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월평] 다크 히어로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지옥에서 온 판사〉
[드라마월평] 다크 히어로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지옥에서 온 판사〉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4.10.3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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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다크 히어로의 원조격인 드라마 〈열혈사제〉가 방영된 이후, 수십 명의 다크 히어로가 맹활약을 펼치며 대한민국 자정 작업에 들어갔다. 〈빈센조〉, 〈모범택시〉, 〈지옥〉, 〈비질란테〉…. 안타깝게도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악화하고 있다. 이제는 판사도 법정 밖에서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 “정의는 개나 줘버려!”

SBS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 첫 회는 판사 강빛나의 억울한 죽음으로 시작한다. 공원에서 의문사를 당한 강빛나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유스티티아에 의해 살인자들의 교도소로 보내진다. 강빛나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판결을 내린 유스티티아의 오판. 자신의 잘못을 책임지기 위해 유스티티아는 인간 세상으로 추방돼 다시 살아난 강빛나의 몸에 깃들어 미션을 수행한다.

1년 동안 살인자 10명의 영혼을 지옥으로 보내야 한다. 강빛나는 일부러 가벼운 처벌을 내려 범죄자들을 세상에 풀어준 다음, 다시 범죄자를 찾아가 저지른 죄를 경험하게 하는 '함무라비 법전'식 처벌을 내린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폭력에는 폭력, 분노에는 분노. 그렇게 시작된 판사 강빛나의 사적 복수.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없다. 대신 ‘악마’ 유스티티아가 있다. 두 눈을 가리고 검과 저울을 들고 있는 유스티티아의 동상 앞에서 강빛나는 거침없이 말한다. 나쁜 사람이랑 술래잡기하려고, 쫓아가서 칼로 썰어버리려고 저러는 거라고. 그녀는 판사복을 입고 법의 권위와 공정성을 사정없이 짓밟는다.

‘착한 사람은 행복하고 나쁜 사람은 벌 받는 건데, 이 세상에 정의는 없다’고 외치는 ‘악마 재판관’ 유스티티아. 15분 가까이 이어지는 화려한 액션씬, 아니 무자비한 폭행씬. 〈지옥에서 온 판사〉는 강빛나를 연기한 배우 박신혜의 연기 변신으로 화제를 모았다. ‘착하디착한 국민 여동생’까지 주먹을 휘두르고 발차기하며 흑화할 정도라면 대한민국의 정신 건강은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는 것이 확실하다. 도대체 공권력과 법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실망이 얼마나 깊은 것일까.

 

히어로는 어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노 웨이 아웃: 더룰렛〉은 ‘연쇄살인범의 목숨에 누군가 200억 원의 현상금을 걸고 살인 청부를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위험한 발상에서 비롯된 문제작이다. 대국민 살인 청부, 5,000만 대한민국 국민에게 공개적으로 살인을 의뢰한 것이다.

범죄수사물은 경찰이나 형사가 주인공이다. 수사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 그래서 주연 배우는 수사관 역할을 맡기 마련이다. 그런데 드라마 〈노 웨이 아웃: 더룰렛〉은 형사 백중식의 대척점에 있는 연쇄살인범 김국호에 힘을 크게 실어준다. 모든 스토리의 중심에 영웅이 아니라 빌런이 있고,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발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드라마의 중심축이 연쇄살인범 김국호에게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 정의가 없는데, 정의를 구현하는 히어로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대한민국이여, 흑화하라.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꾸만 환청이 들리는 듯하다.

 

희대의 흉악범 김국호. 피해자 9명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지만 김국호가 받은 처벌은 고작 징역 15년. 그것도 교도소 안에서 모범수로 선정돼 13년 만에 다시 사회로 나오게 된다. 교도소에서 죗값을 치렀으니 잘못한 게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쇄살인범 김국호, 그의 앞에서 분노와 절망이 가슴에 한가득 쌓이는 것은 당연지사. 법적인 처벌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국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성도 교화도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노 웨이 아웃: 더룰렛〉의 김국호는 지금 여기의 대한민국이 처한 윤리적 딜레마를 보여준다. 일사부재리 원칙. 일단 처리된 사건은 다시 다루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적 복수로 두 번 죗값을 치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라는 김국호의 항변은 정당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즘 드라마에서 ‘법대로’ 하자고 요구하는 건 수사관이 아니라 범죄자들이다. 법을 제일 잘 아는 것도 오히려 법과 가까운 범죄자들이다.

극중 김국호는 “악마 같은 새끼”로 불린다. 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딱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공개청부살인으로 언론을 비롯해 많은 사람의 이목이 김국호에게 쏠린 상황에서 사회 질서와 안녕을 위해 경찰은 김국호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라고 한다. 이때 김국호는 경찰과 협상을 시도한다. 사과문을 읽는 조건으로 초밥을 사달라고.

