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하면서도 우연한 순간을 기록하다

아이러니스트가 조명하는
‘진짜 우리만의 영화’
- 양진호 영화평론집 『아이러니스트, 영화관에 가다』
영화평론가 양진호가 데뷔 5년 만에 출간한 평론집
영화평론가 양진호는 1985년 서울 출신으로,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19년 《쿨투라》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B급 장르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중시나리오학과에서 영화 비평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아이러니스트, 영화관에 가다』는 영화평론가 양진호가 다양한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론 17편을 묶어 펴낸 영화평론집이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와 영화이론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가 언급한 ‘우연성’이라는 개념을 좋아하는 저자는 가장 평범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영화적 통찰들을 발견해나가는 이들의 감각을 비평에 담고자 노력해왔다. 그래서 저자는 영화를 최대한 대중예술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데 집중해왔다. 2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에는 현장비평가로서 영화를 충실하게 읽어낸 비평들이 담겨 있으며, 2부에는 저자가 특별히 더 관심을 기울이는 스릴러나 판타지 등의 장르영화에 대한 비평들이 수록되어 있다.
주말보다 평일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양진호 평론가는 영화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좋아한다. 그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세계적인 영화제 수상작, 혹은 1천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보다는 관객들의 마음을 세심하게 읽어내고 말을 건네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찾아낸다.
서문에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자기만의 방식의 삶의 번뜩이는 순간을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사람들”을 ‘영화적 아이러니스트’로 호명하는 저자는 진리에 의해 구성된 거대서사 속에 엉뚱한 어휘들을 적극적으로 끼워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관객들과 영화인들을 떠올리며 영화비평들을 써왔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세련된 영화적 이미지들을 통해 재현되기도 하지만, 오래전에 찍어 두었던 사진 속에 담긴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언가로도 포착된다. 저자가 영화 속에서,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보는 관객의 내면에서 읽어내려고 한 것은 영화적 우연성이다. “어른들에게 배웠던 많은 것들이 나와 상관없는 무언가가 되는 텅 빈 공간”인 영화 혹은 영화관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혹은 잃어버렸던 것과 만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양진호의 영화비평집에 담긴 비평들은 동시대인들의 다양한 문제를 키워드로 삼되, 그것이 ‘평범한’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되거나 인식될지에 대한 고민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술과 역사 사이에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랑의 서사에 대해 다루는 영화 〈운디네〉, ‘장애인 대 사회’가 아니라 ‘장애인 대 장애인’의 대립 서사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구체성을 그려 나간 영화 〈복지식당〉, 시대를 거슬러 올라 ‘살아남은 영화만이 당신의 영화가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90년대의 장만옥을 2023년의 관객과 만나게 한 영화 〈이마 베프〉 등의 영화가 1부에서 다뤄진다. 우리 안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내면 어딘가에 분명하게 남아 있는 의미와 이미지들을 영화적으로 재현한 작품들에 대해 양진호 평론가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새로운 건축 스타일”(「병 속에 담긴 말들」 중에서)같은 영화라고 평가하고 있다.
2부에서 다루는 영화들은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엉뚱하다’라고 느껴질 만한 서사들을 담아낸 작품들이다. 의도치 않게 ‘납치범’이라는 역할을 떠맡으며 어른도 아이도 아닌 한 사람으로서 한국사회라는 미로를 헤매게 되는 소년 ‘태인’을 다룬 영화 〈소리도 없이〉, 30년 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의 초대를 받아 섬뜩한 하룻밤 여정을 보내는 주인공 ‘노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컴 투 대디: 30년 만의 재회〉, 재정난에 빠진 동물원을 살리기 위해 동물로 변장하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해치지않아〉 등의 작품들은 복잡한 영화적 문법이나 심오한 성찰 대신 투박하면서도 흥미로운 삶에 대한 개성적 인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1부와 2부에서 다루는 작품들의 장르는 다르지만, 모든 작품이 공통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곳은 ‘진짜 우리만의 영화’라는 지점이다. 현실에서도, 심지어는 서사 공간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작고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들이 모여드는 곳. 그래서 평일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단 한 번 빛나는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는 곳. 양진호 평론가가 『아이러니스트, 영화관에 가다』에서 소개하는 영화들은 ‘반드시 봐야만 하는’ 영화들 속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관객들을 위한 ‘잊힌 장소들’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들과 관객들이 만나는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한 영화들을 성실하게 쫓아다니는 것. 영화평론가로서의 자신의 임무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양진호 평론가는 우리에게 잊힐 수도 있는, 하지만 잊혀서는 안 되는 ‘작은 이야기’로서의 영화를 이번 비평집에서 성실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이러니스트, 영화관에 가다』를 읽는 독자들은 영화를 통해 삶을 감각하는 가장 쉬우면서도 흥미로운 방법들을 ‘아이러니스트’로서 발견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양진호
