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오늘의 영화 - 호우시절] 여전한 사랑과 확장된 죽음... '허진호 표' 변주
[2010 오늘의 영화 - 호우시절] 여전한 사랑과 확장된 죽음... '허진호 표' 변주
  • 백승찬
  • 승인 2010.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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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허진호 감독은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에서 시작해 근작 〈호우시절〉(2009)까지 다섯 편의 장편 상업영화를 내놨다. 허 감독은이 다섯 편의 영화에서 갓 사랑을 시작하거나, 한동안 지속된 사랑을 잃는 남녀를 그린다.

그러나 종종 잊혀지는 건, 허진호가 사랑못지 않게 죽음을 중심에 뒀다는 점이다. 그의 다섯 영화에선 모두 주인공 혹은 주인공 주변 중요 인물의 죽음이 다뤄졌다. 허진호 영화의 죽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죽음은 사랑을 방해하거나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허진호의 영화는 사랑과 죽음의 관점에서 함께 보아야 한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감독의 영화 중 처음으로 영어 대사가 사용됐고, 외국 배우가 주연으로 참여했다. 이 영화는 2008년 일어난 쓰촨성 대지진을 소재로 한 옴니버스 영화 〈청두, 아이 러브유〉의 한 편으로 기획됐으나, 단편에서 장편으로 분량이 늘어나면서 독립된 영화로 개봉했다.

건설중장비 회사 팀장인 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에 출장을 온다. 시간이 남아 두보초당에 들른 그는 관광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유학시절 친구 메이(고원원)와 우연히 재회한다. 눈치 없는 현지 직원(김상호)이 둘의 만남을 수시로 방해하지만, 둘은 청두의 명소들을 거닐며 옛 추억과 새 사랑을 나눈다.

이 영화의 한국 흥행 성적은‘참패’에 가까웠다. 전국 관객 3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얽히고 설킨 관계, 치정, 과격한 대사가 오가는 ‘막장 드라마’에 익숙해진 한국의 관객은 사랑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시작 안 한 것도 아닌 두 등장인물의 관계가 밋밋하다고 느낀 걸까. 영어 대화가 오가는 과정에서“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봄날은 간다〉)와 같은 허진호 특유의 인상적인 대사가 사라져버린 것도 흥행 실패의 한 원인일 수 있다.

둘의 사랑이 머뭇대는 이유는 영화 후반부에 밝혀진다. 메이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남편은 쓰촨성 지진에 목숨을 잃었다. 메이는 아직 남편을 잊지 못했으나, 동하는 메이의 신변에 일어난 일을 채 알지 못했다. 죽음은 사랑의 발목을 잡는다. 드러나지 않은 중요 인물의 죽음이 드러난 주연의 정서를 지배한다.

허진호의 데뷔작으로 돌아가보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음을 앞둔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주차단속원 다림(심은하)과 짧고 인상적인 관계를 맺는다. 정원의 몸 상태는 그가 병원에 실려가는 한두 번의 인서트만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심지어 다림조차 정원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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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파국이다. 존재의 끝이다. 언젠가 모든 인간이 마주쳐야할 심연이다. 결국 인류의 모든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를 다룬다.

사진사 정원이 자신의 존재를 영속시키는 방법은 그의 직업인 사진 촬영이다. 그는 스스로 증명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은 곧 자신의 영정 사진이 된다. 정원은 생전 찍어둔 다림의 사진을 사진관 윈도우에 전시해놓고 떠남으로서, 다림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마음을 전한다. 정원의 육신이 없어도, 정원의 마음은 사진을 통해 남는다.

사진이 인간의 영혼을 포착해 가둘까봐 두려워했다는 어느 원시 부족의 믿음에는 통찰이 있다. 사진은 인간의 기억에 대한 보조 도구에 불과하고, 기계의 불완전성과 촬영자의 기술에 따라 왜곡이 따른다. 하지만 사진은 또한 쉬지 않고 흘러 영원으로 향하는 순간을 붙잡는 수단이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사진은 살아있음의 감각을 즐기고, 사후에도 그 감각을 전하는 방법이다.