도대체 누굴 위한 사과문인가, 드라마를 보면 혈압이 확 오르는데, 분노의 절정은 그다음 장면에서 나온다. 사람들 앞에서 사과문을 읽으면서 오열을 하는 김국호. “남은 삶을 고통 속에서 지옥 속에서 살겠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던 표정을 싹 지우고 “내가 뭘 잘못했냐”며 뻔뻔하게 거들먹댄다. 이래서 ‘연기 장인’ 배우 유재명을 캐스팅한 거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

드라마 〈지옥에서 온 판사〉와 〈노 웨이 아웃: 더룰렛〉의 세계관 통합을 통해 ‘진짜 악마’와 ‘악마 같은 새끼’를 만나게 해주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악마(같은 새끼)에게는 진짜 악마.

전조 현상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조 현상이 있다. 하루 전날 번개가 친다거나 두더지와 지네 같은 동물들이 갑자기 자기 거주지를 벗어나 어디론가 이동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옥에서 ‘악마’가 오고, 땅에서 ‘악마 같은 새끼’가 활개를 치기 전에, 그러니까 대한민국이 지옥보다 못한 최악의 악에 처하기 전에, 이미 전조 현상이 있었다. 바야흐로 1년 전, 2023년 11월 가을이었다.

너무나도 정직한 제목을 가진 디즈니 플러스 시리즈 〈비질란테〉. 비질란테라 쓰고 다크 히어로라고 읽는다. 비질란테는 제도 안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범죄와 범죄자를 제도 밖의 방식으로 응징하고 해결하려는 사람, 한 마디로 다크 히어로란 뜻이다. “법에는 구멍이 나 있다. 내가 그 구멍을 메우겠다. 이게 정의다.” 주인공 김지용은 법이 응징하지 못한 범죄자들의 죗값을 받아내겠다며 육체적인 폭력으로 그들을 응징한다. 그리고 그 현장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모든 범죄자에게 경고장을 날리듯 말이다.

악질적인 범행을 저지르고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아동성범죄자 정덕홍에게는 벽에 피로 반성문을 쓰게 한다. 천망. 도덕경의 말로, 범인을 잡기 위해 하늘이 그물을 놓았다는 뜻이다. 악인은 결국 잡힌다, 즉 인과응보다. 김지용은 자신의 행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낸다. 법이 외면하고 은폐한 ‘인과응보’를 세상에 알린다. 과연 법의 처벌이 합당했는가. 피해자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쳤다고 원망하면서 법 조항을 뻔뻔하게 들먹이는 범죄자들에게 ‘비질란테’ 김지용은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이제부터 널 풀어준 법을 원망해라.”

 

우리는 어디로

드라마 〈비질란테〉의 김지용은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 가족이다. 무자비한 폭행으로 어머니가 사망했고 어린 지용은 그것을 직접 목격했다. 피해자 가족이 다크 히어로가 되었다는 점에서 〈비질란테〉는 사적 복수를 하는 다크 히어로물과 유사한 전개를 보인다. 다른 다크 히어로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김지용의 신분이다. 경찰대 학생.

경찰이란 누구인가. 범죄자의 교화를 믿어야 하는 사람이다. 교화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가르치고 이끌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다. 사람의 개선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화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것이다. 산산이 조각난 것이다. 무엇보다 김지용은 아직 학생 신분이다. 우리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다음 세대. 대중의 실망과 절망이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미래까지 잠식했다는 생각에 드라마를 보는 동안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다크 히어로가 등장할 때는 범죄자와 쫓고 쫓기는 추적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드라마 〈비질란테〉에서는 오히려 경찰과 쫓고 쫓기는 추적을 한다. 드라마의 주요 대립 구도가 범죄자와 다크 히어로가 아니다. 경찰과 경찰. 미래의 경찰과 오늘의 경찰, 법의 영역 안에 있는 경찰과 법의 영역 밖에 있는 경찰이다. 그리하여 다크 히어로와 다크 히어로를 잡고자 하는 경찰이, 오늘의 경찰과 미래의 경찰이, 오늘의 절망과 미래의 절망이 대립하고 충돌한다. 이제 교화는 없다. 오히려 가해자들이 반성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고맙다. 개새끼로 남아 있어 줘서.” 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 귀여운 ‘강아지’에게 대신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 ‘개(의)새끼’가 무슨 죄가 있다고.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중.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문화평론집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외 다수가 있음.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 수상.

 

* 《쿨투라》 2024년 11월호(통권 12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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