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역시 달랐다. 장르 영화의 낯익은 특징들을 뽑아내 독창적인 영화를 만드는 솜씨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도 유감 없이 발휘된다. 그의 남다른 연출력은 예술적 성취와 더불어 오락적 만족감까지 끌어낸다. 영화는 시종 웃기고 통쾌하고 지적이고 새롭다. 고전 영화를 재해석한 매 장면들은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한다.
일명 ‘개떼’들이라 불리는 미군 특공대의 엽기적인 활약상과, 나치 친위대에 가족을 잃은 유대인 여인 쇼샨나(멜라니 로랑)의 복수극을 접붙인, 수다스런 영화 〈바스터즈〉는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 같으면서도 영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152분 동안 장르를 희롱하며 영화 역사를 관통한다. 영화에 의한, 영화를 위한, 영화의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를 허물어 만든 새로운 전쟁영화
타란티노는 장르의 예술가다. 장르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장르적 지표를 제시해 왔다. 〈킬빌〉은 일본 야쿠자 영화와 홍콩 무협영화에서, 〈데쓰 프루프〉는 ‘그라인드 하우스’(Grind Houseㆍ동시 상영관을 의미하며 ‘플래닛 테러’와 묶음 상영됐을 때의 제목이기도 함)에서 상영되던 싸구려 B급 영화에서 각각 영화적 틀을 빌렸다.
〈바스터즈〉는 그 경배의 대상으로 스파게티 웨스턴과 갱스터 영화를 택한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옛 영화를 단순복제 하기보다 자신의 색깔을 입힌다. 스파게티 웨스턴과 갱스터의 장르적 특성을 빌러 전쟁영화의 장르적 관습을 부수고 새로운 영화적 재미를 안긴다.
〈바스터즈〉는 ‘옛날 옛적 나치가 지배하던 프랑스에서’(Once Upon A Time In Nazi Occupied France)라는 안내 문구로 시작한다. 조용한 전원에서 한 남자가 도끼로 장작을 패다 멀리서 등장하는 독일군의 모습에 당황하는 장면이 뒤따른다. 눈썰미 지닌 영화광이라면 금새 눈치를 채며 무릎을 칠 것이다. 스파게티 웨스턴(영웅과 악당의 구분이 불분명한 이탈리아산 서부영화)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1929~1989) 감독의 고전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의 한 장면을 복사하듯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말을 타고 등장하던 악당들이 삼륜 오토바이를 탄 나치 일당으로 대상이 뒤바뀌었을 뿐이다.
스파게티 웨스턴 속 사나이들의 비정한 일거수일투족은 한스 대령에게 수렴된다. 그의 냉혈한 기질과 냉소적인 유머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전형적인 ‘나쁜 놈’캐릭터와 맞닿는다. 알도 대위(브래드 피트) 일행이 독일의 한 선술집에서 브리짓(다이앤 크루거)과 접선하다 곤경에 처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정한 장면은 웨스턴의 클리셰를 창의적으로 활용한 경우다.
알도 대위가 이끄는 미군 특공대의 정의롭지만 잔혹한 행각도 영화 광을 미소 짓게 한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며(전설적인 갱 알 카포네가 등장하는 〈언터처블〉을 연상케 한다) 독일군 포로를 심문하거나, 포로의 이마에 서슴지 않고 나치 마크를 단도로 새기는 장면은 어딘가 낯익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위는 거리의 법칙에 익숙한, 선악의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난 도시의 뒷골목 갱들과 다를 바 없다. 인간적인 면모를 최대한 지키려는 전쟁영화 속 정의롭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미군의 모습은 알도 대위 일행에 의해 뒤집어진다. 장르적 규칙에 대한 기대는 초반부터 허물어지고, 관객들은 관습의 붕괴에서 쾌감을 느끼며 이어질 이야기 전개에 한껏 기대감을 뿜게 되는 것이다.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1960~70년대 음악 4곡을 사용한 점도 〈바스터즈〉의 정체성을 명확히 한다. 음악 선곡에 있어선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며 누군가에게 음악을 맡기는 것조차 꺼려하는 타란티노답지 않은 행보다. 스파게티 웨스턴과 모리코네에 대한 오마주가 동시에 엿보이는 대목이다. 모리코네는 〈옛날 옛적 서부에서〉와 〈석양의 무법자〉(역시나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표작이다), 갱스터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에서 레오네 감독과 짝패를 이뤘다.
