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드라마 〈대명〉의 강렬했던 캐릭터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했을 때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렸다. 그의 장편을 읽었던 나는 그 치욕스런 굴욕의 역사가, 훔치고 싶었던 그의 감각적 언어들이 어떻게 영상의 옷을 입고 재탄생할지 기대되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시절 온가족이 시청했던 대하드라마 〈대명〉(kbs1 1981.1.5~12.28)이 떠올랐다. 1년 동안이나 방영되었던 그 대하역사를 어떻게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 담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당시는 신군부를 등에 업은 전두환 집권 초기였지만 어린 나는 비운의 왕자인 소현세자(백윤식)보다 아우인 봉림대군 효종(고 김흥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리고 서로 다르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두 충신 최명길(김성원)과 김상헌(임동진)에게 매혹되었으며, 둘 중에서도 최명길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지금도 ‘병자호란’을 떠올리면 드라마 〈대명〉이 생각나는 것은 어린 마음마저 송두리째 흔들던 봉림대군과 최명길의 강렬했던 극중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원작과 설전을 넘어 협력으로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침략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47일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왕, 그 앞에서 벌어지는 두 충신의 대립, 그리고 흔들리는 조선의 운명 앞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통찰력 있게 담아낸 작품이다. 김훈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출간 10년만에 100쇄를 기록(70만부 판매)한 이 베스트셀러가 황동혁 감독에 의해 스크린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김훈이 "소설로 표현하고자 했던 의도를 영상으로 잘 표현했다”고 밝혔듯 이 영화는 그 혹한의 겨울과 함께 원작의 깊이를 담아내려고 노력했고, 이를 고스란히 스크린에 옮겼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짙은색 옷을 입은 최명길(이병헌)은 청의 군대를 앞에 두고 아무런 미동도 없다. 바로 앞에 그를 위협하는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지만 담담하게 청의 진지로 들어가 죽음을 불사한 협상을 시도한다. 연이어 등장하는 김상헌(김윤석)은 자신을 남한산성 길로 안내해준 뱃사공이 청에게도 길을 알려주겠다는 말에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인다.
이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를 시작으로 영화는 책장을 한 페이지씩 넘기듯 챕터를 나누며 펼쳐진다.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은 죽기를 각오하고 맞선다. 김상헌은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자 최명길은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백성과 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임금의 일이라고 논박한다.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목을 내놓고 왕에게 진언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의명분 앞에서는 기꺼이 힘을 합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설전은 살벌한 적대감이 넘치는 한편 상대의 인격을 깊이 존중하는 모습 또한 보인다. 최명길은 스스로를 역적이라 칭하면서 조정에 복귀한 후 김상헌을 중용할 것을 인조에게 간청한다.
이 대목은 과히 감동적이다. 우리가 살아갈 인공지능시대의 덕목은 협력이라고 하지 않는가?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대의명분 앞에서 기꺼이 힘을 합치는 그들에게서 오늘날 우리 정치는 겸허히 배워야 할 것이다.
원작이 그러하듯 극중에서 연출자는 그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해답 없는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받았기에 때문에 누가 옳고 그르다거나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없다. 그대로의 역사를 보여주며 오로지 관객에게 판단을 유보한다.
“작품 뒤에 감춰둔 메시지를 감독이 끌어내 언어화했다. 결국 들켰다"(김훈)는 고백처럼 남한산성의 혹독한 겨울이 곳곳에 표현되고 있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관객들 또한 숨소리도 내지 않고 화면을 응시했다. 아마도 오늘의 현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스크린 속 과거의 역사가 너무나 소름 돋았기 때문일 것이다.
〈남한산성〉을 이끄는 캐릭터들, 김윤성의 재발견
영화 〈남한산성〉을 끌고 가는 동력은 단연 이병헌과 김윤석이라는 두 걸출한 배우이다. 화친파와 척화파의 선봉으로 나선 두 사람은 영화(소설) 속 캐릭터 그 자체다. 극중 캐릭터뿐 아니라 연기 또한 두 배우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맞서며 대결구도를 끌고나가서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유지되면서도 안정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병헌은 사극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한 번 더 입증했다. 그의 굵직하면서도 허스키한 저음은 역사 속 난세에 처해있던 최명길의 환생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더 빛나는 배우는 김윤성이다. 사극에서의 그를 상상할 수조차 없었는데, 그간의 늘 비슷한 연기 이미지로 진부함을 선사했던 그가 모처럼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열연했다. 하염없이 나약하고 따뜻한 캐릭터 뒤에 숨겨진 그의 올곧으면서도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스크린 밖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남한산성〉이야말로 김윤성 배우의 재발견이었다.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는 대장장이 날쇠(고수)일 것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아낸 백성 대표로 그가 맡은 역할의 비중은 물론 내용 또한 감동적이었다. 또한 조선의 노비로 태어나 청의 관직에 오른 역관 정명수(조우진)는 청과 조선을 연계하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하며 극의 팽팽한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가장 무능하다는 조선의 왕 인조 역은 박해일이 맡았다. 그래서일까?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분노가 치밀지는 않았다. 원작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왕의 무능함보다는 신하들의 갈등을 주요인으로 삼은 이유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역할을 순한 인상의 박해일이 맡은 것이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외에도 김상헌의 칼에 쓰러진 송파나루의 뱃사공, 적진을 뚫고 안개처럼 산성에 스며든 어린 계집 나루 등 소설 『남한산성』의 상징을 톺아보는 민초 캐릭터들은 주연 못잖게 흥미롭다.
팩트와 픽션을 뛰어넘는 시사점
선조시대 전쟁영화 〈명량〉(김한민)은 200억 원을 투입해 6배 수익을 올리는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그런 만큼 인조시대 전쟁을 바탕으로 한 〈남한산성〉 역시 성공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제작비 150억 원의 손익분기점인 500만 명에 못 미치는 385만 명 관객이 들었다.
작가 김훈은 “이 책은 소설이며, 오로지 소설로만 읽혀야 한다”고 전제한다. 아울러 “실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는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하지만 영화에서 논리적인 두 충신의 대결에 현대사를 중첩시켜 본 사람이 아니라면 〈명량〉만큼 전투신이 화려하지도 않고 전쟁 속 휴머니즘과 로맨스도 부족한 스토리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을 것이다. 또한 청군의 잔혹함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청군은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시체가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뤘다.”고 전한다. 임금과 대신은 항복하고 살아남아 계속 자리를 보존하는 동안 청에 끌려간 수십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겪은 고통은 죽음보다 더 잔혹했던 것이다. 그래서“경들은 저 너머 겨울 들판이 뵈는가? 나는 보이지 않는다”는 인조의 말이 더 처절한 리얼리티를 형성한다.
척화파 김상헌의 최후를 비롯하여 원작과 조금 다른 부분도 간혹 있지만 영화는 고증에 철저했고 진중하게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류이치 사카모토 감독의 음악, 배우들의 명연기까지 더해져 구성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관객평은 호불호가 갈렸지만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영상미, 절제된 연출, 김윤석·이병헌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등 충분히 영화전문가들이 호평을 쏟아낼 만한 영화였다. 두 주인공의 팽팽한 설전을 넘어 대의 앞에서는 함께 협력을 도모하는 설정만으로도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 주요한 시사점을 던졌다고 본다.
손정순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과 저서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 서정시』, 『목월시의 현대성』 『문화현장에서 통섭적 글쓰기』 등이 있음. 《쿨투라》 편집인. more-son@hanmail.net
* 『2018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