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오연희 디카시집 『이 순간』
[신간 안내] 오연희 디카시집 『이 순간』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4.10.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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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빛은 사라지고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늦기 전에 당신에게 고백할 말이 있다

 

 순간과 영속(永續) 사이의 거리 

- 오연희 디카시집 「이 순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오연희 시인의 첫 디카시집 『이 순간』이 도서출판 작가의 한국디카시 대표시선 20번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수필가로 출발해서 시를 써온 오연희 시인은 《해외문학》 신인상 수필 당선, 제2회 《시와정신》 해외시인상, 제23회 〈해외문학상〉 시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미주 시인으로서 자기 영역을 가진 대표적인 문학인이며, 시집으로 『호흡하는 것들은 모두 빛이다』와 『꽃』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시차 속으로』와 『길치 인생을 위한 우회로』 등이 있다.

오연희 시인은 몇 해 전부터 새로운 한류 문예 장르 디카시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직접 디카시 창작을 수행하는가 하면 LA지역의 디카시인 및 동호인들과 함께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주었다. 또한 디카시의 심층적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수준 높은 디카시 창작 활동을 계속해 왔다.

그래서일까. 오연희 시인이 처음으로 펴내는 디카시집 『이 순간』 은 제목에서부터 디카시의 예술적 속성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나타낸 언표(言表)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총 60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1부와 2부는 시인이 미국에서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동안 만난 풍경과 사물에 디카시의 옷을 입힌 사례들이며, 3부는 하와이·알래스카·캐나다 등지를 여행하면서 얻은 영상과 감상을 담아냈으며, 4부는 베트남·일본·한국 등지의 경물(景物)과 그에 대한 시적 표현의 묘미를 얻은 작품들이다.

시간과 공간을 통어하는 시의 힘

시는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것은 시 창작에 동원되는 상상력의 힘이자 시가 현실 법칙을 초월한 진실 법칙에 입각해 있다는 구조적 문법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시에 있어서 어법의 일탈이나 변용이 가능한 터이다. 이 시집의 1부 〈늦기 전에 고백할 말이 있다〉에 실린 시들은 이러한 시간 및 공간의 제약을 넘어 활달하게 시상(詩想)을 전개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더불어 이를 통어(統御)하고 조직화하는 기량을 보여준다. 「이 순간」에서 황혼을 펼쳐둔 사진 앞에서 ‘늦기 전에 당신에게 고백할 말’이 있다는 토로나, 「일상의 길목」에서 산야의 중동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도로를 ‘계곡을 빠져나오는 물결’로 보는 시각이 다 그렇다.

칙칙폭폭

지상으로의 가벼운 착지

우리도 가끔

꽹과리 소리 나는 아랫마을로

마실 나가고 싶지

- 「호기심」 전문

인용된 시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대지 위로 뭉게구름의 행렬이, 마치 기차의 화통에서 내뿜는 연기와 같다고 치부한 담화를 담았다. 일견 그 관찰은 매우 참신하고 그럴듯하다. 시인은 이 구름의 형용이 ‘지상으로의 가벼운 착지’를 시도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에 덧붙여 우리도 ‘꽹과리 소리 나는 아랫마을’로 마실 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내놓았다. 이러한 언사는 아마도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결부되어 생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로열 블루의 하늘에 줄지은 구름의 모형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신의 옛 추억을 소환한 시적 기교가 이 시에 잠겨 있다. 시인은 여기에 ‘호기심’이란 제목을 붙였다.

구름이 없었다면

눈시울 뜨거워지는 아름다움도 없었겠지요

내 생의 짙은 어둠

당신 앞에 다 펼쳐 놓을게요

- 「노을」 전문

아름다운 노을이다. 캘리포니아의 도로변과 야산 기슭을 채우는 독특한 나무 유칼립투스가 사진의 왼편에서 위쪽을 점유한 가운데, 회오리 모양을 한 황금빛 노을이 강렬한 아우라를 자랑하고 있다. 시인은 이 노을의 채색을 이룬 구름이 있기에 '눈시울 뜨거워지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연이어 말한다. ‘내 생의 짙은 어둠’을 당신 앞에 다 펼쳐 놓겠다고. 서녘 하늘에 깔린 노을을 보고 자신의 생애 전반을, 그것도 그 짙은 어둠을 환기할 수 있다면 그는 건실한 시인이다. 이때 시인이 상정한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는 검증하기 어려우나, 이 장엄한 하늘의 한순간으로 표상되는 어떤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닐까 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의 경관(景觀)에서 그를 불러낼 수 있는 시의 힘이 거기에 있다.

