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배기 부지깽이로 잉걸불을 쑤석거릴 때마다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꽃은 불티로 삭지 않고 부엉새 우는 밤에 별이 되리라

새 삶을 꿈꾸는, 나비 문양에 적힌 한(恨)의 시학
- 자연의 교감 속에서 생명을 얻는 이봉명 시집 「모닥불」
무주 적장산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를 쓰는 이봉명 시인이 새 시집 『모닥불』을 작가 기획시집으로 출간하였다. 저자 이봉명 시인은 1956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1991년 《시와 의식》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포내리 겨울』 『지상의 빈 의자』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 산문집 『겨울엽서』 등을 펴냈다.
이번에 펴낸 이봉명의 시집 『모닥불』은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총 47편의 가편을 수록하였다. 산동네, 농사꾼, 갈수록 인적이 끊어지는 적막감이 시의 발화점이지만 사람의 체온을 간직한 그의 시편은 ‘진디근한’ 생명력을 가졌다. 문명적 회로에 감겨 시행의 앞뒤 문맥을 고의로 훼손하는 요즘 시들과 분명한 거리를 두고 시의 새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어들과 시 속의 행위가 맞물려서 새 형상을 얻는 메타언어의 면모는 한국시의 미래를 보여줌에 손색이 없다.
잘 만난 것만큼
헤어지는 것도 살가워야 하리
산에 진달래꽃 피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써둔 편지를
집 나간 어머니가 돌아와
숯골날망 양지바른 쪽에
꼭꼭 잘 묻어주던 날
소나무 그늘에
진달래꽃 피었다
- 「봄날」 부분
시적 장치 따위에 간섭받음이 없는 시의 행로가 정갈하다. 시는 아버지의 죽음보다 “집 나간 어머니가 돌아와” 필시 유서였을 아버지 편지를 읽어보는 행위를 먼저 보인다. 아버지 무덤 곁일 “숯골날망 양지바른 쪽에” 편지를 땅에 꼭꼭 묻어주는 행위로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진달래꽃, 여기에 시상을 집중시킨다.
집 나간 어머니가 돌아와 남편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유서를 읽는 행위는 이 시에서 가장 압도적이다. 시의 내용은 평탄해 보이지 않는데 시상은 고요하고 따뜻하다. 자연현상에 불과한 진달래꽃이 식물성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과 유서, 가출했던 어머니, 그 유서를 땅에 묻는 행위 등이 맞물려져서 진달래꽃이 피는 순간- 시에 한(恨)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한은 국어책에서 배운 “이별의 정한”이 아니라 삶에 맞물려 있는 비극성을 껴안는 화해이자 끝끝내 삶을 사랑한다는 시의 웅숭깊은 숨결이다.
「봄날」에는 오랜 시간 쓸개 간장이 녹아나는 고된 행로를 통과하면서 원망이 한으로 숙성되는 과정이 나타나 있지 않는다. 그러함에도 한을 느낀다. 이 시는 이 땅 누구의 삶인들 서럽지 않겠냐는 듯 “잘 만난 것만큼/ 헤어지는 것도/ 살가워야 하리”의 첫 연을 다시 읽도록 유도한다. 그 자리에도 진달래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시의 안팎에 한스러움의 빛깔이 묻어나는 또 한 편의 시 「오래된 굴참나무도 비에 젖는다」는 쓸개 간장이 녹아들 새댁의 시간이 언제 아름다워질지 모르겠다는, 그러나 그것도 삶의 미학이라는 수묵화 한 폭을 얻는다. 더 나아가 시의 상황을 냉정하게 생략한 비워냄의 미학은 「총총 빛나는 별들에」, 「제삿날 밤에」, 「그믐달」, 「저녁노을」 등에서도 엿보인다. 시인이 시현실에 간섭함이 없고 언어의 군살을 제거한 깔끔한 시상은 삶에 필연처럼 따라붙는 비극성을 한 또는 한스러움의 빛깔로 껴안는다. 그리고 인간사에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은 뜻하지 않은 데서 웃음보가 터지기도 한다. 이것을 우리는 해 학이라고 부른다. 찬찬하고 고요한 시편들도 시를 읽는 맛을 더해 주지만 일상의 구겨짐을 해맑게 펴주는 개구짐도 시 읽는 맛을 돋우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이 슬픔을 내재한 웅숭깊은 삶의 지혜라면 해학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언어적 장치이다.
