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역사는 많은 누적에 의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특정한 상황을 계기로 도약할 수도 있다. 과학적 지식의 진보가 누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비연속적’으로 다른 단계에 진입한다는 가설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의 ‘패러다임’ 이론으로 알려진 바가 있다. 한강 작가의 수상은 그동안의 한국문학과 한국문화가 쌓아온 저력의 결과이겠지만, 지금 경험하는 것은 이 예외적인 사건을 통해 한국문학의 패러다임이 바뀐 상황, 한국문학의 급격한 ‘시간이동’이다. 우리는 이제 그 돌연한 시간대에 적응해야만 한다.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에 존재하던 ‘시차’가 존재한다는 감각은, 한국문학의 주변부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한국문학은 ‘한국어 문학’일 수밖에 없고 한국어 문학의 시장은 너무나 협소하다. 인구 숫자의 한계에 더해서 독서 인구 역시 상대적으로 적어서, 한국어 문학 시장은 구조적으로 주변부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문학 시장의 협소함은 한국문학 내부의 양극화를 만들고 다양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국어 문학이 세계문학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번역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며, 그 기간 역시 짧지 않다. 이를테면 한강의 『채식주의자』(2007)가 세계문학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6년으로 10년의 시차가 존재한다. 이 상징적인 시간, 그러니까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적어도 ‘10년’의 시차가 존재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시차는 한국문학이 보편적인 세계문학의 장에서 떨어져 있는 공간적·시간적 거리 감각에 속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이 시차와 거리 감각에 엄청난 파열을 만들었다. 이제 한국문학의 시간은 세계문학의 시간과 거의 동시간대에서 흐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한강의 신작이나 한국문학의 매력적인 작가의 작품은 시차 없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세계문학의 장과 한국문학장에 가하는 충격은 적지 않다. 『채식주의자』가 부커상 수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한강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익숙한 문법의 대중적인 작품도 아니었다. 한강의 문학은 독특하고 어쩌면 ‘비주류’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국문학이 근대의 출발 이후 ‘남성-이성애자’를 문학의 주체로 상정해온 역사는 오래되었다. 한국문학의 재래적인 정전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의 것이다. 한국의 여성문학은 80년대 이후 가부장적 상징질서를 돌파하는 보다 파괴적인 언어들을 생산해왔고,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는 한국문학과 문학사 전체를 근원적으로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문학의 흐름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세계문학의 중심이 아시아의 여성 언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최근 몇 년간의 흐름이었다. 아시아 여성은 지역적으로 그리고 젠더적으로 이중으로 주변화되어 있어서, 세계문학에서 아직 평가받지 못했던 인간과 역사에 대한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계기들이 한국문학의 중심에서 약간 비껴나 있었던 한강을 세계문학의 중심 무대에 세워주었고, 이것은 다시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예외적인 에너지가 될 수 있다.
한강의 독창성의 가장 큰 부분은 ‘성숙한 남성의 서사’로 상징되는 재래적인 소설 장르의 규범을 완전히 넘어선다는 것이다. 시와 소설의 제도적 구분과 장르규범은 서구 근대 장르 개념에서 시작된 것이고, 이것은 본래적인 것도 진리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차원에서 이런 장르 개념은 사실 무의미하다. 노벨문학상 발표에서 많이 언급되는 표현은 “혁신적인 시적 산문”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적확한 논평이겠지만, 문학에 대한 모든 논평이 그런 것처럼 완전하지 않다. 한강은 1993년 《문학과사회》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바로 다음 해에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었다. 초기 활동은 단편소설에 집중되었고, 그 작품들은 창작집 『여수의 사랑』(1995)에수록된다. 그의 시들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2013)에 묶인 것은, 등단 20년 후 5권의 장편과 중편이 출간된 뒤의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한강 작가의 문학적 여정은 ‘시’를 잃어버리고 소설의 세계에 집중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반대의 관점도 가능할 수 있다. 작가는 계속해서 시적인 글쓰기를 진행해왔다고 말이다. 유럽에 아직 한강 작가의 시집이 번역되지 못했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면모가 덜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어쩌면 ‘혁신적인 시적 산문’이라는 논평의 ‘불완전함’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강의 거의 모든 소설들은 시적인 은유와 도약과 환상으로 가득하다. 이를테면 시 「어느 저녁 나는」에서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으로 보고” “무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고” 문득 알게 되는, 이 기습적인 상실감과 애도의 순간은 소설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여수의 사랑」의 도입부 “여수, 그 앞바다의 녹슨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에 등장하는 여수라는 이미지는 상실의 근원지이며, 귀향의 충동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 행위이다. 『채식주의자』에서 가부장적폭력에 저항하는 여성적인 존재가 식물로 변신하는 설명되지 않는 환상이나, 『소년이 온다』에서 죽은 소년의 목소리가 문장으로 발화되는 것은 재래적인 소설의 규범 안에서 설명될 수 없다. 한강 장편의 또 다른 절정인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시작과 끝,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억의 탐색에는, 우주의 신비와 생의 기원을 둘러싼 압도적인 물리학적 이미지가 등장한다.
본 기사의 전문은 추후 공개됩니다.
이광호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서울예술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문학과지성사 대표.
저서로 『익명의 사랑』 『시선의 문학사』 『너는 우연한고양이』 『장소의 연인들』 『작별의 리듬』 등이 있음.
* 《쿨투라》 2024년 11월호(통권 125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