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이 불러일으키는 질문
안개와 함께 찾아온 <파주>의 모호함은 실로 사랑스럽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의 공통된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모호함’일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파주>를 둘러싼 지지 혹은 불신은 해석의 방향은 다를지언정 기본적인 애정과 호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파주>가 보는 순간의 쾌감보다 보고 난 이후의 사유가 더욱 흥미로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 전반을 감싸는 안개의 이미지와 다르게 <파주>의 서사는 사실 매우 명료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이것이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 했다. 다만 이 명료함은 그저 평면적이지만은 않기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른 이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예술의 가치가 선형적인 단언이 아닌 다양한 반응의 확장에 있다면, 분명 <파주>는 올해 선보인 영화 중 단연 주목받아야 마땅한 성취를 남겼다.
<파주>의 모호함은 해석하기 힘든 질문의 출발이자 도착점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우화적인 물음이나 형이상학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아방가르드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파주>는 어디까지나 장르적이며 회화적인 어떤 것을 통해 외연의 확장을 시도한다. 하지만 질문의 무게 있는 울림과는 달리, 이야기를 하나의 인과관계로 포섭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일종의 징후만을 몰아붙이는 서사는 때때로 질문조차도 흐릿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마도 이처럼 파괴력 있는 질문과 헐거운 해답 사이의 간극이 <파주>의 호불호를 나누는 지점일 것이다. 따라서 <파주>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적 틈새, 그리고 축적되는 모호함이 결국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중의 서사가 빚어낸 경계의 틈새
영화를 보고 난 후 <파주>의 서사를 일렬로 정리해보면 형부와 처제의 금지된 사랑이야기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 진부한 멜로드라마적 소재는 전혀 멜로드라마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파주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조각내어 재배치하고 끊임없이 플래시백을 동원해 과거의 이야기를 끼워넣는다.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중식(이선균)으로부터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던 은모(서우)가 3년이 지난 뒤 다시 파주로 돌아온 시점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언니의 죽음과 관련된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영화는 빈번하게 은모와 중식이 함께 지내던 3년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의 사정과 숨겨진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문제는 일련의 서사적 연결이 실제로는 안개 낀 파주라는 관념적 공간과 저항운동이 계속되는 파주의 현실적 공간이라는 2가지의 입장을 병행하며 다르게 서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선형 위에 그저 방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파주>의 서사는 명백하게 방치되고 있다.
단선적으로 볼 때 <파주>의 서사는 사건의 연결이라기보다 차라리 기억의 정렬에 가깝다. 문제는 그것이 누구의 기억인가 하는 점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자욱한 안개를 뚫고 은모(서우)가 3년 만에 고향인 파주로 찾아오는 모습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파주로 내려오기 7년 전의 중식(이선균)의 과거가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이 연결은 어딘가 이상하다. 이 순간의 플래시백은 중식의 것인가, 아니면 은모의 것인가. 관습적인 서사 전개로 봤을 때 이것은 중식의 기억이 되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후의 플래시백이 모두 중식의 입장이라면 영화는 “갚아야할 것이 많은”중식이“길 잃은 어린 양”인 은모를 감싸주지만 모두가 희생해도 나아지지 않고“끝이 안나”는 남자이야기로 명료하게 정리된다. 하지만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기엔 영화 여기저기에 흩어진, 은모의 알 수 없는 표정에서 피어난 파장들이 너무 깊다.
그렇다면 빈번한 플래시백을 은모의 주관적 기억으로 봐야 하는가. 은모는 금지된 사랑을 갈망한다. 금지를 전제한 은모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도록 보호된 격리의 상황에서만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때문에 언니의 죽음 이후 유지했던 중식과의 생활은 깨어질 수밖에 없고 은모는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중식이 등장하는 플래시백이 엄밀히 말해 중식에게 일어난‘사건의 서술’이 아니라 ‘은모의 시점에서의 짐작’이라고 해석한다면, 욕망의 경계에 선 은모의 모호한 그러나 의미심장한 표정들을 욕망의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요컨대 중식의 윤리적 측면이건 은모의 억압된 욕망이건 어떤 쪽을 선택하더라도, 하나의 입장만을 선택해 재구성한다면 징후없이 결과만 서술하는 것 같던 사건들의 관계가 비로소 논리적 인과 안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파주>의 서사는 적어도 관객이‘보는’동안은 2가지의 다른 층위의 이야기를 하나의 선형으로 묶는 형태를 벋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서사의 인과가 생략된 것처럼 보이고 관객은 영화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를‘보고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관객이 메울 수 없는 서사의 틈새가 발생하는 것이다. 중식이 재개발시위 현장에 찾아온 은모에게“난 한 번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고 고백하는 결정적 순간이 그저 당황스러운 까닭은 이 때문이다. 방치된 사건의 나열만으로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징후도 드러나지 않기에 관객은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그렇다면 <파주>는 보는 동안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인 실패한 서사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바로 이 서사적 틈새를 메우는 방식이야말로 <파주>의 본질이며, 관객이 이 영화의 해독에 애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관념의 공간에서 피어난 안개의 표정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앞서 모호함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적 틈새라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하자면 관객이 납득하기 힘든 서사적 틈새를 봉합해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지배하는 모호한 이미지의 기능이다. <파주>가 묵직한 감정의 덩어리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까닭은 서사의 틈새를 메우는 직관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의 반복에 있다. 은모의 얼굴로 대표되는 알 수 없는 표정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표정이 아니라 진실을 감추고 싶은 안개의 무霧표정이다. 그것은 <초록물고기>를 연상시키는 재개발과 외곽의 삶이라는 현실의 파주가 아닌, 안개로 상징되는 관념의 창조물로써 비현실적인 공간인 파주의 이미지와 겹친다. 거기에는 경계에 서 있는 불안한 상황을 덮고, 감추고, 모호하게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결국 이 회화적인 인상의 반복이 불균질적이고 일관성이 결여된 연출 사이에 발생한 헐거움을 메우고 종국엔 영화를 지배한다. 장면 장면의 불협화음 탓에 관객은 얼핏 영화가 펼쳐놓는 감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이것은 의도된 방만함 혹은 모호함에 가깝다. 방치된 감성의 빈칸 사이로 들어차는 혹은 초대되는 것은 은모의 얼굴이 상징하는 모호함으로 점철된 이미지의 조각들이다. 이러한 빈칸의 중첩이‘영화적인 것’으로 각인되어 종국엔 그것을 해석하고픈 관객의 애정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파주>가 보는 동안은 이해하기 어렵고 애매할지언정 적어도 이 영화가 던지는 묵직한 감성의 덩어리를 외면하기는 힘든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파주>는 모호함이라는 해체하기 곤란한 덩어리를 하나의 굳건한 질료적 존재로 변환시킨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이것은‘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라는 진술이 아니라 ‘알 수 없도록 만드는 견고한 태도에 관한’이야기다. 서사의 틈새에서 비롯된 불균질함이야말로 감독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인 것이다. <파주>의 미학은 사랑이라는 단편적인 관계에 포섭되지 않고 모든 인물에게 연민을 가지도록 만든 각각의 이야기의 끝에서 드디어 안개와 같은 이미지로 피어난다. 스크린의 환상이 걷힌 후에도 우리는 안개로 가려진 그곳에 누구도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누구나 말하고 싶은 울림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송경원
한양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씨네 21》등에 영화평론 기고. 제14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제 1회 시네마테크부산 비평공모 가작, 제2회 게임비평공모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 sokimera@naver.com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