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희경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가 작가 기획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서정시의 한 양식인 현대시조를 통해 기억의 과정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우리 시조시단의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과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문학도시》 편집장과 《어린이시조나라》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에도 선정될 정도로 좋은 시조를 창작해왔다.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부산시조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시조집으로 『지슬리』 『빛들의 저녁 시간』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미나리도 꽃 피네』, 평론집으로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 등의 저서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는 그동안 망각했던 것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기억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때 시인에게 ‘시조’라는 정형 양식은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는 단정한 그릇이요, 내밀한 심정 토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음악이요, 가감 없이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게 해주는 섬세한 기록으로 거듭나게 된다.
정희경 시인은 “미나리로 대변되는 작고 여린 것들도 오래 두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다.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고 일어설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어떤 물리적인 힘도, 권력도 가하지 않고 그냥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럼 이 땅의 작고 힘없는 것들, 밟히고 베이는 것들도 꽃피는 번영의 시간이 꼭 올 것이다. 내가 시조로 그들을 응원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이처럼 정희경의 이번 시조집은 그가 아프게 통과해 온 시간에 대한 재현의 순간을 담으면서 지금도 소용돌이치는 인상적인 장면들에 자신의 열정을 헌정하는 속성을 견지한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삶의 내력을 회상해가는 성격을 띠면서 자기 성찰에 오랜 시간을 바쳐가는 언어적 결과물로 다가온다. 우리는 이번 시조집을 통해 정희경 시인이 일상의 소소한 결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투시하는 과정에 흔연히 동참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법한 이법을 담아내는 데 남다른 적공을 들이는 시인의 시선은, 오랜 시간 쌓아온 연륜이 묻어나는 미더운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생명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표현을 구축해간다.
흰 물결 출렁이는 팔월 뭇별들이 내렸나
발목을 물에 담근 베인 자리 싹이 올라
속 비운 투명의 피 초록의 저 몸부림
기다림 흰 꽃으로 피네 미나리도 꽃 피네
- 「미나리도 꽃이 핀다」 부분
시조집의 표제를 품고 있는 이 낭송 지향의 시편은, 둔덕 가득 피어 있는 개망초와 여름밤 별들의 흰 물결처럼 핀 미나리 꽃을 바라본 시인의 황홀한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고백 앞에서 우리는 강인한 생명의 모습과 그것을 투명한 삶의 비의로 전환시키는 시인의 필치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참외’나 ‘미나리 꽃’ 같은 자연 사물을 통해 다양한 미학적 파문을 그리면서 자신의 시조 안에 생명 현상에 대한 해석과 기억의 인화印畫를 든든하고 은은하게 이루어간 것이다.
서 있는 소들처럼 막사는 버티었다
팔려가지 않으려고 힘을 준 다리 기둥
벽면에 소들의 울음 펄럭이고 있었다
- 「소막마을」 부분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수탈되어 가는 소를 위해 지은 소막사를 한국전쟁 때 피난민 주거지로 사용하면서 형성된 이름이다. 막사는 팔려가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다리에 힘을 준 소들처럼 오랜 세월을 버텼고, 그 벽면에는 “소들의 울음”이 아스라하게 펄럭이고 있다.
이처럼 정희경 시인은 우리 삶 곳곳에 배인 폐허와 불모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역동성을 희원하는 역설의 시편들을 써간다. 삶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투시하는 공공적 기억을 통해 언어 생성을 통해 존재 생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의 동일성에 지속적 영향을 끼치는 원초적인 힘이 되어주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적 울림을 새겨가는 기록자로서의 의지를 가지게끔 해준 것이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는 “정희경의 시조를 눈으로 보면 단정한 한글로 공들여 쌓은 탑 같은 ‘글맛’이 보인다”며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느껴지는 ‘말맛’은 마음을 흔든다.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며 희로애락을 건드리는가 하면, 온 바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덮치듯 크고 깊은 감동에 빠뜨리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유성호 교수는 “정희경의 시조는 현실에 근접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적 꿈의 세계를 마련하여 그 경계선에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세계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전해진 회감回感의 정서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서정 양식의 핵심 기율을 여지없이 충족하게 된다.”고 평한다.
흰 꽃으로 피어난 미학적 기억의 울림을 담아낸 이번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는 최근 한국 시조시단이 거둔 최량의 사유와 감각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진정한 위안과 치유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정희경 시인의 쓸쓸하면서도 그윽한 메타포가 느껴지는 시조의 숲으로 스며들어보자.
* 《쿨투라》 2024년 8월호(통권 122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