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시작되면, 아침을 준비하는 중년의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그의 애인에게 딸과 약속이 있어 저녁에는 함께 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마이클은 바깥을 응시한다. 창밖으로 전차가 지나간다. 그의 한 생애도 운명처럼 지나간다.
영화 〈더 리더〉는 법대 교수이자 판사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원작 소설을 충실히 스크린으로 옮긴 것이다. 다만 원작과 달리 영화는 1995년 현 시점에서 주인공 마이클이 과거를 추억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법학도라는 것, 나중에 소설을 쓰게 되는데 스토리가 왠지 실제 원작자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누군가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라 실화처럼 더 현실감 있고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이를 증명해보이듯 원작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논란의 여지를 불러일으켰던 열다섯 소년과 서른여섯 성숙한 여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 “미하엘(마이클)과 한나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전쟁 이전 세대와 이후 세대 간의 관계와 세대 차이였다”고, “미하엘과 한나의 관계는 소위‘68세대’라고 불리는 신진 세대와 구세대 간의 관계에 대한 메타포”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에 수긍한다. 그런데 영화를 몇 번 보고나자 스크린 속에서 튀어나온 늙은 마이클이 68세대 독일인처럼 자신의 속마음을 얼버무린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한나를 통해 묻는 68세대 독일인
이 영화가 독일의 ‘68세대’와 ‘과거극복’사이의 관계를 다룬 것은 틀림없다. ‘68운동’을 주도한 그들의 공동 정서는 1960~1970년대의 사회운동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나치과거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을 배경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즉, ‘68세대’는 영화 속 마이클처럼 전쟁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전쟁 전후의 체험과 부모세대의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서의 직간접적인 나치체험을 매개로 한다. 그러므로 나치 과거와의‘연속성’은 물론, 동시에 이러한 ‘과거’와의 단절에 대한 지향을 공동정서로 형성한다. 68세대 독일인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작품 속 한나를 내세워 우리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문맹이라는 치명적인 콤플렉스를 가졌지만 한나는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 후 전후세대의 과제처럼 죄의식의 재물로서 법정에 선 것이다. 당신이라면 수용소 근무자 8천명 중 19명이 기소되고, 6명만이 살인혐의를 받은 그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인간적으로 한나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그녀의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 얘기만 나오면 가위눌리듯 침묵하는 지도 모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또한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원작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이 영화는 68세대의 과거사보다는 사랑이 먼저인 영화다. 첫사랑은 성장기의 심한 홍역을 치르듯 누구에게나 스쳐지나가기 마련. 그러나 여기, 독일에서 68세대로 지칭되는 마이클은 한 연인(한나)을 만나면서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 그와의 운명적 만남을 통해 68세대가 치를 수밖에 없었던 나치과거에 대한 생체험 또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사랑 먼저, 과거사는 그다음 문제다. 책 읽어주기 먼저, 그다음 섹스처럼.
책 읽어주기 먼저, 섹스는 그다음
“Reading first. Sex afterwards”
나는 한나의 당돌한 이 말에 매료되었다. 이처럼 사색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 또 있을까? 누군가 침대에서 나에게 책을 읽어준다면 그때부터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이가 내게 책을 읽어준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름답고도 가슴 벅찬 흥분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영화에서 섹스 먼저, 그 다음이 독서였다면 섹스 후 읽는 책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자신보다 21살이나 연상인 한나와의 첫 경험을 통해 사랑에 눈 뜨게 된 마이클. 그리고 어린 마이클을 사랑하며 세상과 조심스럽게 소통하게 된 한나. 그들은 세상이 정해놓은 상식적인 룰을 깨고 사랑을 나누게 된다. 한나는 지속적으로 마이클이 읽어 주는 문학작품을 들으며 새로운 세상에 매료되고, 사랑을 느끼고, 그다음 그들은 섹스를 통해 온전한 하나가 된다. 그들의 섹스는 전범세대에 속하는 한나와 전후세대인 마이클이 유일하게 서로 합일점을 이루는 순간이다. 마법 같은 그해 여름, 오직 생존을 위해서 살아왔던 한나에게 어린 마이클은 사랑스러운 연인으로 발전해간다.