복수극에 담은 영화의 역사
타란티노의 전작 〈킬 빌〉 〈데쓰 프루프〉 등과 마찬가지로 〈바스터즈〉도 복수를 이야기한다. 현대사를 끌어안아 복수의 스케일을 키우고 이야기의 폭을 더욱 넓힌 점이 다를 뿐이다. 여기에 〈바스터즈〉는 영화에 얽힌 당대의 이야기를 담아 영화광의 흥미를 부추긴다.
쇼샨나가 운영하는 파리의 영화관은 독일 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의 영화를 상영한다. 리펜슈탈이 누구인가. 나치의 전당대회를 담은 〈의지의 승리〉와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기록한 〈올림피아〉로 이름이 드높았던 당대의 다큐멘터리 감독 아닌가. 나치의 적극적인 협력자라는 의심뿐 아니라 히틀러의 연인으로까지 여겨졌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아무리 나치 치하의 파리라지만 쇼샨나가 리펜슈탈의 영화를 상영한다는 설정은 다소 의아할 수 밖에 없다. 독일군 졸러(다니엘 브륄) 일병이 “프랑스는 역시 감독들을 사랑해”라고 말할 정도다. 파리가 나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영화관은 당대 독일의 또 다른 명감독 게오르크 빌헬름 파프스트(1895~1967)의 영화를 동시 상영한다. 파프스트는 나치가 정권을 잡자 프랑스로 도피를 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유대인 박해문제를 다룬 〈심판〉 등을 만들었다. 독일인이면서도 반 나치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쇼샨나는 파프스트의 영화 상영을 통해 은근히 반 나치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역사를 통해 캐릭터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한마디도 귀 기울여 볼만 하다. “나치 선전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독일 영화 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끌었다”는 보고를 받자 처칠은 이죽거린다. “어디 그렇다고 루이스 B 메이어를 따라 갈까.”메이어는 미국의 유명 영화사 MGM을 공동 설립하며 당시 할리우드를 주름 잡았던 유대인이다. 유대인을 탄압하는 독일인이 유대인을 능가하지 못함을 비꼰 것이다. 히틀러 암살을 위해 파견되는 아치(마이클 패스벤더) 대위의 전공이 독일 영화로 설정된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지점이다.
영화 속에서 괴벨스가 쇼샨나에게 “세계 최고의 배우”라고 소개하는 에밀 야닝스(1884~1950)의 등장도 흥미롭다. 미국에서 태어난 그는 독일에서 배우가 되었다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27년 〈육체의 길〉로 아카데미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후 나치 선전영화에 출연하며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의 전력을 일별하다 보면 극장에 갇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그의 모습에서 묘한 통쾌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의 백미는 무엇보다 쇼샨나가 그의 영화관에 집결한 나치 수뇌부를 필름을 태워 몰살하려는 장면이다.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인화성 강했던 당시의 필름이 다이너마이트에 버금가는 위험 물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타란티노 감독은 나치라는 20세기 최고의 악에 영화로 일조한 자들을 그렇게‘영화’로 단죄하려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정의로운 단죄를 받을 기회를 원천 봉쇄했던 히틀러에게 한아름의 총탄을 안겨주며 필름으로 그 물리적 존재까지 지우려 한다. 아주 잔인하면서도 아주 통쾌하게 전복적으로 타란티노는 역사적 복수극을 단행하는 것이다.
아무 제한을 두지 않고 거침없이 영화적 쾌감을 향해 달려가는 이 영화, 임진왜란의 수모를 씻으며 조선 민초들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고 싶어했던 〈임진록〉의 오락적 기능을 떠올리게 한다. 극영화라는 픽션은 그렇게 선정적인 거짓말로 대중의 입맛을 노리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제작비 7,000만 달러의 4배가 넘는 3억 1,358만 달러를 벌어들인 이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 낯익은 소재를 낯선 화법으로 전달하면서 예술적 영감까지 자극한다.
단지 장르를 허물고 영화 역사를 인용한다고 모두 명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스터즈〉는 새롭고 새로운, 전쟁영화 아닌 전쟁영화다. 영화사에 굵은 방점을 찍을 만하다. 이런 영화라면 박수 한번 크게 쳐줄 만하지 않은가.
라제기 1999년《한국일보》에 입사해 편집부, 문화부, 사회부에서 근무. 문화부 대중문화팀에서 영화 기사를 3년째 쓰고 있으며 영화 칼럼 ‘시네마니아’ 연재중임. wenders@hk.co.kr
* 『2010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