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비운 투명의 피 초록의 저 몸부림
기다림 흰 꽃으로 피네 미나리도 꽃 피네'

흰 꽃으로 피어난 미학적 기억의 울림
- 시조시단의 장인(匠人), 정희경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희경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미나리도 꽃피네』가 작가 기획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정희경 시인은 서정시의 한 양식인 현대시조를 통해 기억의 과정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우리 시조시단의 장인(匠人)이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과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문학도시》 편집장과 《어린이시조나라》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에도 선정될 정도로 좋은 시조를 창작해왔다.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부산시조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시조집으로 『지슬리』 『빛들의 저녁시간』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미나리도 꽃 피네』, 평론집으로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 등의 저서가 있다.
이번에 펴내는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는 5부로 나뉘어져 총 70편의 시조를 수록하고 있다. 「시인의 말」에서 “잊고 살았다/미나리도 꽃 핀다는 것을//그냥/오래 두고/기다리기로 했다//미나리가/꽃필 때까지”라고 썼듯이, 그동안 망각했던 것을 오래도록 기다리면서 기억하려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때 시인에게 ‘시조’라는 정형 양식은 삶의 구체성을 담아내는 단정한 그릇이요, 내밀한 심정 토로를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음악이요, 가감 없이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성찰하게 해주는 섬세한 기록으로 거듭나게 된다.
정희경 시인은 “미나리로 대변되는 작고 여린 것들도 오래 두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꽃이 필 것이다. 스스로 자생력을 가지고 일어설 때까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어떤 물리적인 힘도, 권력도 가하지 않고 그냥 기다려 주기로 했다. 그럼 이 땅의 작고 힘없는 것들, 밟히고 베이는 것들도 꽃피는 번영의 시간이 꼭 올 것이다. 내가 시조로 그들을 응원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이처럼 정희경의 이번 시조집은 그가 아프게 통과해온 시간에 대한 재현의 순간을 담으면서 지금도 소용돌이치는 인상적인 장면들에 자신의 열정을 헌정하는 속성을 견지한다. 시인은 지나온 시간을 추스르는 가운데 삶의 본질에 대해 속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이때 그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삶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 의지로 이어지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삶의 내력을 회상해가는 성격을 띠면서 자기 성찰에 오랜 시간을 바쳐가는 언어적 결과물로 다가온다.
생명 현상에 대한 해석과 기억의 인화(印畫)
우리는 이번 시조집을 통해 정희경 시인이 일상의 소소한 결들을 통해 삶의 본질을 투시하는 과정에 흔연히 동참하게 된다.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사물의 존재 방식과 삶의 본질을 유추하는 간접화된 방법을 줄곧 지향해간다. 결국 시인이 포착한 사물의 존재 방식은 구체적인 삶으로 치환되면서 존재의 심층에 가라앉은 삶의 이법(理法)에 대한 만만찮은 사유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다양한 사물의 존재 방식을 통해 삶의 비의(秘義)에 도달하려는 이러한 시인의 설계가 우뚝하기만 하다. 그 순간 정희경 시조의 지표는 사물 속에 깃들인 생명의 원리에 대한 사유를 수행해가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법한 이법을 담아내는 데 남다른 적공을 들이는 시인의 시선은, 오랜 시간 쌓아온 연륜이 묻어나는 미더운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생명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표현을 구축해간다.
