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표출 방식으로서 폭력과 욕설
〈똥파리〉에는 직설적인 욕설과 폭력이 난무한다. 등장인물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쉴 새 없이 누군가에게서 욕설이 쏟아지고 폭행이 넘쳐난다. 이른바‘용역 깡패’가 채무자를 폭행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오히려 단조로운 소재에 속한다. 남편이 아내를,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가 딸을, 동생이 누나를 윽박지르고 때리는 것이 〈똥파리〉에서는 일상다반사다. 폭력이나 욕설은 분명 보고 듣기에 거북한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점점 거기에 익숙해져 간다. 그 익숙함이란 편안함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이 영화에서의 욕설과 폭력을 지지하거나 정당화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이입移入과 관계가 있다.
그 폭력의 중심에는 상훈과 영재가 있다. 이 영화 속에서 폭력을 논할 때는 상훈뿐만이 아니라 영재에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훈과 영재는 다른 듯하면서도 가족애의 결핍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한 과거를 가졌고 분노로 점철된 삶을 사는 현재는 물론, 어쩌면 그들의 미래까지도 닮을 가능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이다. 용역 업체를 운영하는 만식이나 ‘용역 깡패’ 신입 사원인 환규는 일종의 직업으로서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상훈과 영재는 돈이나 직업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서 폭력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훈에게서도 영재에게서도 웃음기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분노가 가득 차 있어 보인다. 그 분노는 슬픔에 의해 잉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정 내 폭력, 가족의 죽음, 정신병, 가난 등으로 인해 가장 소중한 가족이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어버린 상황에서 무작정 삼키고 참아야만 했던 슬픔이 자리잡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결핍, 그리고 가족애의 결핍으로 쌓이고 응어리진 분노를 다독여줄 수 있는 것은, 동어반복처럼 들리지만 가족 외에는 없다. 그러나 현재 상훈과 영재가 일상 속에서 부딪혀야 하는 현실의 가족은, 상훈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같다’고 할 수 있다. 또다른‘가족의 탄생’이 아니고서는 슬픔과 분노와 폭력으로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고리는 끊어질 수가 없다. 여기서 상훈과 영재는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새로운 가족을 구상하면서 어렵게 어렵게, 상훈은 그 고리를 끊어내기로 선택했고, 현실의 가족을 등지면서 영재는 그 고리를 오히려 견고하게 하는 길로 덥석 들어섰다.
두 가족의 만남과 충돌
영화 속에서 상훈의 가족과 연희(또는 영재)의 가족은 만남과 충돌을 반복한다. 첫 번째 만남은 포장마차를 하던 연희의 어머니와 ‘용역 깡패’상훈의 충돌이다. 이 만남에서 철거에 저항하던 연희의 어머니는 상훈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만식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두 가족의 비극적인 만남의 시작이다. 두 번째 만남은 상훈과 연희의 만남이다. 우연히 처음 마주쳤을 때 서로 날을 세우며 으르렁대던 두 사람은 간헐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면서 일종의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낸다. 조금씩 이어져가는 두 사람의 만남, 그리고 형인(상훈의 조카)과 연희의 만남, 상훈의 이복누이(형인의 엄마)와 연희의 만남은 이 영화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부분이다.
상훈과 연희의 만남에서는 문득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연상된다. 〈오아시스〉에 나왔던 전과 3범과 뇌성마비 장애인처럼, 상훈과 연희 역시 사회의‘주류’나‘정상正常’으로부터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다. 그리고 설경구와 문소리가 그랬듯이 양익준과 김꽃비도 이른바 ‘3류 인생’을 지독하게도 잘 연기해냈다. 양익준과 김꽃비가 각각 빚어낸 상훈과 연희라는 인물은 주변의 평판이나 기대도, 본인들 스스로가 생각하는 미래도 볼품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가족으로 인해 상처입고 눈물진 삶의 고단함 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지탱해 줄 수 있는 소박한, 그리고 유일한 버팀목이다. 상실된 가족애가 어쩌면 복원될지도 모른다는 자그마한 희망을 그 둘의 만남 속에서 읽을 수가 있다.