물푸레나무 푸른 날에 새우들이 긴 수염을 쭉 빼고
산동네 사돈의 팔촌까지 부엌과 토방문을 삐그덕 열었다 햐, 됫박으로 잡아왔구나, 이따금 뇌깔스러운 여자의 소리 너머 궁색하게 뒷간문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오늘처럼 홀시어미와 머리끄댕이 뽑아 들고 코피 터진 날 에는 너나 가릴 것 없이 줄을 서서 풀대기에 끓인 새웃국을 바가지째 들이마시며 종일 막걸리를 찾아도 좋았다
가끔 모가지를 꼿꼿이 치켜올리고
빳빳하게 꼬장을 꺼내어
빨랫줄에 널어 말리곤 하였다
- 「뇌깔스러운」 전문
시에 생동감이 넘친다. 새웃국을 나눠 먹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표정에 구겨짐의 표정이 지워졌다. 홀로 된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머리채 붙들고 한다래끼 단단히 벌인 날에 누군가가 새우를 됫박으로 잡아왔다. 그것을 흔한 푸성귀 넣고 끓여대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방금 한다래끼 단단히 벌인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싸운 일을 금세 잊어먹은 듯 새웃국을 맛있게 먹는다.
이 시의 주인공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잘난 사람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자연의 시간에 몸을 맡긴 순박한 사람들이다. 시인은 이들을 시의 전면에 내세우곤 한다. 그리고 나비가 되어, 나비 문양이 되어 이들이 엮어낸 삶의 행위를 관찰한다. 사람다움의 자리를 넓힌다. 잘나고 똑똑한 이들의 삶보다는 평범한 이들의 개구진 행위에 애착을 보이는 시편은 「모닥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고주배기 밤나무 썩은 밑둥이며 도끼에 찍히다만 솔갱이들을 몽땅 끌어다가 불이 붙였다 검은 연기 뿜어내며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검은 연기 빠져나간 뒤 솔갱이끼리 붉게 어울려 이글거리는 불, 핏기 가신 동백꽃처럼 예쁜 불, 꽃불
짝눈이 동철이, 몽당모가지 철근이, 길 가다 자빠져 팔 부러진 기광이 메주콩 주워 먹고 배탈난 얼굴로 모닥불 앞에 앉았다
동철이 동생 봉분이가 꼬시랑 머리 태우며 쪼그라진 양은 냄비에 콩을 볶았다 불이 붙어서 타오르는 고자배기 부지깽이로 잉걸불을 쑤석거릴 때마다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꽃은 불티로 삭지 않고 부엉새 우는 밤에 별이 되리라
모닥불에 비친 얼굴들이 탈바가지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 「모닥불」 전문
모닥불 앞에 모인 얼굴들이 정겹다. 짝눈이, 몽당모가지, 팔이 부러진 기광이까지 “메주콩 주워 먹고 배탈 난 얼굴로” 모였으니 이거 참 구경할 만하게 되었다. 모닥불을 쬐며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서로의 모양새를 서로가 트집 잡으며 고소해했을 것 같다. 나무토막들만 타는 게 모닥불이 아니라 개구진 얼굴들이 불빛에 비쳐 탈바가지를 뒤집어써야만 모닥불이라는 듯, 나비 시인의 또래들이 모닥불에 뽀짝거리는 정취가 시의 활력을 돋운다.