영화평론가 양진호는 1985년 서울 출신으로, 한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19년 《쿨투라》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으며, B급 장르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다.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대중시나리오학과에서 영화 비평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작가의 말
나는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의 ‘아이러니스트’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의 번뜩이는 순간을 발견하고 구체화하는 사람들. 그들은 진리에 의해 구성된 거대서사 속에 엉뚱한 어휘들을 적극적으로 끼워 넣는다. 아이러니스트의 이야기들로 세상의 거짓과 부조리가 단숨에 무너질 수는 없지만, 그들이 잠깐 재밌게 놀다 떠난 자리에는 ‘우연성’이 남는다. 어른들에게 배웠던 많은 것들이 나와 상관없는 무언가가 되는 텅 빈 공간. 거기에 나는 아이러니스트처럼 나만의 이야기를 써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게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런 아이러니스트였고, 극장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우연성의 공간이었다. 중년이 되기 전까지 나는 그들의 노력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감사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쿠엔틴 타란티노, 미이케 다카시, 류승완…… 내게 영화라는 단어를 가장 흥미롭고 구체적인 장면들로 가르쳐준 이들에게 이 책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에도 비디오 데크가 달린 TV와 가정용 게임기를 내 12살 생일 선물로 마련해주셨던 아버지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양진호
추천사
『아이러니스트, 그는 진리를 믿지 않는다. 자신의 시선을 통과하지 않은 그 무엇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이 경험한 것과 느껴본 것을 통해 이 세계의 진리를 구축한다. 그에게 감각은 세계와 만나는 촉수이고, 지성은 타인과 교섭하는 통로이다. 오직 ‘나’만의 감각과 지성으로 진리의 낯선 길을 더듬는 그의 발걸음은 늘 분주할 밖에. 비평가 양진호가 스크린을 주파하며 문자로 새긴 흔적은 낯설지만 굳건한 영화적 진리의 표지들이다. 이 여정에 동행한 당신 또한 그가 남긴 아이러니의 감각과 지성을 필연코 발견할 것이다.
- 최진석(문학평론가)
본문 속으로
예술은 우리에게 ‘시점’을 강요한 맥락들이 무너지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한 연인을 둘러쌌던 역사의 응시도, 한 시인의 삶을 가둔 매끈하고 불투명한 현실도 무너져 내린다. 단지 그곳에는 ‘안’과 ‘바깥’이 투명하게 보이는 유리병들이 세워질 뿐이다. 이제 팬데믹이 조금은 잦아들고, 모두가 폐허 위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가게 되는 시기다. 오늘 소개한 영화 〈운디네〉는 그런 우리에게 ‘베를린 바깥의 목소리로 베를린을 다시 세워 나가는 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도시의 디자인은 그것이 담아낼 수 없는 어떤 기능들까지 고려할 때 좀 더 완벽해질 수 있다. 현실은 그것이 다 담아낼 수 없는 ‘사랑’의 양상을 끌어안을 수 있을 때에야 온전히 유지될 수 있다. 옛 연인에 대한 애도를 마친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투명한 내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언어들을 보여주며, ‘아직 말해질 수 없는 무언가’가 이 도시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재료임을 알려준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유리병 같은 환상 속을 오간 뒤에야 우리는 자신의 삶에 어울리는 새로운 건축 스타일을 상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병속에 담긴 말들-영화 〈운디네〉」, 본문 21쪽
영화의 중심 서사는 제이콥의 것이지만, 카메라의 시선은 제이콥의 시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가 한 사람의 완결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기억을 하나로 응축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대부분 3인칭 시점에 머물고, 데이빗의 시점으로 관찰하는 듯한 장면(주로 어른들의 대화를 문지방 너머로 보는 것처럼 표현된다)도 간혹 있지만, 그 시선은 부분적으로 앤과 모니카와 폴과 그밖에 다른 사람의 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관객의 시선도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영화가 80년대, 그리고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본 속에서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중 누군가는 제이콥처럼 자신의 검고 축축한 흙을 찾아 거기 잠시 머물고 있을 것이고, 정이삭 감독 역시 ‘영화’를 자신의 토양으로 생각하며 거기에 ‘시간’이라는 컨테이너를 정박시켜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 있는 동안 컨테이너 한구석에서 몇 개의 비어 있는 기억의 상자를 열어 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낯선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와 감독의 ‘꽉 찬’ 시간을 지탱해온 그 텅 빈 시간의 블록들에는 어떤 힘이 깃들어 있었는지, 그것을 확인하는 게 이 영화를 보는 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여름의 젠가-영화 〈미나리〉」, 본문 33쪽