밭에서 따온 지가 한 시간도 안 됐심더
투박한 1톤 트럭 흥정이 한창이다
노랗게 물들어버린 운촌시장 길거리
장마도 올라카고 보관도 안 되고예
긴 해에 얼굴마저 누렇게 익어가는
속까지 타들어 가서 단내 풀풀 참외들
― 「하지」 전문
시인은 해가 가장 길고 무더운 하지(夏至)에 밭에서 따온 지 한 시간도 안 된 참외들을 트럭에 싣고 와 팔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기록한다. 참외로 노랗게 물들어버린 “운촌시장 길거리”는 그렇게 흥정이 한창인 생산과 소비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긴 해에 얼굴마저 누렇게 익어가는” 참외들이 “속까지 타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여름날의 한순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생명의 현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정점의 과실이 속까지 타들어가는 순간을 통해, 영남 방언의 살가운 표현을 통해, 시인은 생명의 현장이 가지는 한 장면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개망초 흐드러져 둔덕에 피고 피고
베이고 베인 몸 미나리도 꽃이 피네
흰 물결 출렁이는 팔월 뭇별들이 내렸나
발목을 물에 담근 베인 자리 싹이 올라
속 비운 투명의 피 초록의 저 몸부림
기다림 흰 꽃으로 피네 미나리도 꽃 피네
― 「미나리도 꽃이 핀다」 전문
시조집의 표제를 품고 있는 이 낭송 지향의 시편은, 둔덕 가득 피어 있는 개망초와 여름밤 별들의 흰 물결처럼 핀 미나리 꽃을 바라본 시인의 황홀한 감각을 형상화하고 있다. 베인 자리에서 싹이 나고 “속 비운 투명의 피 초록의 저 몸부림”처럼 피어난 미나리 꽃을 두고 시인은 오랜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한다. 「시인의 말」에서 오래 기다리겠노라고 피력한 부분과 고스란히 겹치는 이 고백 앞에서 우리는 강인한 생명의 모습과 그것을 투명한 삶의 비의로 전환시키는 시인의 필치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의 작품을 읽음으로써 정서적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황적 충격을 받기도 하며 감각의 풍요로움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때 그의 시조에 나타난 정서는 생명의 가치에 대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 ‘참외’나 ‘미나리 꽃’ 같은 자연 사물을 통해 다양한 미학적 파문을 그리면서 자신의 시조 안에 생명 현상에 대한 해석과 기억의 인화(印畫)를 든든하고 은은하게 이루어간 것이다.
공동체적 울림을 새겨가는 기록자로서의 의지
서정시의 욕망은 시인 스스로 꾸려온 삶에 대한 회상과 그것을 토대로 한 순간적 인상의 점(點火) 과정에 있다. 정희경 시인의 미학적 성취 역시 이러한 속성에서 말미암는다. 하지만 그는 인생론적 성찰 못지않게 공공적 시간의 흐름을 들여다보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다. 이는 커다란 시간의 흐름을 따라 우리의 삶을 기록하고 바라보려는 시선과 궁극적으로 연관되는 것이다. 이때 시인은 등량적으로 분절된 시간이 아니라 삶의 구체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속적 시간을 귀중하게 가다듬는다. 이처럼 정희경의 시조에서 우리는 공공적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것을 가장 단단하고 풍부한 언어로 각인하려는 ‘기록자’로서의 남다른 의지를 만나보게 된다.
잎 떨군 맨 가지에 고욤의 이름으로
제 속을 다 꺼내어 씻어 놓은 달의 얼굴
새벽을 점점이 밝힌 횃불 올려 서 있다
― 「충렬사 감나무 - 무명용사의 위패」 부분
부산 안락동 충렬사에 꿋꿋한 감나무 하나가 푸른 감을 무수히 달고서는 “저녁답 촛대”로 가을 불을 켜고 있다. 충렬사 안에 찾아온 가을 황혼의 고요가 수문장을 깨우고, 이어지는 어둠을 따라 “제 속을 다 꺼내어 씻어 놓은 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렇게 “새벽을 점점이 밝힌 횃불 올려” 서 있는 충렬사 감나무를 통해 시인은 ‘무명용사의 위패’를 기록하고자 한다. ‘무명(無名)’과 ‘용사(勇士)’가 결속하면서 역사의 어둠을 밝힌 시간이야말로 굳건한 존재자들에 의해 가능했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제 “아래아(·)도 반치음(△)도 사라진 21세기”(「카톡 언해」)에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좇아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거듭 실감하게 된다.
서 있는 소들처럼 막사는 버티었다
팔려가지 않으려고 힘을 준 다리 기둥
벽면에 소들의 울음 펄럭이고 있었다
― 「소막마을」 부분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수탈되어 가는 소를 위해 지은 소막사를 한국전쟁 때 피난민 주거지로 사용하면서 형성된 이름이다. 막사는 팔려가지 않으려고 완강하게 다리에 힘을 준 소들처럼 오랜 세월을 버텼고, 그 벽면에는 “소들의 울음”이 아스라하게 펄럭이고 있다. 기울어진 지붕 위에 열려 있는 환기창, 전봇대의 체온처럼 이어진 “실핏줄 언덕배기”에는 아직도 “저 뱃길 따라가면 고향에 닿아질까” 하는 황소걸음과 아기 울음이 동시에 “무적(霧笛) 소리”처럼 여울지고 있다. 그렇게 “어두운 밤 끌어주고 사라졌다 다시 오는”(「씨간장」) 시간은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어느새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희경 시인은 우리 삶 곳곳에 배인 폐허와 불모의 상황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역동성을 희원하는 역설의 시편들을 써간다. 삶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투시하는 공공적 기억을 통해 언어 생성을 통해 존재 생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의 동일성에 지속적 영향을 끼치는 원초적인 힘이 되어주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적 울림을 새겨가는 기록자로서의 의지를 가지게끔 해준 것이다.
