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조문학사에 하나의 빛으로 자리할 것이다”
사랑과 긍정의 철학이 빚어낸 질문의 목록
- 서일옥 시인의 새 시조집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
개성있는 시조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일옥 시인이 새 시조집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을 도서출판 작가 기획시선으로 출간하였다.
저자 서일옥 시인은 경남 창원(구 마산)에서 태어나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 『영화스케치』 『그늘의 무늬』 『하이힐』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 현대시조 100인선 『병산우체국』, 동시조집 『숲에서 자는 바람』 등이 있으며, 경남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성파시조문학상, 마산시문화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가람시조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경상남도 예술인상, 윤동주 문학상, 노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마산문인협회 회장, 경상남도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경남문학관 관장, 경상남도 창녕교육청 교육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국문인협회·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노산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질문하는 시인, 서일옥
서일옥은 질문하는 시인이다. 마음 흔들릴 때마다 “내 시조는 지금 / 어디쯤 와 있을까/나는 시조와 얼마나/가까워진 것일까”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서일옥 시인은 이번 시조집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5부로 나뉘어 총 65편의 가편들을 수록한 이번 시집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세상의 어둠에 의문을 가진다.
첫 시조집 『영화스케치』 에 있는 「니나」에서는 “길 떠날 노자도 없이 유기된” 외국인 노동자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고 「정신대 그 이야기」에서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천형의 도장”을 노래하며 역사 적 진실을 고백하고 해결하라고 외쳤다. 그 뒤에 나온 시조집 『하이힐』에서는 하이힐, 아이라인, 립스틱, 볼연지, 반지, 핸드백, 매니큐어와 같은 여성 친화적 소재를 통해 페미니스트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 겨울 받아 든
출생의 운명처럼
가도 가도 높고 가파른
하이힐이 여기 있다
찬바람 무찌르려고
찬바람 허리에 감고
세상은 목마르고 뜨거운 사막이었다
그 길을 여자 하나가 절며 걸어간다
똬리 튼 파충류처럼
맹독의 입술을 하고…
- 「하이힐」 전문
이 작품은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고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명편이다. 그의 시조세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또는 어두운 현실과 그에 따르는 불안에 대해 해 온 질문은 이번 시조집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또는 어두운 현실과 그에 따르는 불안에 대해 해 온 질문은 이번 시조집에서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주전자엔 100℃의 물이 끓고 있고
나는 미열을 앓고
밖에는 눈이 내린다
말 못 할 두려움 같은
눈이 계속 내린다
불안은 바이러스처럼 거리를 돌아다니고
내일을 알 수 없는
상점들은 문을 닫았다
세계는 어둠을 걸치고
어디로 가고 있을까
- 「분위기」 전문
이 작품은 신종 코로나가 만든 팬데믹 시대의 풍경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죽음의 공포로 사람들의 발길은 끊기고 상점은 문을 닫는다. 이 공포스러운 사태가 언제쯤 끝날까. 팬데믹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가. 인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종장의 “세계는 어둠을 걸치고 / 어디로 가고 있을까”에는 거론한 질문뿐만 아니라 거론하지 않은 많은 질문이 자조 섞인 절망으로 함의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창궐하는 전염병 시대의 날카롭고 섬뜩한 분위기를 잘 조영해 낸 시조라 하겠다.
비우러 떠나는데 오히려 무겁다
눈 익은 골목길도 자꾸 돌아 보이고
물 먹은 포장지처럼
마음 가라앉고
냉장고에 붙여둔 한 주일의 식단표를
누가 떼어버릴까 찢어질까 걱정하며
차표를 또 확인한다
모진 마음 거듭 다지며
- 「불안한 여행」 전문
「불안한 여행」은 그가 꾸준히 다루는 페미니즘적 시각이 반영된 작품이다. “여자라는 악기” “환청” 등의 작품을 통해 격앙되지 않은 어조로 질문을 반복하고 있다. 가정을 가진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법한 감정이다. 더 세심하게 읽어보면 짧은 여행마저도 걱정 없이 홀가분하게 갈 수 없는, 가족 안에서 여성에게 지워진 역할 문제를 되짚어 보게 하고 질문하는 시조라고 해석할 수 있다. 가감 없는 현실적 표현으로 시조의 형식미를 자연스럽게 원용한 절제미와 균형 등에서 보면 성공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역사에 관한 시인의 태도
사백 년 간극이
접혔다 펼쳐진다
적진을 겨누고 있던
판옥선의 울음도
슬픔을
순장해 놓은
핏빛 시간이었다
- 「울둘목」 전문
서낭당 지나면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삼촌은 북쪽 길로
아버지는 남쪽 길로
순간의 선택이었지만
그것이 운명이었다
- 「민족」 전문
역사에 관한 시인의 태도를 볼 수 있는 두 작품이다. 울둘목은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군 배를 수장시킨 유적지다. 이런 역사적 공간을 시적 대상으로 삼을 때 승전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맞출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우 ‘핏빛 울음’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 반전사상의 표출이라고 읽을 수 있다. 어떤 전쟁도 “슬픔을 순장”하는 “핏빛 시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은 이 지구상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고 읽힌다.
