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서숙희 시조집 『빈』
[신간 안내] 서숙희 시조집 『빈』
  • 쿨투라 cultura
  • 승인 2024.07.2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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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

번지듯 빈, 너는 오지

 

 

 

 공명하는 경험적 진실의 깊이

 - 서숙희 시집 「빈」의 현대성

 

중앙시조대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백수문학상 등, 국내 최고 권위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한 서숙희 시인의 새 시조집 『빈』이 작가 기획시선 32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 서숙희 시인은 경북 포항에서 태어나 19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과 1996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 『아득한 중심』 『손이 작은 그 여자』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와 시조선집 『물의 이빨』이 있다.

이번에 펴낸 서숙희 시조집 『빈』은 모두 5부로 나뉘어져 총 66편의 시조로 구성되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신새벽 빈 위장에 통째로 우겨 넣어도 뱃속이 탈나지 않는 시”를 쓰고 싶었지만 “여전히 위장을 뒤틀리게 하는 참혹한, 이 시들을” 임을 고백한다. 이 고백이야말로 현대에 시조를 쓴다는 것의 의미이자 서숙희 시집 『빈』에 담긴 현대성을 가늠케 하는 말이 아닐까.

서숙희는 원본의 절대성을 교란하는 복제의 물결 속에서 “시조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찾아야 하며 무엇으로 이른바 ‘현대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차이와 전복의 시뮬라크르, 시조도 가능한가」, (《시조21》 2024년 봄호)라는 질문을 던진다. 수백 년 전과 다른 감성 구조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현 사회에서 과거를 답습한 시조를 쓰는 행위를 넘어 그의 시적 태도는 품이 넓고 한없이 자유롭게 열려 있다.

“시조는 순간을 포착하는 문학으로 언어를 최대한 아껴야 한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성까지 계산해야 한다. 언어는 짧으나 울림과 여운은 깊고 길어야 한다.”라는 입장을 견지해 오면서 이와 같은 맥락을 염두에 두고 낸 이번 시집 『빈』에 담긴 경험적 진실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

시조의 탄생을 검토하는 메타시조 「빈」

빈, 하고 네 이름을 부르는 저녁이면 / 하루는 무인도처럼 고요히 저물고 // 내 입엔 셀로판지 같은 / 적막이 물리지 // 어느 낮은 처마 아래 묻어 둔 밤의 울음 / 그 울음 푸른 잎을 내미는 아침이면 // 빈, 너는 갓 씻은 햇살로 / 반듯하게 내게 오지 // 심심한 창은 종일 구름을 당겼다 밀고 / 더 심심한 나는 구름의 뿔을 잡았다 놓고 // 비워둔 내 시의 행간에 / 번지듯 빈, 너는 오지

- 「빈」 전문

뜻 그대로 ‘빈’은 상실과 결여의 현재형이다. 그러나 외롭고 쓸쓸한 느낌만 가득하지는 않다. ‘빈’의 또 다른 풀이에는 “욕심이나 집착 따위의 어지러운 생각이 없게 되다.”라는 기술도 있다. 흔히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표현하는 상황이 그러하다. 무언가를 가득 움켜쥐고 있으면 그것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그럴 때 ‘빈’은 헛된 욕망을 경계하는 성찰의 언어로 기능한다. ‘빈’을 둘러싼 다양한 속성을 고려하면, 상실과 결여의 부정성과 긍정성이 모순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 양자의 절묘한 균형점이야말로 그녀가 이 시조집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배치하는가를 드러내는 지표이다.

‘비다’는 품사 차원의 동사가 아니라 현실 차원의 실체로 변모한다. 동시에 이는 이 작품을 상실과 결여의 부정성으로만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입체성을 띤다. 여기에서 ‘빈’은 시적 주체가 부르지 않아도 “갓 씻은 햇살로 / 반듯하게 내게 오”는 모습이며 또한 무언가 없음으로써 얻어지는 해방감의 ‘빈’도 있다. 생물이 아닌 ‘빈’이나 ‘창’을 살아 있는 듯 표상한다는 물활론적 관점도 특색 있지만, 그보다 핵심적인 사안은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한 심심함에 의해서만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한다는 데 있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빈’의 존재론을 확장하고 심화하는 한편으로, 시조의 탄생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메타시조라고 평할 수 있다. 상실과 결여에 대한 시적 주체의 정동을 천착하되, 시조 쓰기에 관한 시조를 표제작으로 삼아, 그녀는 이번 시조집에서 부각하려는 가치의 이정표를 세웠다.

