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문학에서의 이순신 논의와 반례로서의 『칼의 노래』
[이순신] 문학에서의 이순신 논의와 반례로서의 『칼의 노래』
  • 허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4.01.02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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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문학에서도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이우혁의 판타지 소설 『왜란종결자』(1998)와 싱숑의 웹소설 『전지적 독자시점』(2018-2020) 등 대중 서사에서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이순신까지 포괄하면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이럴 때 방도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와 계보를 설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최원식은 이순신 서사의 기원으로 신채호의 『수군제일위인 이순신』(1908)을 꼽는다. 이후 그는 홍명희의 『임꺽정』(1928-1939)에 출현한 이순신을 분석하고, 다음으로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1931), 이광수의 『이순신』(1931-1932), 박태원의 『임진조국전쟁』(1960),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69), 김지하의 『구리 이순신』(1971), 김탁환의 『불멸』(1998), 김훈의 『칼의 노래』(2001) 등을 검토한다. 그리고 이를 요약하면서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내용을 덧붙였다.

“대한제국이 일제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20세기 초에 국권 회복의 메타포로 선택된 이순신은 일제 강점기에는 민족해방의 상징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민국가 건설의 영웅으로 들어 올려졌다. 그런데 이 저항 서사가 특히 박정희 시대에 노산 이은상의 부용으로 개발독재의 체제 서사로 전환된 것이 통렬하다면 통렬하다. 이순신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에서 이탈한 자신을 변호할 속셈을 갈무리한 춘원의 『이순신』이 그 기원일 것인데, 마침 박정희가 그 애독자라고 전해진다. 영웅주의에 대한 근본적 해체를 꼼꼼히 수행한 공임순은 춘원에서 박정희를 거쳐 김훈에까지 드리운 이 경향이 ‘이순신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박해받는 수난자로 자리매김’하는 심리적 기제에 의거하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1 국문학 배경지식을 요하나 언설의 핵심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시대에 따라 달리 수용되었다는 것(“일제 강점기에는 민족해방의 상징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민국가 건설의 영웅으로” 표상),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도하게 이어지는 박해받는 영웅 이미지의 반복과 (남성) 작가 자신의 동일화(“‘이순신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박해받는 수난자로 자리매김’하는 심리적 기제”) 현상이다. 이미 문학계에서 두 가지 면은 여러 차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성스러운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내면을 초점화했다고 상찬받은 김훈의 『칼의 노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게 읽힐 만한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다. 책 머리에 김훈은 이렇게 쓰고 있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2

“세상과 작별하”고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혼자서 살 것”이라고 다짐하는 그의 언사를 염두에 두자. 그러면 『칼의 노래』가 어째서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부터 시작하는지 유추할 수 있다. 이순신에 관한 역사적 전기가 아닌 오직 소설로만 읽히기를 바란다는 ‘일러두기’의 당부도 그러하다. 그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충성을 바치던 존재(임금)에게 도리어 미움받고, 고독하게 적과 대치할 수밖에 없던 이순신을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던 김훈이 의탁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 작품의 1인칭 시점은 이러한 혐의를 더욱 강화한다. 사실상 이것은 이순신=김훈의 도식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독법이 가능하다고 해서 『칼의 노래』에 그려진 이순신 재현이 전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다음의 문장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목이야 어디로 갔건 간에 죽은 자는 죽어서 그 자신의 전쟁을 끝낸 것처럼 보였다. 이 끝없는 전쟁은 결국은 무의미한 장난이며, 이 세계도 마침내 무의미한 곳인가. 내 몸의 깊은 곳에서, 아마도 내가 알 수 없는 뼛속의 심연에서, 징징징, 칼이 울어대는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 울어지지 않는 울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불덩어리가 내 몸 깊은 곳에서 치받고 올라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방책, 아아 방책. 그때 나는 차라리 의금부 형틀에서 죽었기를 바랐다. 방책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3 어떠한 상황에서든 나라와 민족을 앞세운 위인이 아니라 속울음을 삼키는 초라한 사내의 모습이 여기 있다. 지금까지 나는 어떠한 작품에서도 『칼의 노래』와 같이 만사 회의적이고 삶에 무상함을 표하는 이순신을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를 이순신에게 “소시민의 옷을 입힌 것”4이라고 손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을 다루는 모든 문헌─역사, 전기, 문학이 이미 이순신의 위대성에 합의하고 있으며 이것은 조선 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구축된 ‘영웅’ 이순신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순신 형상이 “새롭게 태어날 길이 막혀” 있다는 진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5 이는 오히려 『칼의 노래』를 위시하여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개별 텍스트의 독자성을 섬세하게 독해하지 못했다는 필자의 아픈 고백으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순신 관련 저작에 스민 영웅주의를 비난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이순신이 영웅이라는 사실과, 이순신을 통해 대중을 배격하는 영웅주의를 설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이순신에 대한 작가의 심정적 일체화 역시 무조건 폄하할 만한 성질로는 볼 수 없다. 관건은 작가가 이순신을 어떻게 세련되게 묘파하고 모던하게 주제화하느냐이다. 『칼의 노래』와 반성 없는 민족주의에 경도된 충효의 화신 이순신 상을 되풀이하는 문학이 드러내는 본질적인 차이처럼.

 

 


1 최원식, 『이순신을 찾아서』, 돌베개, 2020, 15-16쪽.
2 김훈, 「책 머리에」, 『칼의 노래 1』, 생각의나무, 2003.
3 위의 책, 17-29쪽.
4 윤진현, 「1970년대 역사 소재극에 나타난 담론투쟁 양상: 이재현의 「성웅 이순신」과 김지하의 「구리 이순신」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 26집, 2004, 58쪽.
5 위의 논문, 59쪽.

 

 


허희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2012년 문학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해 글 쓰고 이와 관련한 말을 하며 살고 있다. 2019년 비평집 『시차의 영도』를 냈다.

 

 

* 《쿨투라》 2024년 1월호(통권 11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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