50여 년 전의 그 밤에 “고자배기 부지깽이로 잉걸불을 쑤석거”리며 불꽃이 튈 때마다 “불꽃은 불티로 삭지 않고 부엉새 우는 밤에 별이 되리라”라는 기대감은 어찌되었을까. 그 밤을 함께 했던 벗들, 가난해서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대도시로 뿔뿔이 흩어졌을 벗들은 어디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을까. 아직도 시인의 가슴 속에는 그날 밤의 불꽃이 툭툭 튀어 오를까.
살아갈수록 허망해지는 삶의 자리, ‘우리’라는 말이 갈수록 퇴색하는 삶의 자리에 모닥불이 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시 속에서 모닥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모두가 타인이 되어가는 오늘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되짚어 보는 것이다.
그동안 이봉명 시인이 보인 시는 산동네 일상의 사실에 토대를 두었으므로 왜곡된 형상을 강요하지 않았다. 현대인의 불안한 정서를 동어반복의 피곤한 회로로 감아 보인 적이 없고 텅 빈 기표에 불과한 휘발성 언표도 없었다. 주체와 대상 간의 접촉 거기서 촉발되는 시의 발화점으로부터 언어에 색깔을 입히는 이미지의 펼침, 종결어미에까지 세심하게 공력을 들인 시들을 선보였다. 요번 시집에서도 이런 언어의 촉수는 여전히 빛난다. 시집 『모닥불』의 한 특징으로 요약되는 산문시들도 이봉명 나비의 언어 감각을 튼실히 뒷받침하면서 서정시의 범주를 확장한다.
긴장해서 그런지
몸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의자에 올라서서 상을 받아야 하는데
그 의자 위로 발이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나 비틀거리며
올라서 보려고 했지만
끝내 올라서지 못하고 말았다
뒤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내 몸은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놀라
아예 꼼짝하지 않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중앙초등학교 전체 회장을 맡고 있는 친구의 눈에 눈물이 반짝하고 빛났다 나하고 친구가 된 지 일 년이 조금 안 되었 다 교감 선생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큰 눈에도 눈물 이 가득 고여 금방이라도 주루룩 흘러내릴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주루룩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로 쓱 문질러 버렸다
- 「운동장」 부분
자신의 어린 날과 만나는 일이 꼭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현재로 호출하고 싶은 따뜻한 기억보다도 몽땅 지우고 싶은 기억이 더 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난과 관계된 기억은 마음을 흐려놓기 일쑤다. 무밥 시래기밥으로 환기되는 시절은 코흘리개의 눈길에 묻어 있는 노랑나비의 문양마저 어둡게 색칠해 버리곤 한다. 아쉽다. 그러함에도 모두의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운동장에서 맘껏 뛰어놀고 싶은 속내가 “운동장은 한 번도 마음껏 달려 보지 못한 나를 언제나 무시하고 있었다”로 귀결되는 언술은 모두의 눈길을 운동장으로 쏠리게 한다. 또래들이 집으로 흩어진 뒤에 서 보았던 운동장, “아무리 넘어져도 피가 날 것 같지 않은 운동장에” 혼자 덩그렇게 서 있던 날에 시상식이 겹쳐진다. 무주 읍내에 있는 타 초등학교에 가서 큰상을 받는 날의 정황, 끝내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고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야속한 정황은 시 울림이란 말을 머리에 이고 은은한 메아리로 세상에 번져간다.
유폐(幽閉)된 어제가 돌연 삶의 빛깔을 띠고 꿈틀거린다. 가슴 속에 묻어둔 불씨가 눈을 틔운다. 아직 아무것도 끝난 게 없다는 듯 시의 울림에 간직된 메아리는 은하다. 삶을 껴안은 한의 무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치열성은 시가 왜 예술인지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삶에 내재한 비극성까지를 언어미학으로 펴 보인 「시인의 아내」와 「아버지께」를 쓸 수 있는 창작 동기를 발효시켰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모닥불』을 읽으면서 나비를 만난다. “당골 네 굿판이 원 없이 쏟아”지던 날에도(「그 겨울밤」) 한쪽 다리를 절었던 나비, 벗들과 감자 서리를 해 먹던 나비, 주막집에 갔다가 얽둙배기 주모에게 밉보여 아버지가 피떡이 되었던 날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비, 그 나비 문양은 사람들 곁에서 가만가만히 반짝였다.