현대성을 잘 살린 각 부(部)의 가편들

표제작 외 『빈』 외에도 각 부마다 눈에 띄는 모던한 작품들이 많다. 「A4에게」로 여는 제1부는 창작의 고투를 천명한다. “내 문장은 피투성이다”라는 선언은 그 자체로 시인으로서 쓰기의 각오가 어떠한지를 선연하게 드러낸다. 또한 “몸과 몸 살짝 부딪는 위태로운 소리”(「와인글라스의 밤」 부분)나 “검은 맨살로 누운 알몸의 바다”(「판타지 풍으로—영일만」 부분) 등 관능적인 이미지도 다수 등장하여 독자의 시선을 붙든다. 그 외에도 「잘못 뜬 스웨터를 푸는 시간」에는 누적된 생을 정밀하게 접합하는 솜씨로 삶을 진지하게 오래 들여다본 시인의 통찰이 빛을 발하고 있다.

제2부와 제3부에서는 「빈」 외에 시선을 잡아끄는 「냉장고 토르소」 외에도 박찬욱의 영화 〈헤어질 결심〉, 윤동주의 시 「참회록」, 더블베이시스트 성미경, 박수근전 등 여러 예술의 인유가 녹아 있는 시편들과, 밤새 내린 비로 깨끗해진 바깥 광경과는 대조적으로 “밤새운 내 문장에는 / 흙방울 / 흙방울들”(「방울들」 부분)이 굴러다닐 뿐인 상황을 드러내고, 함민복 시를 패러디하여 “시는 왜, / 시는 왜 짠가”(「시는 왜 짠가」 부분)라고 물으며 시 쓰기에 대한 반성을 거듭하면서 상실과 결여에 대처하는 시적 주체의 성숙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제4부는 지금 세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시적 주체의 발화가 특징적이다. 버려진 지구본을 보면서 “이미 녹은 빙하가 탁한 피로 엉기어 / 적도까지 내려와 신음으로 굳어버린”(「지구는 지금」 부분) 기후 위기에 봉착한 현재를 적시하는 작품, 도로 건설을 목적으로 산이 파헤쳐진 장면에서 “우르르 쏟아지는 내장”(「산의 몸통이 잘렸다」 부분)을 목격하는 작품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헬조선”을 저주하고 “이생망”을 자조하는 “비정규직” 젊은이들을 초점화한 「행운목은 행운이다」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시조는 서숙희의 시야가 내부로만 침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증한다.

제5부는 기억이 중심에 놓인다. “갈래머리 소녀들 / 푸르게 깔깔댈 때”(「청라언덕」 부분)를 회고하는 작품부터, 저마다의 기억을 품은 채 “혼곤히 맑은 잠에 드는 / 고분고분 고분들”(「고분고분 가을 고분」 부분)에 이르는 시조가 무게중심을 잡는다. 그중에서도 손톱깎이와 어머니의 지난날을 결부시키는 「어머니의 손톱깎이」는 어머니를 주제화하는 많은 시가 빠지기 쉬운 과도한 센티멘털리즘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손톱깎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한 시적 대상과의 적절한 거리를 마련하는 시인임이 여기서도 검증된다.

허희 평론가는 해설에서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에 매몰되지 않아, 도리어 그녀의 작품은 내용 형식적으로 경쾌함과 진중함을 가로지르는 분할선을 구축하였다. 그래서 사용자의 주문에 따라 언어를 도구처럼 부리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상용화된 2020년대에도 서숙희의 시조집은 설 자리가 있다. 경험적 진실의 깊이를 담보한 채 율격을 정립하면서도 파격을 시도하는 시적 작업을 생성형 인공지능은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다. 그것을 일컬어 시조의 현대성이라고 할 수 없다면, 대체 무엇이 모던한 스타일이 될 수 있을까”라고 평한다.

이처럼 서숙희의 다섯 번째 시집 『빈』에는 격조니 품격이니, 전통이니 민족이니 하는 무거움을 생각하지 않는 시조 쓰기를 지향하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단단한 시적 결실을 맺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의 모던하면서도 “여전히 위장을 뒤틀리게 하는 참혹한” 메타시조의 팽팽한 현을 당겨보기를 권한다.


저자 서숙희 시인

 

경북 포항 출생.

1992년 《매일신문》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6년 《월간문학》 신인상 소설 당선.

시조집 『먼 길을 돌아왔네』 『아득한 중심』 『손이 작은 그 여자』 『그대 아니라도 꽃은 피어』, 시조선집 『물의 이빨』이 있음.