세 번째 만남은 연희의 동생 영재와 상훈의 만남이다. ‘용역 깡패’ 선후배로서 어색하게 시작해서 상훈의 죽음으로 끝난 이 만남은, 영재는 물론 그 누구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영재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이어진 셈이 되었다. 영재가 상훈을 죽인 이유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그저 상훈이 영재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향한, 사람을 향한 분노로 충만해 있는 영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영재가 평소에 연희에게 못되게 굴었던 것 역시 돈 자체에 대한 욕구보다도 분을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이 누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영재에게 ‘용역 깡패 선배’로서 상훈이 가한 폭행과 무시는 영재의 분노와 지극히 사적이고 단순한 복수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과거에도 아팠고 현재도 너무나 아픈 두 가족의 만남은 이렇게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단 한 번의 웃음, 단 한 번의 눈물
영화 속에서 상훈의 웃는 얼굴은 딱 한 번 볼 수 있다. 상훈의 눈물도 단 한 번만 볼 수 있다. 상훈은 여동생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 웃음도 눈물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상훈이 가장 좋아하는, 어쩌면 상훈에게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는 조카 형인 앞에서도 상훈은 웃음기 어린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한 상훈이 웃음도 보이고 눈물도 보인 유일한 대상이 연희다. 상훈의 웃음과 눈물은 짧은 순간 각각 단 한 번에 그치지만, 그의 웃음을 따라 잠시 함께 웃고, 그의 눈물을 따라 오래도록 함께 울 수밖에 없도록 하는 진정성이 거기에 깊이 배어 있다.
술집에서 연희의 이름을 가지고“한연희, 두연희, 세연희”라고 장난을 치며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상훈을 보면서 그의 웃음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소탈함을 느낄 수 있다. 아버지가 자살 기도를 한 날 한강변에서 새벽에 연희와 맥주를 마시다가 불쑥 부모 이야기를 꺼내며“잘해라 부모한테. 속 썩이지 말고.”라는 말을 건넨 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상훈을 보면서 그의 눈물 역시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럽고 뜨거움을 느낄 수 있다. 어려서부터 상훈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지만, 상훈이라는 인물은 그저 성정性情이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한 그가 평균보다 훨씬 가혹한 현실을 외롭게 그리고 괴롭게 감내해 왔다는 점에서, 상훈이 웃는 장면을 보며 마냥 함께 웃을 수만은 없다. 상훈이 우는 장면을 보며 마냥 함께 울 수만도 없다. 상훈은 그동안 얼마나 웃고 싶었을까, 그동안 얼마나 울음을 참아 왔을까를 상상해보면 웃는 장면도 우는 장면도 결국 모두 눈물을 자아낸다. 그것은 단지 상훈이 처한 상황의 가혹함에 대한 동정심이 아니라, 모질게도 자신을 따라다니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웃음도 눈물도 포기하며 악착같이 저항해 온 한 인간의 인고忍苦에 대한 일종의 성원聲援이다.
더 이상 물려주고 싶지 않은 폭력
상훈은 이복누이의 아들인 형인을 끔찍이 아낀다. 상훈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는 적어도 연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형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연희를 만난 후에도 형인은 상훈에게 여전히 가장 중요한 존재다. 사실 상훈이‘용역 깡패’일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게 된 원인도 형인과 관련이 있다. 상훈은 형인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장면, 즉 상훈이 자신의 아버지(형인의 할아버지)를 폭행하는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그 이후 형인이 자신을 어색하게 대하는 것을 느낀 상훈은 아버지를 때린 것에 대해 형인에게 사과한다. 이것은 적어도 영화 속 상훈이 보여주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사과다. 그 사과는 ‘폭행을 당한’아버지가 아니라, ‘폭행을 목격한’ 형인을 향해 있다. 그 누구 앞에서도 거침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던 상훈은 학교도 안다니는 꼬마 형인 앞에서 자신의 행동을 사과한다. 따라서 그 사과는 살인자 아버지에 대한 용서나 자신의 패륜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어린 피붙이 조카의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요 보증이라고 할 수 있다.