신체적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복지 서비스와 그들을 위해 사용되는 예산의 범위가 지나치게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제한적인 이동권과 직업 선택권, 사회적 냉소 등으로 인해 고립된 장애인의 현실을 그저 통계 수치나 신문 기사 등으로만 이해하려고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5등급’이라는 장애 등급이 주인공 강재기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던 것처럼, 장애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복지 제도는 그들의 삶의 고통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저소득 계층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많은 이해와 해석의 방식이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사람의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일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지점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사회 제도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눈을 뜨고 우리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신체적 장애를 갖지 않은 한 사람이 불운한 사고를 통해 일상 바깥으로 내몰렸을 때에야 겨우 바라보게 된 지점이며, 사회의 법과 제도가 자신의 역량 부족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써서 은폐하고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Awoke’라는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우리에게 과거형 동사가 아니라 명령형 동사 ‘Awake’로 다가와야 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통계와 수치 앞에서 눈 감으며 사회적 비극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 해서는 안 된다.
- 「‘장소’와 ‘공간’ 사이에서 눈 뜨다-영화 〈복지식당〉」, 본문 64쪽
90년대적인 것들이 우리 대중문화에 다시 찾아오고 있는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과거의 장만옥은 우리에게 다가와 ‘너의 영화는 무엇이었니’라고 묻고 있다. 그것에 성급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이 질문에 포함된 과거의 향수를 즐기기도 하고, 또 실패를 곱씹어보기도 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욕망이 새롭게 피어날지 기다려보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대답을 들려준다고 해도 장만옥은 우리가 명명한 2023년의 바깥으로 잠시 물러났다가 또다시 우리가 현재에 갇혔을 때 수수께끼의 방식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만옥은 지금, ‘절반만 말해진 미래’를 들고 우리 앞에 서 있다.
- 「‘장만옥’이라는 수수께끼-영화 〈이마 베프〉」, 본문 111쪽
우리는 지금 아버지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 어느 순간에, 그는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중략) 우리에게 가격이 매겨지는 동안, 그리고 우리가 디지털 신호로 인코딩되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 꿈속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 혹은 설명되는 것에 저항하는 감정들을 닮아 있기도 하다. 아버지의 오두막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진짜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와 싸워야 할 수도 있고, 그에게 굴복해 우리의 현실을 모조리 갖다 바쳐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는 여태껏 들려주지 않았던 간절한 음성으로, 편지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어색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그는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해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가상에 중독된 우리의 몸속에도 ‘뜨거운 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SNS와 포털 사이트, 유튜브의 텅 빈 정보에 중독되어 삶의 전부가 시뮬레이팅 될 것 같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영화 〈컴 투 대디: 30년만의 재회〉」, 본문 133-134쪽
목차
프롤로그
1부
병 속에 담긴 말들 - 〈운디네〉 11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요? - 〈이제 그만 끝낼까 해〉 22
여름의 젠가 - 〈미나리〉 31
텅 빈 기도에 닿기까지 - 〈매스〉 42
‘장소’와 ‘공간’ 사이에서 눈 뜨다 - 〈복지식당〉 54
반지성주의 시대의 영화적 캐릭터 - 〈드롭아웃〉 〈하우스 오브 구찌〉 65
벌거벗은 임금님의 천국 - 〈멋진 세계〉 84
‘장만옥’이라는 수수께끼 - 〈이마 베프〉 96
2부
‘내 꿈’을 이루게 도와줄래? - 〈디어스킨〉 115
상처와 망각 사이에서 - 〈온다〉 121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 〈컴 투 대디: 30년 만의 재회〉 128
영원한 모라토리움의 끝 - 〈주온: 저주의 집〉 135
당신의 비밀은 나의 미래 - 〈스파이의 아내〉 143
어른도 아이도 아닌 사람들 - 〈소리도 없이〉 154
동물이 되는 것의 어려움 - 〈해치지않아〉 166
당신의 작은 식탁을 위해 - 〈피그〉 173
소녀 검객은 청춘영화의 꿈을 꾼다 - 〈썸머 필름을 타고〉 185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