풍광의 외형에 숨겨둔 애환과 낯선 경험

시(時)의 고금과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이름 있는 시인 묵객들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의지하여 시를 쓰고 묵화를 쳤다. 그리고 그에 비추어 만단정회(萬端情懷)의 심경을 비유나 은유의 방식으로 노래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지금 여기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으며, 재기 넘치는 디카시인 오연희에 있어서도 매한가지인 터이다. 2부 〈그 집 앞〉의 시들이 특히 그렇다. 「붉은 연가」는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사막의 꽃 부겐빌 레아가 풍성하고 붉게 피어 있는 광경에 '연가'란 명호名號를 달았다. 그리고 ‘겁 없이 타오른’ 지난날의 연정을 반추한다. 「그 집 앞」 또한 유사한 발상이다. 솟을대문처럼 높은 어느 집의 입구에서 ‘전생의 나일지도 모르는 그녀’의 임재(臨在)를 걱정한다.

찰거머리가 따로 없네

말랑말랑한 속까지 다 내놓고 덤볐으니

당할 재간이 있었겠나

울며 겨자 먹히는 겨자꽃

- 「비화」 전문

'비화'라는 제목을 붙인 시다. 노란색 꽃망울이 터지면서 가로로 누운 겨자꽃 몇 송이가 밝고 싱그럽다. 이 꽃은 겨잣과에 속한 한해살이 또는 두해살이 풀이 노란 겨잣빛으로 핀다. 그런데 그 줄기에 길을 잃은 듯한 달팽이 한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시인은 이 화사한 꽃과 애써 기어올라온 연체동물의 조합을 아슬아슬하게 한 장의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여기에 부가한 해석은 짐짓 딴청이다. 달팽이를 두고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고 하고, 속까지 다 내놓고 덤빈 형국이라고 본다. 마침내 결어는 ‘울며 겨자 먹히는 겨자꽃’이다. 이처럼 삽상한 한 폭의 그림에서, 시인은 세상사의 만만찮은 관계성과 사회성 그리고 연기론(緣起論)과 운명론을 함께 해명한다. 시인이 자연과 친화한다는 것은, 그 자연이 수려해서이기도 하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태 코드와 감정선이 그에 일치한다는 뜻이 아닐까. 한국의 아이들이 산을 푸르게 그리듯이, 사막 땅의 아이들은 모래 언덕을 그려 놓고 산이라 할 수밖에 없다지 않은가. 그리고 거기서 익숙한 안도감과 친화적 감응력 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편안한 연대감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현실을 배격하는 시적 상상력과 그 질서의 파탈을 도모하기 어렵다. 그래서 시인도 또 시인이 아닌 사람도 여행을 한다. 누군가 이르기를,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편견을 바꾸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시인은 하와이로, 알래스카로, 캐나다로 떠났다. 그 결과가 이 시집 3부 〈연(蓮)을 담아낸 그대의 사랑〉으로 묶은 시들이다. 「황홀한 생업」에서 돌고래의 비상(飛翔), 「기적 소리」에서 알래스카를 살리는 송유관의 장관(壯觀) 등이 그 범례다.

인생의 행로를 두고 여행이라 부르는 일은, 여러 사람에게 두루 통용되는 발화법이다. 그래서 여행의 길 위에서 또는 여행 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노상(路上)의 문학’이라 호명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행 문학은 많은 부피와 고급한 수준을 축적해 왔다. 일찍이 존 번연의 『천로역정』으로부터 두보의 방랑시 편들, 박경리의 『토지』와 황석영의 『장길산』, 김주영의 『객주』 등이 모두 이 영역과 결부될 수 있다. 디카시 또한 여행의 소산인 때가 허다하다. 이 시집 4부 〈붉은 거리〉 또한 베트남과 일본 그리고 한국 여행으로서 그러하며, 그 여수(旅愁)의 반영이 시의 격을 훨씬 높여준 느낌이다. 「바위 섬」의 베트남 하롱베이, 「불빛」의 밤 깊은 시가지 등은 여행지에서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시상(詩想)을 수렴했다.

가슴 속 죽창 내려꽂힌 사연 다 내려놓고

사슴처럼 순한 노래 입 모으면

깃털처럼 날아오르는 합창

온 숲을 휘감고 돕니다

- 「뱀부의 노래」 전문

이 시는 대나무숲 한복판에서 하늘을 보며 찍은 사진과 시의 결합이다. 나무가 자란 키를 보면 기후가 온난한 지방을 여 행하다가 얻은 것 같다. 곧고 높게 자란 대숲 사이로 먼 하늘이 아득한 만큼, 시어(詩語) 또한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다. ‘가슴 속 죽창 내려꽂힌 사연’은 개인사나 민족사에 있어서 아픔과 슬픔의 역사를 초치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사슴처럼 순한 노래’로 입 모으면 ‘깃털처럼 날아오르는 합창’이 온 숲을 휘감고 돈다고 감각한다. 여행길에서 시인의 가슴을 채운 순후한 감성이, 어느 결에 배려와 화해의 의미들을 생산한 셈이 아닌가. 사진과 시가 연대하여 쾌청하고 희망적인 어조와 분위기를 연출한 시다.