우리 시대 삶의 축도(縮圖)로서의 시조
정희경의 시조는 인간 내면의 파동과 그것을 감싸는 언어에 의해 비로소 형태를 얻어가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서정시의 존재 이유가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그것의 궁극적 긍정이라는 점에서, 정희경 시인의 이러한 긍정의 마음은 그의 시조가 가지는 예술적 차원을 필연적으로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우리 시대가 문학조차 퇴영의 그림자를 길게 끌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러한 긍정의 힘은 서정시의 역설적 정체성과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더없는 지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정희경의 시조는 우리로 하여금 상처와 사랑의 힘을 동시에 알아가게끔 해주면서, 삶의 매우 구체적인 풍경과 장면을 수습하는 구체성 또한 경험하게끔 해준다. 암시적 서사성과 함께 단정한 언어적 매무새가 우리 시대 삶의 축도(縮圖)로서의 시조를 경험하게끔 해주는 세계로서 우뚝하기만 하다.
또한 ‘굴광성(屈光性)’에 대한 관찰과 소견을 표현한 「굴광성 소견 2」라는 시편은 굴광성을 띤 꽃의 속성을 보여주면서도 그 이면에 그늘에서 저물어가는 하루를 배치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빛’과 ‘그늘’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특별히 ‘인력시장’이라는 기표가 ‘굴광성’과 대조되면서 삶의 아픈 심부(深部)를 환기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층적 의미를 담고 있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람이 내린 곳에 쌓여 있을 별똥별”(「종이비행기」)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우리 주위의 삶을 한편 ‘빛’으로 한편 ‘그늘’로 품어낸 가편이라 할 것이다.
정희경 시조가 부여하는 이러한 삶의 실감들은 변방의 존재자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암시하는 시선을 건네준다. 그래서 우리는 따스하고 낮은 시선을 보여주는 그의 시편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고 위안해가는 마음이 추상적 전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변방의 존재자를 통한 구체적 실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느리고 낮은 존재자들을 향한 시선의 실감과 역동성이 거기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발견한 ‘동네시장’이나 ‘인력시장’이 바로 그 현장의 한복판일 것이고, 정희경의 시조는 이러한 공간을 통해 우리 시대의 삶을 충실하고 풍부하게 담아낸 매끈한 축도로 다가오는 것이다.
축축한 호주머니 한 줌의 울음까지
세상을 끌고 다닌 눅눅한 밑단까지
내 옷장 구석구석에 웅크리던 울 엄마
몇 날의 눈물마저 한꺼번에 담아가서
홀쭉한 무덤가에 노란 꽃 가득 피네
뽀송한 햇살 한 줄기 이승으로 보낸 꽃
― 「제습제」 전문
‘제습제’는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여 습도를 낮추기 위해 쓰이는 물질이다. 시인이 호출한 ‘울 엄마’는 마치 축축한 호주머니에 들어 있던 한 줌 울음과 눅눅한 밑단까지 품으시면서 “내 옷장 구석구석”의 습기를 없애주셨다. 그렇게 물기를 다 거두시고 몇 날의 눈물마저 담아가신 어머니는 무덤가에 가득 피어난 노란색 꽃처럼 “뽀송한 햇살 한 줄기 이승으로” 보내고 계시다. 어느새 ‘축축함/눅눅함’은 ‘뽀송함’으로 존재 전환을 치르면서, 오랜 시간 참여와 성찰의 기회를 꾸려가는 시인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두고 온 룽다 위로 흩날리는 신의 언어”(「야차굼바」) 혹은 “정수리에 꽂히는 하늘의 죽비소리”(「바심하다」)처럼 오랜 시간이 던져주는 신성하고 단단한 소리가 ‘시인 정희경’의 성숙을 가져다준 셈이다.