중앙시조대상, 백수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이영도시조문학상, 한국시조작품상 등 수상

 

 


시인의 말

 

가령, 신새벽 빈 위장에 통째로 우겨 넣어도 뱃속이 탈나지 않는 시.

그런 시를 쓰고 싶었다.

어찌하나.

여전히 위장을 뒤틀리게 하는 참혹한, 이 시들을.

 


본문 속으로

 

차갑고 매끄러운 관념을 베어 문

너는 사디스트다 너는 흰 관능이다

 

가벼운, 그러나 치명적인

키스를 숨긴 너는

 

반듯한 직사각형의 그 유혹 속으로

더 깊게 더 황홀하게 빠져들고 싶기에

오늘도 너를 탐하는,

내 문장은 피투성이다

- 「A4에게」, 본문 15쪽

 

 

너로부터 도망쳤는데 도망치고 보니

다시 또 너였어

다시 그 자리였어

막다가 받아주다가 위안이다가 통곡인

 

너는 늘 난해했고 나는 자주 오해했어

너는 자주 고요했고 나는 늘 흔들렸어

 

울지 마

내 앞에서 산 같이

내 안에서 사막 같이

- 「벽의 이중성」, 본문 22쪽

 

실 하나로 연결된 몸통이 해체된다

허리가 무너지고 배와 가슴이 사라지고

 

잠깐을 울컥하는 사이

생生은 목만 남았다

- 「잘못 뜬 스웨터를 푸는 시간」, 본문 28쪽

 

 

촘촘한 체 같은 어스름이 번져 오고

 

사랑니 뽑혀 나간 동그란 아픔 위에

 

봄 저녁 물 끓는 소리 무심하게 고이는데

 

만지면 부서질까 당신의 마음가닥

 

가늘고 빳빳한 쓸쓸의 올올들이

 

뜨겁게 곤두박질치며 물속에서 몸을 푼다

 

참았던 시간들을 찬물로 헹궈 내면

어쩜 몇 가닥쯤은 당신에게 가 닿아

 

반음 쯤 낮은 자리에서 흰 음계로 울어줄까

- 「국수를 삶는 저녁」, 본문 32쪽

 

 

환한 듯 컴컴한 듯 서녘의 귀 한쪽이

이른 듯 늦은 듯 반쯤 이운 생 한쪽이

 

짝 없는 신발을 신고

더듬더듬 멀어졌다

남겨진 달팽이관

웅크린 흙집에는

적막의 긴 꼬리가 이명처럼 고이고

소리들, 그늘만 남아 아득히 저물어가는

 

너에게 가는 길의 흙바람 행려 같은

여전히 오지 않는 기다림의 대답 같은

 

외이도

거기서부터 내이도까지의 길 혹은 섬

- 「난청에 들다」, 본문 55쪽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A4에게 15

와인글라스의 밤 16

파경 17

개기월식 18

비문非文의 밤 19

체크무늬의 저녁 20

판타지 풍으로 21

벽의 이중성 22

그, 랩소디처럼 23

미스 보디빌딩 24

붓꽃엔 붓이 없다 26

저녁의 두부 27

잘못 뜬 스웨터를 푸는 시간 28

제2부

빈 31

국수를 삶는 저녁 32

마침내, 33

라면 34

딥클렌징 35

맨발의 베이시스트에게 36

피아노 37

달과 음악과 책의 38

술 익는 밤 39

마티에르, 박수근展 40

냉장고 토르소 41

미역이 불을 동안 42

쐐기를 박다 43

시외버스 정류장 44

제3부

방울들 47

시는 왜 짠가 48

젖은 시 49

시가 되는 밤 50

수국과의 하루 51

로즈타투 52

포괄적인 수국 53

수국을 위한 변명 54

난청에 들다 55

극세사 이불의 효용성 56

자목련 봉오리 57

좋아서 좋은 것들 58

다시 그 섬에서 59

제4부

돌멩이의 내력 63

이팝꽃 변천사 64

지구는 지금 65

산의 몸통이 잘렸다 66

태풍전야 67

행운목은 행운이다 68

위험한 우회전 69

노인과 길 70

고독이 죽었다 71

이슈와 티슈 72

능행 73

갇힌 봄 74

음소거의 계절 75

익숙한 무대 76

제5부

청라언덕 79

고분고분 가을 고분 70

달과 구름 81

여름 등산 82

강원도의 여름 83

그렇게 가을은 84

거울 같은 겨울 아침 85

어머니의 손톱깎이 86

시보다 먼저 87

무채를 쓰고 시를 썰고 88

무심천 89

국립경주박물관에서 90

해설 / 공명하는 경험적 진실_허희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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