읽고 쓰지 못하면 어떠랴. 둘만의 자전거 여행에서 성가대 합창을 들으며 아름다움에 눈물 흘리는 한나. 그때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한나의 모습을 평생 자신의 영혼 깊숙히 새겨넣은 마이클은 그 후 한나의 시신 또한 그곳에 묻었을 것이다. 사무직으로의 승진통보와 함께 떠날 결심을 했을 때도 마이클을 발끝부터 구석구석 씻겨 주는 한나. 자신과 함께했던 추억을 깨끗이 지워버리라는 듯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문지르는 한나를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대학생이 되어 우연히 법정에서 재회하게 되었을 때, 마이클은 그녀의 비밀을 알게 되고 당황한다. 독일 나치의 통치하에 단순히 강제수용소 감시원 역할을 했던 그녀. 전범재판에 회부되자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밝히기 싫어 종신형을 언도받는 무지하다고도 할수 있는 그녀. 그러나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가 지키고자했던 마지막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기에 마이클은 끝내 침묵한다.
그 후 세상과 오랫동안 단절한 마이클. 그는 이혼 후 책을 정리하며 다시 과거의 사랑을 떠올린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기 위해 낭독하여 녹음하고, 섬세하게 일련표시까지 기입해서 보내준다.
녹음테이프를 켰을 때, 마이클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한나. 그 사랑의 힘에 이끌린 한나는 다시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이라 불렀다.”를 수십 번 확인하고 더듬으며 글을 한자 한자 깨쳐가는 그 장면에서 가슴이 울컥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비뚤비뚤, 꼭 꼭 눌러쓴 그녀의 첫 번째 편지 “꼬마야, 저번 책 정말 좋았어”. 마이클은 그녀가 글을 깨쳤다는 사실에 감동하고 놀랐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고, 다만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을 계속했다. “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내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원작 201쪽)고.
한나는 마이클과 소통하고 싶었고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글을 배웠다. 그러나 그녀가 석방되기 전 날, 재회에서 마이클의 냉담한 태도, 그리고 그가 더 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녀에 게 삶의 이유를 사라지게 한다. 그가 더 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는 바깥 세상보다 그가 책을 읽어주는 감옥 안이 한나에게는 더 행복했으므로.
일생 그녀를 사랑했지만, 늘 머뭇거렸던 마이클. 결국 그녀의 유언장을 보면서 그제야 자신이 정말 한나를 사랑했으며, 한나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Reading first. Sex afterwards.”는 많은 것을 암시한다. 한나와 마이클의 관계는 섹스가 전부는 아니었던 것. 한나(구세대)는 자신의 문맹(전범)을 절실하게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마이클(전후 68세대)과의 사랑을 통해 치유받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그를 통해 자신이 보지 못한 미래의 세상, 영원히 꿈꾸는 세계로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독서 먼저, 섹스는 그다음”처럼 이 영화를 “사랑 먼저, 68세대 과거극복은 그다음”이라 바꿔본다. “한나에게 향한 손가락질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선택했다.”고 고백하는 미하엘(마이클)의 말처럼 그들의 사랑은 원작자가 의도한 신구세대차이의 관계를 훨씬 뛰어넘은 더 높은 알레고리를 형성했다.
이 영화는 과거사를 두고 미화한 듯 독일인의 미묘한 얼버무림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성과물이 부럽다. 작가, 감독 등 문화예술계가 적극적으로 앞장서는 독일사회에서의 이 같은 노력은 4·19 세대나 386세대가 공존하는 한국사회에서도 많은 시사점을 던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신경숙은 최근 글에서 “〈더 리더〉처럼 우리의 뼈아픈 역사와 지금의 삶을 현대적으로 접목시키는 작품을 쓰고 싶다.”(『2010 오늘의 소설』) 고 말한다. 굴곡 많은 현대사를 간직한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과거사를 냉철하게 돌아보게 하는 한편의 소설이, 한편의 영화가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리더〉처럼.
손정순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 논문으로「김지하 서정시에 나타난‘그늘’의 상징성」등이 있음. 《쿨투라》편집인. more-son@hanmail.net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