상훈은 울먹이는 형인으로부터 가슴 아픈 한 마디를 듣는다. “할아버지 때리지 마. 옛날에 아빠도 엄마를 그렇게 때렸는데… ”상훈은 자신의 아버지가, 형인의 아버지가, 그리고 자신이 살아왔던,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조카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그 새로운 삶은 영화 속에서 휴대폰 개통과 통장 개설로 상징된다. 그런데 그 새로운 삶이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보다는 ‘현재 하고 있는 일(용역 깡패)을 그만 두겠다’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유독 상훈에게만은 처절할 만큼 가혹한 운명은 상훈으로 하여금‘현재 하고 있는 일’은 그만 두게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돌고 도는 폭력의 역사
상훈은 언젠가 밀린 돈을 받아 내러 갔다가 어린 남매 앞에서 아내를 폭행하는 채무자를 보고 그를 특히 심하게 구타한다. 그리고는 내뱉는다. “누굴 때리는 ×새끼는 자기는 안 맞을 줄 알거든. 근데 그 새끼도 언젠가는 ×나게 맞을 때가 있어. 그런데 그날이 ×같이도 오늘이고 때리는 새끼가 ×같은 새끼네.”채무자를 때리면서 그 말을 하던 상훈은 아마도 자기 아버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누굴 때리는 ×새끼’는 과거에 어머니를 구타하던 자기 아버지를, 그리고 그‘누굴 때리는 ×새끼를 때리는 ×같은 새끼’는 자기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때리는 상훈의 주먹에 더더욱 힘이 들어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그 말처럼 상훈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상훈은 짐작이나 했을까. 형인의 미래를 생각하며 상훈이 멈추고 싶어하던 그 폭력의 고리가 자신이 스스로 ‘용역 깡패’일로부터 훌훌 손을 터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통해 겨우 끊어질 것이라고 짐작이나 했을까. 상훈이 영재에게 맞아 죽어가던 시점에서 ‘누굴 때리는 ×새끼’는 상훈 자신으로, 그리고 그‘누굴 때리는 ×새끼를 때리는 ×같은 새끼’는 자신의‘용역 깡패’후배인 영재로 변해 있었다. 상훈이 벗어버리고 싶어 했고 벗어버리려고 했던 그동안의 폭력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것인지는 몰라도, 운명은 마지막까지도 상훈에게는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왜 하필 ‘용역 깡패’일을 그만 두기로 한 날, 상훈이 수금을 하러 찾아간 남자의 아들이 자신의 이름과 같은 상훈이었으며 그 아이에게는 여동생이 있었을까.
상훈의 죽음 이후, 조금 심하게 말하면 상훈의 죽음으로 인해 상훈의 남은 가족이 폭력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삶의 방식과 가족 성원이 새롭게 ‘재구성’되어 정상적인 가정을 복원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면, 상훈을 죽인 영재는 이제 새로운 상훈이 되어 상훈의 일을 물려받고 아마도 직업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증오가 가득 담긴 폭력과 욕설을 분출함으로써 ‘용역 깡패’일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영재는 상훈의 일과 상훈의 일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상훈의 분노까지도 고스란히 건네받은 듯하다. 어쩌면 상훈의 어이없는 죽음까지도 영재가 닮을 것만 같아서, 상훈 없이도 나름 행복한 다른 가족들의 웃음을 보여 주는 짧은 장면 뒤에 배치된, 몽둥이를 들고 철거에 나선 영재의 성난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엔딩은 그래서 슬프기만 하다.
설규주 서울대학교 사회교육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 과정 졸업. 저서로『시민사회피해자 그리고 시민윤리교육』『오공 삼권분립 랜드에 가다』등이 있음.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qzoos@ginue.ac.kr.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