허진호의 두 번째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두 주연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은 주연 상우(유지태)에게‘영원한 것은 없다’는 깨달음을 준다. 세 번째 영화 〈외출〉은 배우자의 죽음 혹은 중상 이후 만나는 남겨진 배우자들의 이야기고, 네 번째 영화 〈행복〉은 아예 죽음을 준비하는 이들이 머무는 시골 요양원이 배경이다.

허진호의 이전 네 편의 영화에서 죽음은 모두 개인의 것이다. 죽음은 그 자신이나 주변 몇몇 인물들에게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이들의 죽음을 사회 전체가 애도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호우시절〉에서 죽음은 사회로 확장된다. 이 영화가 애초 쓰촨성 지진을 추모하기 위해 기획된 것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동하는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돌아본다. 자신이 곧 사랑을 시작할 여성의 마음 풍경이 이 폐허와 비슷한 모양임을 그는 아직 알지 못한다. 동하는 출장 기간을 임의로 늘리면서까지 메이와 시간을 보내려 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안달한다. 메이는 ‘결정적 순간’에 자신이 기혼자임을 알려 그를 밀쳐내지만, 동하는 여전히 메이의 결혼이 사회 전체가 맞은 거대한 재난으로 인해 끝났음을 모른다. 대자연의 재앙은 인간 사회를 파괴했고, 파괴된 사회는 평탄했던 결혼 생활에 균열을 냈다. 동하는 메이라는 개인을 통해 평소라면 잠깐 들른 뒤 잊었을 사회의 비극에 시선을 둔다. 이렇게 허진호 영화 속 죽음의 의미가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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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죽음이라는 정신적 외상을 겪은 메이는 어떻게 슬픔을 이기고 삶을 살아내는가. 그에게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이 가졌던 기계적 수단, 즉 사진이 없다. 대신 메이는 생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에 호소한다. 돼지내장탕면. 〈호우시절〉에서 돼지내장탕면은 3번 등장한다. 동하는 공항에 마중나온 현지 직원과 첫 식사를 하면서 돼지내장탕면을 접한다. 이 음식은 동하가 포용하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이다. 현지 직원은“사업하려면 이런 것도 먹어야 된다”며 넉살을 떨지만, 동하는 쉽사리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동하는 메이와 식당에서 데이트를 하며 두 번째로 돼지내장탕면을 만난다. 메이는 마음대로 이 음식을 권하고, 동하는 거북해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입을 벌린다. 세 번째 돼지내장탕면은 메이 남편의 영정사진 앞에 바쳐진다. 생전 메이의 남편은 아마도 이 음식을 좋아했을 것 같다. 메이는 외부인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음식을 통해 죽은 남편과 새 연인 동하를 이으려 한다. 음식한 그릇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는다.

사진이 시각이라면 음식은 미각과 후각이다. 반추를 필요로 하는 사진보다 음식, 그것도 현지의 토착 음식은 삶의 감각에 더 직접적으로 호소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나’가 오랜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마들렌 과자를 입에 넣은 순간이었다.

〈호우시절〉은 허진호 영화로는 드물게 해피엔딩의 분위기를 풍긴다. 〈봄날은 간다〉 시절의 허진호였다면 동하가 평상복 차림으로 두보초당을 다시 찾는 마지막 장면은 넣지 않았을 듯하다. 다시 시작한 연인의 관계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사회의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을 듯하다. 그러나 허진호는 이제 죽음에 무릎꿇는 대신, 죽음에 초연해지는 방법을 찾아나가고 있는 듯하다.

영화가 그의 시에서 제목을 따오기도 한 두보는 나라가 망할뻔한 전란의 시기를 겪은 불운한 시인이었다. 가족은 늘 떨어져 있었고, 춥고, 배고팠다. 두보는 민중의 처참한 삶을 노래했지만, 눈물에 젖어 있지만은 않았다. 돌멩이같이 딱딱하고 뾰족한 삶을 씹고 소화해 되뱉어내는 능력. 이것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위대한 예술가의 덕목이라면, 〈호우시절〉에는 그 단초가 담겨 있다.

 


백승찬 《경향신문》문화부 영화담당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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