몸이 쓴 글자들이 팔십 평생 함께 왔다
작대기가 꼬꼬장해 콩이나 쪼매 심고
할매들 집으로 가는 길 이름 석 자 빛난다
― 「칠곡할매체」 부분
시인의 시선이 가닿은 형상에 ‘칠곡할매’들이 있다. 이분들은 칠곡에서 늦게 교육을 받아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이 서투르게 쓴 글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칠곡할매체’는 고단한 우리 역사의 한순간을 그대로 소환하고 있다. 그 글씨들은 어느새 굽이진 길을 돌아와 “수천 장 쓰고 또 쓴 입말이 씨가” 되는 과정을 거쳐온 것이다. 그렇게 “할매들 집으로 가는 길”에 이름 석 자들이 아름답게 빛을 뿌리고 있다. 할머니들의 이러한 순간은 “오래된 벽면에 타오르는 불의 꽃”(「플라밍고 혹은 플라멩코」)처럼 “어디든 길을 내면 내 길이 아니더냐”(「참깨를 심다」) 하는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는 “정희경의 시조를 눈으로 보면 단정한 한글로 공들여 쌓은 탑 같은 ‘글맛’이 보인다”며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느껴지는 ‘말맛’은 마음을 흔든다.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며 희로애락을 건드리는가 하면, 온 바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덮치듯 크고 깊은 감동에 빠뜨리기도 한다”고 언급한다.
시조가 운명적으로 견지하는 율격적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최근 우리의 정형 미학은 매우 활달하고 섬세한 서정을 굳건하고 다양하게 펼쳐가고 있다. 정희경의 시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사물 속에서 정서의 섬세한 결을 유추해내는 방법론과 그것을 사랑의 형식으로 바꾸어가는 활달하고 섬세한 서정일 것이다. 그만큼 그의 시편에서 서정의 원리는 구체적 사물에서 시작하여 삶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어간다. 그 사랑의 에너지가 사물 이면에서 들리는 소리에 민감한 감각을 낳고 있는 셈이다.
유성호 교수는 해설에서 “정희경의 시조는 현실에 근접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적 꿈의 세계를 마련하여 그 경계선에 우리의 정체성을 세워가는 세계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전해진 회감回感의 정서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는 서정 양식의 핵심 기율을 여지없이 충족하게 된다.”고 평한다.
흰 꽃으로 피어난 미학적 기억의 울림을 담아낸 이번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는 만만찮은 무게로 주어졌던 삶의 무게를 견뎌가면서 그 지층을 은은하게 돌아보게 한다. 더불어 최근 한국 시조시단이 거둔 최량의 사유와 감각을 만나게 하는 동시에 진정한 위안과 치유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정희경 시인의 쓸쓸하면서도 그윽한 메타포가 느껴지는 시조의 행간 속으로 스며들어보자.
정희경 시인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2008년 전국시조백일장 장원과 2010년 《서정과현실》 신인작품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현재 《문학도시》 편집장과 《어린이시조나라》 편집주간을 맡고 있으며 ‘영언’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받았고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에 선정되었다. 가람시조문학신인상, 올해의시조집상, 오늘의시조시인상, 부산시조작품상을 수상했다. 시조집으로 『지슬리』 『빛들의 저녁시간』 『해바라기를 두고 내렸다』 『미나리도 꽃 피네』, 평론집으로 『시조, 소통과 공존을 위하여』가 있으며 이광 시조시인과 공저 e-book영문시조집 『K-Poem SiJo – the Root of Korean Wave』를 펴냈다.
시인의 말
잊고 살았다
미나리도 꽃 핀다는 것을
그냥
오래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미나리가
꽃필 때까지
2024년 여름, 정희경
추천사
“내가 시조를 좋아하고 있었구나!” 정희경 시인을 처음 만나 시조 이야기를 듣던 날, 이런 생각을 했다. 학창 시절을 마지막으로 시조와 멀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시조는 우리 글로 빚어내는 우리 마음의 고갱이다. 인식하지 못했을 뿐, 시조는 가장 낯익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장르였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함께한 시조가 현대에 와서 다시 주목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정희경의 시조를 눈으로 보면 단정한 한글로 공들여 쌓은 탑 같은 ‘글맛’이 보인다. 세상 만물과 인간을 보며 생각을 벼리고, 가장 적절한 말을 고르고, 제자리에 앉히고, 솜씨 좋은 목수가 정성 들여 대패질하듯 다듬어 빚어내는 일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느껴지는 ‘말맛’은 마음을 흔든다. 강물처럼 천천히 흘러가며 희로애락을 건드리는가 하면, 온 바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덮치듯 크고 깊은 감동에 빠뜨리기도 한다.
