압과 광기가 드라마를 휘감고 소용돌이 치게 만든다.
엄마가 자식에게 헌신하는 드라마는 테마로서‘모성애 장르’를 형성한다. 〈말아톤〉이 그런 대표적 경우라면, 〈마요네즈〉는 전복적이다. 그런 좌표 위에 놓고 보면 〈마더〉는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모자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절박한 모성애 드라마 같지만, 그 속에는 섬뜩한 구석이 곳곳에 포진한 악착같은 생존담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나 스스로만을 위한 생존이라기보다 아들의 엄마로서의 생존담은 분리되지 않는 개인 정체성의 분열적 관계양상이 낳은 뒤틀림을 보여준다.
도준은 28세 청년이지만 여전히 엄마의 보호가 필요한 모자란 아들로 보인다. 여자랑 자는 것과 엄마랑 자는 것을 동일하게 표현하는 도준은 동네 아이들에게조차 놀림감이 된다. 자기가 한 일과 남이 한 일조차 헷갈리는 박약한 기억력 탓에 친구가 깬 벤츠의 차창 거울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겨 덤탱이를 쓰기도 한다. 살인사건 현장에서도 마치 살인범인양 어수룩한 재현을 하면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손을 흔들며 영웅행세를 하는 그는 분명 엄마 없이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부족한 아들이다. 간혹 도준은 엄마의 과잉보호에 반항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마마보이로 살아남아야 할 약자이다.
그런 아들이기에 살인누명을 벗겨주려 스스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지극한 모성애가 정당화 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과도한 관계욕망과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 노상방뇨를 하는 아들에게 한약 사발을 들이밀며 먹이는 엄마의 모습은 과잉의 극단을 보여준다. 남은 한약 사발을 들고 노상방뇨의 흔적을 지우는 엄마의 모습은 세상에서 떠받드는 모성애의 비루한 이면을 블랙유머 장치를 통해 슬쩍 드러내 보인다. 면회 시아들이 기억해낸 다섯 살 때 겪은 엄마가 시도했던 동반자살의 기억은 어떤가? 사회적 육아 개념이 부재한 이곳에서 가난한 싱글맘에게 강요되고 칭송되는 모성애는 죽음의 욕망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절박하다. 문제해결 방도를 도모할 여지가 없는 여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성애, 특히 아들 갖기를 욕망한다. 아들의 엄마로 사는 게 해결책이 아니건만 강렬하게 이식된 가부장적 욕망은 여성 정체성의 분열을 광기로 대체하고, 세상에선 그걸 모성애라고 칭송한다. (이 부분에서 〈밀양〉의 엄마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모성은 부성 부재를 전제로 한다. 도준의 엄마만 그런게 아니라 사진관 여자도 죽은 아정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도 어버지는 없다. 부성이 박탈된 과잉 모성이다. 야매로 침을 놔주는 엄마가 사진관 여자에게 아들 낳는 침을 놔 주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침은 없지만 그런 침이 통하는 것은 욕망의 기호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도준은 그런 지극한 모성이 필요한 모자란 아들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침통을 건네주는 도준은 어떤가? 꽃미남 원빈의 외모를 최대한 어수룩하게 분장한 도준은 사슴같은 맑은 눈을 감추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어수선한 머리모양에 최대한 모자란 티를 내지만 어딘가 인위적이다. 이건 연출이나 연기력 부족(어쩔 수 없이 김혜자에 비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가진 것 없는 자가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한 술책일지도 모른다. 막판에 그가 잿더미에서 찾아낸 엄마의 침통을 건네주며 던지는 충언, “이런 걸 막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는 엄마와 관객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바보티를 내며 살아남아 왕이 됐던 바보왕 이야기, 똑똑하면 다치니까 일부러 하는 바보짓거리… 너무 나간 것일까? 아무튼 도준이 건네준 침통과 조용히 속삭이는 조언에 경악한 엄마의 망연자실한 태도처럼 풀릴만했던 드라마는 다시 미궁에 빠지고 엄마는 침기운에 춤을 춘다.