「민족」의 경우는 분단의 아픔을 특별한 수사 없이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형제가 각기 북쪽으로, 또 남쪽으로 가게 된 것은 순간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분단 상황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순간의 선택은 말할 수 없는 참혹한 결말에 이르게 하였다. 이 비극의 연출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물론 강대국이다. 그들의 극본에 의해 오늘까지 우리 민족은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으로 살고 있다. 이 단시조에서 그런 분노를 찾아 읽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맞서는 시인
그리고 시인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를 통해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별에게」는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16개월 입양아 ‘정인’이의 죽음을 고발한다. 또한 「ARS」에서는 컴퓨터에 능숙하지 못해서 회사나 관청에 질의를 하려해도 번번이 실패하는 노년층의 고충과 정보화 선진국의 그늘을 고발한다. 끊임없이 펼쳐지는 화자의 질문 속에서 세태와 인정을 읽을 수 있고 희망과 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읽을 수 있다.
건방을 떨면서 우쭐대던 당신 어깨가
천만근 시름을 지고 힘없이 누워있다
그 슬픔 함께하려고
무릎 꿇고 바라본다
온몸으로 부르짖는 소리 없는 전언들이
흑백의 결을 타고 울음처럼 번지는 시간
무너진 생의 칼라를
다시 세워주고 싶다
- 「와이셔츠를 다리며」 전문
힘든 하루를 견디고 돌아온 사람이 누워있다. 가족 앞에서만은 오만을 떨고 허풍을 치던 사람이 누워있다. 무너진 그를 일으켜 다시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와이셔츠를 다린다. “결을 타고 울음처럼 번지는 시간”은 경쟁이 치열한 우리 사회의 사람들 대부분이 겪게 되는 시련이다. 그 고통을 아프게 느끼며 와이셔츠의 깃을 세운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이 그저 구겨진 칼라를 세워주는 사소한 일 뿐임에도 무너진 생을 일으켜 주고 싶은 화자의 간절함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화자의 자세는 보편적인 우리 서민들의 일상을 대변하고 있다 할 것이다. 화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표제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켜켜이 말아 올린 상큼한 언어들이
몸속의 통점을 밀고 부풀어 오르면
꽃잎은 시간을 열고 미소를 짓는다
아가의 살결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마주 보고 새살새살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생각의 틈새에서도 푸른 잎이 돋는다
모난 상처들 조금씩 둥글어지고
내일의 꿈을 꾸는 우리들의 어깨 위로
익어서 더욱 소담스런 햇살들 쏟아진다
-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 전문
첫 수에서는 ‘크루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화자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 잘 드러난다. 삶의 아픔을 “밀고 부풀어 오르는” 크루아상의 모습은 “꽃잎”이고 “미소”다. 둘째 수에서는 분위기를 더욱 아름답게 그려 보이고 있고 마지막 수에서는 그가 희망하는 내일의 모습을 보여준다. “둥글어지”는 것, “햇살이 쏟아”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우걸 시인은 해설에서 “그는 월권과 부패 혹은 부조리와 성적 차별 혹은 전망 부재의 오늘을 질타할 때도 그의 가슴 한 곳에 이런 사랑과 긍정의 세계관을 간직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질문들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너무나 가슴 아픈 절규이거나 간절한 부탁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개선을 위한 건강한 목소리다. 앞으로도 체험적인 시조, 진솔한 시조,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는 시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시조를 그는 계속 쓸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질문’은 그의 시학의 돌올한 개성이 되어 한국시조문학사에 하나의 빛으로 자리할 것”이라고 평했다.
질문은 마음의 창과 같은 것이다. 그의 시조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미 그의 깊고 넓은 사유의 개성을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질문들은 내적 필연성과 외적 객관성을 갖고 있기에 세상을 사랑하고 긍정하는 마음에서 던지는 진지한 목소리다. 눈밝은 독자들은 시인의 질문 속에서 세태와 인정을 읽을 수 있고 희망과 발전을 위한 몸부림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서일옥 시인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들에 밑줄 그으며, “둥글어지”는 것, “햇살이 쏟아”지는 아름다움을 함께 경험해 보자.