정희경 시인의 신작 시조집 『미나리도 꽃 피네』가 다시 한번 내 안의 ‘시조 감상 유전자’를 흔들어 깨운다.
- 박현주(북칼럼니스트)
본문 속으로
마린시티 빌딩들
해무에 키 잘렸다
햇빛이 오기 전에
바람이 뜨기 전에
아찔한 높이를 산다
반값이다 떴다방
― 「일기예보 2」 전문
몸을 세워 붙어 있나 납작하게 엎드렸나
산소방울 올라오는 죽집 앞 장승 같은
몇 몸은 얼싸안고서 찬 얼굴을 부빈다
별점을 놓쳐버린 화면은 꺼져있다
듬성듬성 테이블에 그늘이 자라나고
자꾸만 저어대는 저녁 죽그릇이 식었다
차가운 유리벽에 수온은 오르는데
온몸에 돋은 빨판 세상에 흐물거린다
주광색 서늘한 간판 수족관이 흐리다
― 「생생 전복죽집 – 동네시장」 전문
아파트 작은 화단 붉은 줄 처져있다
걸음에 스칠까봐 웃자란 허리 감싸
백일홍 휘청이는 아침 중력에 기대선다
아파트 부푼 몸집 그늘진 오후 내내
빛을 향한 지독한 벽 인력시장 길이 길다
붉은 줄 넘지 못한 채 해가 진다 꽃 진다
― 「굴광성 소견 2」 전문
소사나무 흰 몸들이 분화구를 내려간다
바람에 쓸리거나 바람에 맞서거나
깊이가 훤히 보여도 짚을 수 없는 밑바닥
온몸을 적셔오는 눈물은 고이지 않아
뼈마디 잇고 이어 분화구에 닿는 오늘
생각은 둘레에 두고 달 하나가 굽어본다
봄날은 잎을 부르고 잎들은 꽃을 불러
소사나무 흰 뼈에 아침이 피고 있다
다랑쉬 잃어버린 마을 동굴은 묻혔는데
― 「다랑쉬오름」 전문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일기예보 2 15
오경 알부잣집 16
다랑쉬오름 17
제습제 18
크릴 오일 19
둥근 울음 20
밥통 21
바오밥나무 22
이런 봄날 23
드라이버 24
바람을 맞는 남자 25
카세트테이프 26
닭발나무 27
해마 28
제2부
하지 31
내부 수리 중 32
외이도골종(外耳道骨腫) 33
미나리도 꽃이 핀다 34
출렁다리 35
종이비행기 36
용천각 37
구갑죽(龜甲竹) 38
그림자만 사는 집 39
태화로터리 40
생선가게 41
참깨를 심다 42
오마주(hommage) 43
4월, 풍경 2 44
제3부
갑오징어 47
플라밍고 혹은 플라멩코 48
폐지 내는 날 2 49
창령사 나한상 50
말 51
추분(秋分) 52
탄소발자국 53
신이네 과일동산 54
가덕대구(加德大口) 55
화산곡지, 바람꽃 56
커피 자판기 57
복원 12 58
흑꼬리도요 한 마리 59
복원 14 60
제4부
칠곡할매체 63
씨간장 64
별점 65
소막마을 66
도깨비 장터 67
물탱크 68
굴광성 소견 2 69
무인점포 70
도시 표해록 71
애물단지 72
충렬사 감나무 73
맹지, 개발지구 74
화성성역의궤 75
불을 먹이다 76
제5부
갈매기 주점 79
카톡 언해 80
생생 전복죽집 81
야자매트 82
운촌 2구역 재개발지구 83
바심하다 84
복원 16 85
야차굼바 86
보물찾기 87
춤(chum) 88
시인의 우편함 89
아부심벨 90
모란 91
겨울밤, 호스피스 병동 92
해설
흰 꽃으로 피어난 미학적 기억의 울림_유성호 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