엄마-도준의 관계를 드러내는 또 다른 축에 존재하는 할머니(엄마의 엄마)-아정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모성의 이면을 대변한다. 할머니와 사는 아정은 ‘쌀떡순이’로 불리운다. 쌀주면 떡친다, 라는 뜻의 치욕적인이 별명은 토속 에로붐을 조장한 〈뽕〉의 이미숙이 구사했던 생존술이지만, 봉준호는 그런 생존술을 즐겁게 보여줄 마음과 의도가 없는 냉혹한 현실 관찰자이다. 마치 앞날을 예견하듯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핸드폰 사진으로 기록한 아정은 세상의 비루함에 증거를 남긴 셈이다. 그녀가 몸으로 벌어온 쌀로 연명하는 치매 노인 할머니는 또 어떤가? 핸드폰과 막걸리를 바꿔 먹을 생각에 가득찬 막걸리 중독 할머니는 미쳤기에 가련한 손녀에 대한 모성애가 없는 것일까? 아들의 무죄를 호소하러 아정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몰매를 맞는 엄마 앞에 나타난 할머니는 모두에게 막걸리를 끼얹으며 이 소동을 일단락 짓는다. 살인범을 찾는 증거가 담긴 아정의 핸드폰을 찾기 위해 엄마는 할머니를 돈으로 유혹한다. 미친 할머니같지만 막걸리와 쌀이 필요한 자신의 생존본능은 간직한 것일까? 할머니는 없다고 잡아떼던 핸드폰을 쌀 속에서 꺼내준다. 할머니는 손녀를 쌀/막걸리를 벌어다 주는 피붙이로 여기는 이기적인 존재, 비정한 모성을 대변한다. 그건 자식, 특히 딸을 팔아 먹는 비정한 이야기를 효심으로 대체한 효녀 심청이나 바리데기 신화,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증언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하여‘마더’를 내건 이 영화에서 모성은 도준의 엄마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미쳐버린 할머니,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진관 여자, 살인범으로 몰린 또 다른 바보 종팔의 부재하는 엄마, 이 모두를 가로지르는 모성, 엄마라는 존재 의미와 개인/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마더〉에 은닉된 앙금이다.
그 앙금은 봉준호 영화세상이 바라보는 지리멸렬함의 잔영이다. 〈마더〉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의 전작들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원초적으로 그의 단편영화 〈지리멸렬〉처럼 비루하고 졸렬하다. 가진 자의 속내는 심각하게 탐구할 필요조차 없이 슬쩍 들춰지기만 해도 속물스럽기 그지 없다. 소위 교수, 검사, 변호사, 공무원, 언론인 등 사회지도층이란 이들은 직위를 이용해 앞에서는 폼을 잡고 대접받으며 뒤에서는 받아먹기 바쁜 타락한 인물들이다. 〈마더〉의 골프장에 등장하는 교수 일당은 〈지리멸렬〉의 속물기득권 인물들과 유사하다. 룸살롱에서 어린 여자들을 주물럭대며 병원장 검사와 히히덕대는 변호사의 모습도 낯익다. 기득권층의 이런 비루한 모습은 카메라/엄마의 시선으로 다큐처럼 담담하게 관찰된다. 지리멸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진 게 없어 만만한 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들은 노골적으로 분노하고 투쟁하기보다 둔감하게(둔감한척?) 문제의 핵심을 빗겨가며 어수룩하게 살아남는다. 이른바 부조리한 세상을 돌파하는 바보인척하기 생존법이다. 이런 생존술을 봉준호는 특유의 블랙유머를 통해 관찰하는 재미로 변환시킨다. 그 재미 속에 생각거리들을 묻어놓는다. “당신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할 것이가? 무엇보다 당신은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라고.
유지나 파리7대학 기호학과 문학박사(영화기호학). 저서로『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공저) 등이 있음.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이사장. 전주영화제 페스티발 어드바이저. 동국대 교수. ginarain@empal.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