김종회(한국디카시인협회 회장) 문학평론가는 “오연희 시인은 모국어의 땅에서 8만 리 태평양을 건너 미주에서 문학인으로 살면서, 좋은 디카시를 쓸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갖춘 시인이다. 예리한 사진 촬영의 감각, 합당한 시적 언술을 산출할 수 있는 단련된 기량, 그리고 이를 광범위 하게 소통할 수 있는 문학적 통신망 등이 그에게 예비되어 있는 까닭에서다. 이번 시집 『이 순간』을 하나의 매듭이자 마디로 하여, 그의 디카시 마당은 더 넓고 깊게 열릴 것”이라고 평한다.

앞으로 국내외를 오가며 펼쳐질 오연희 시인의 시작(詩作)과 그로 인한 광범위한 견인(牽引)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저자 오연희

 

2002부터 만 5년간 《미주 중앙일보》 통신원 및 교육 칼럼 집필.

《미주 중앙일보》 넌픽션, 《해외문학》 수필, 《심상》 시 등단.

시집 3권, 산문집 2권 출간.

에피포도예술상, 시와정신 해외문학상, 해외문학상 대상, 미주 윤동주문학상, 코위너 디카시 공모전 대상.

‘SouthBay 글사랑’ & ‘GoodHands 시창작교실’ 지도강사.

University of Phoenix 졸업(BS in Accounting) 공인세무사.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시인의 말

 

익숙한 듯 생소한 이름 디카시, 그 묘한 끌림에 새삼, 연애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붉게 물들어버린 단풍처럼 물이 흠뻑 들고 말았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이며 ‘극 순간 예술’이라는 말은 강조하지 않겠습니다. 학문적인 표현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연애 자체가 좋았으니까요.

바쁜 틈틈이 만나는 비밀스러운 즐거움을 어디에 비할까요. ‘이 순간’을 누리게 해 주었기에 소중했습니다. 묵묵히 기다려주고, 힘든 마음은 위로해 주고, 기쁨은 배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쑥스럽지만, 연애의 결실을 내놓습니다. 진행형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따뜻한 눈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담 넘어 은빛 반짝이는 갈대를 바라보며

토랜스 집에서 오연희

 

 


본문 속으로

 

더 황홀한 장면을 담으려고 길을 멈춘 순

붉은빛은 사라지고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늦기 전에

당신에게 고백할 말이 있다

- 「이 순간」, 본문 16-17쪽

 

하늘 정복자인 듯 서슬 퍼런 꼬리

물고기의 유연함을 겸비하면

바다가 넘어갈까요

그대는

꼬리 다 내려놓고 얻은 사랑

- 「꼬리치다」, 본문 74-75쪽

 

새 사전에는 없어요

프렌치 키스

가슴이 시키는 일에 충실할 뿐

- 「양장본」, 본문 102-103쪽

 

어떤 언어로도 살려낼 수 없는

살고 싶은 욕망이 샘 솟는 색

임금의 안색을 살피듯 너를 살핀다

너와 잘 맞는 색이 되고 싶다

- 「옥색」, 본문 108-109쪽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늦기 전에 고백할 말이 있다

호기심 · 14

이 순간 · 16

수심 · 18

노을 · 20

일상의 길목 · 22

섬 · 24

비상 · 26

다산 · 28

바다로 간 반려 · 30

우리가 · 32

가난한 낭만 · 34

인증샷 · 36

실루엣 · 38

유희 · 40

홈리스 · 42

제2부 그집 앞

소설 쓰기 · 46

성공담 · 48

붉은 연가 · 50

비화 · 52

세레나데 · 54

그집 앞 · 56

비빔밥 만들기 · 58

사랑의 예감 · 60

아픈 인연 · 62

연두의 감사 · 64

적막 깨우기 · 66

공존 · 68

부부 · 70

자매 · 72

꼬리치다 · 74

제3부 연(蓮)을 담아 낸 그대의 사랑

황홀한 생업 · 78

진주만에서 · 80

양장본 · 82

진짜 · 84

교감 · 86

개 썰매 · 88

백야 · 90

기적소리 · 92

존재감 · 94

엄마 · 96

겨울 · 98

모를 일 · 100

연緣 · 102

산장의 소문 · 104

붉은 가요 · 106

옥색 · 108

제4부 붉은 거리

바위 섬 · 112

키스의 변천사 · 114

남근석 · 116

여우 · 118

해자 · 120

붉은 거리 · 122

불빛 · 124

뱀부의 노래 · 126

금각사에서 · 128

해산 · 130

프로포즈 · 132

양양 고속도로 · 134

차경, 슬픔의 각 · 136

마중 · 138

해설

순간과 영속 사이의 거리_김종회 ·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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