서일옥 시인
경남 창원(구 마산)에서 출생. 경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행정학과 졸업. 199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조문학》 천료, 《한국아동문학연구》 동시조 당선. 시조집 『영화스케치』 『그늘의 무늬』 『하이힐』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 현대시조 100인선 『병산우체국』, 동시조집 『숲에서 자는 바람』. 경남시조문학상, 한국시조시인협회상, 성파시조문학상, 마산시문화상, 김달진창원문학상, 경남아동문학상, 가람시조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경상남도 예술인상, 윤동주 문학상, 노산시조문학상 수상. 경남시조시인협회 회장, 마산문인협회 회장, 마산예총 수석 부회장, 경상남도문인협회 시조분과 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부이사장,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부의장, 대동제 대회장, 경남문학관 관장, 경상남도 창녕교육청 교육장 역임. 현재 한국문인협회·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노산시조문학상 운영위원장.
시인의 말
“내 시조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시조와 얼마나
가까워진 것일까”
마음 흔들릴 때마다
내게 물어보는 말
아! 이제 깃털처럼 가벼운
언어를 타고
어디론가 한없이
떠돌고 싶다
문학이여
내 운명의 족쇄여
- 2024년 봄날에, 서일옥
본문 속으로
독주毒酒로구나
명주銘酒로구나
세상 설움 다 담가 빚은
무슨 혼령
스며 영근
징 소리 같은 것아
이 한철 목마른 나를
네가 왜
태우며 우나!
- 「피아골 단풍」 전문, 본문 15쪽
책들이 벌써 내 방을 점령군처럼 차지했다
그들이 던져놓은 시끄러운 지식은
자꾸만 쌓이고 있다
부채負債처럼 쌓이고 있다
날마다 어둠 속에서 책들끼리 다툰다
문을 닫아걸어도 귀를 막아보아도
그들의 격한 논쟁이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이제 버려야 하나?
아직 두어야 하나?
몇 번을 들었다가 도로 놓곤 하지만
눈익은 표지를 보면
이별은 이른 것 같다
- 「책들」 전문, 본문 18쪽
작고 여린 봉오리 위로
피어 보지도 못하고 어둔 세상 건너간
아가의 그 설운 얘기
다시는 적지 마라
부서진 화분같이
조각조각 금 간 시간
그 순결의 눈망울마저 흔들리고 있을 때
우리는 알지 못했다
함께 하지 못했다
이제는 다 잊고 청천의 별이 되렴
지상을 밝히는 한 가닥 빛이 되어
아직도 미망을 헤매는 이 세상을 깨워주렴
- 「별에게」 전문, 본문 42쪽
비우러 떠나는데 오히려 무겁다
눈 익은 골목길도 자꾸 돌아 보이고
물 먹은 포장지처럼
마음 가라앉고
냉장고에 붙여둔 한 주일의 식단표를
누가 떼어버릴까 찢어질까 걱정하며
차표를 또 확인한다
모진 마음 거듭 다지며
- 「불안한 여행」 전문, 본문 58쪽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와이셔츠를 다리며
피아골 단풍 15
분위기 16
모죽 17
책들 18
울둘목 19
와이셔츠를 다리며 20
눈 안에 핀 꽃 21
반려 돌 23
별사別辭 24
두 개의 정부 25
‘끝’이라는 말 26
ARS 27
수원화성 28
제2부 여자라는 악기
크루아상이 익는 시간 31
얼음새꽃 32
끈 33
환청幻聽 34
여자라는 악기 36
안부 37
성주사 38
섣달 보름 39
자작나무 숲 40
청도는 41
별에게 42
밥상 43
동행 44
제3부 숲
가족사진 47
이어폰 48
두 번째 결혼 49
달리다굼 달리다굼 50
명주銘酒 51
1177갱 52
칸나 53
매화차 54
노란 신호등 55
숲 56
포옹 57
불안한 여행 58
눈시울을 적시는 이름 59
제4부 젓갈과 참치캔
민족 63
화장化粧 64
남해 65
젓갈과 참치캔 66
보이스피싱 67
구조라에서 68
청량산에 올라보면 69
3월 70
함께 71
손 72
가끔 길을 잃다 73
자화상 74
바람의 언덕 75
5부 봄의 화폭
나무 79
봄의 화폭 80
손금 81
상견례 82
파도 소리길 83
꿈을 위한 변주 84
새벽달 85
책상 앞에서 86
바코드 87
브라운 핸즈 88
자연이 그리는 캠퍼스 89
장식품裝飾品 90
명패를 내리며 91
해설
긍정적 철학이 빚어낸 질문의 목록_이우걸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