나비는 자유를 뜻한다. 사람다움에 관심을 가진 표시이고. 이봉명 나비는 때로 햇살과 바람과 시냇물 소리를 입고 “지금까지 나를 존재케 한 삶의 동력은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키가 작고 못생겼어도 가진 게 없어도 나를 사람으로 대접해 준 이들이 있었으므로 나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런 살뜰한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그리고 또 새 인연을 맺는 관계의 연속성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문양을 건네곤 했다.
그 문양에 어린 시들이 「비 그친 뒤에」, 「말복」, 「덜깨기」, 「이웃들」, 「가을은 더 슬프지 않았다」, 「맵싸롬한 물곳죽을」, 「호미씻이」, 「아낙의 눈은」, 「외갓집」 등이다. 나비는 슬픔과 익살스러움이 한몸으로 엉겨 있는 일상 위를 날아다니며 시가 왜 사람의 얘기인지를 문양으로 그려냈다. 배곯았던 시절의 단어와 단어가 어울려 새 뜻을 얻는 나비 문양은 명백하게 오늘을 향하고 있었다. 불행한 역사와 불행한 시대에 핍박받는 삶을 진디근하게 껴안는 한이 배어 있을지언정 정보와 돈을 신앙처럼 모시고 사는 천민 자본의 색채가 묻어 있지 않았다. 나비의 문양은 사람의 숨소리였다.
도종환 시인은 “이봉명은 땟국물 주르르 흐르는 옥수수 파는 아낙의 얼굴에서 송아지 눈망울같이 맑은 눈을 보는 시인이다. 그걸 보는 게 시인의 눈이다. 쑥대가 타는 모깃불에서 쌀알처럼 반짝이는 별을 보는 시인이다. 여름 저녁 찬 밥을 말아 먹고 잠들어도 별빛이 개똥벌레로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 시인이다”고 말한다.
복효근 시인은 “이봉명 시인의 시엔 현대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근대 이전 농촌 사회의 장삼이사들의 풍속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백석이 그려냈던 그 모닥불처럼 토속적 정서가 무주 적상산 아래 궁벽한 마을을 배경으로 시에 되살아난다. 그러나 백석과 다른 점은, 지금 이 풍요로움이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한다고 언급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는 삶의 내력에 갇히지 않는 농사꾼의 오늘이자 농경문화를 무시하는 담론들에 대한 항의였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 삶의 꿈을 요구하는 나비 문양이었다. 이봉명 시인의 시집 『모닥불』을 펼쳐 문명적 삶의 아류가 아니라 사람다움의 행위를 둘러싼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생명을 얻는 순정한 시의 결을 만나보자.
저자 이봉명 시인
1956년 전북 무주출생. 1991년 《詩와意識》으로 등단. 시집으로 『꿀벌에 대한 명상』 『아주 오래된 내 마음속의 깨벌레』 『포내리 겨울』 『지상의 빈 의자』 『지상을 날아가는 소리』 『바람의 뿌리』 『가풀막』 『자작나무 숲에서』 『검은 문고리에 빛나는 시간』 산문집 『겨울엽서』 가 있다.
추천사
적상산 아래에는 외롭고 배고프고 무료한 날들을 지나 지금도 외롭고 배고프게 사는 이들이 많다. 이봉명도 그렇게 살았다. 서낭당 끝에다 화전을 일구고 살아 보려다 횃대에 목을 건 박점숙도 살았고, 얼떨결에 십수 년 다꿑아비 똥짐을 지고 사는 여자도 있고, 도회지로 도망치려고 밤마다 용을 쓰는 열아홉 살 분순이도 살았고, 짝눈이 동철이, 몽당모가지 철근이, 팔 부러진 기광이가 모닥불 쪼이며 살던 곳이다. 스무 살 새댁이 돌배기를 안고 무작정 비를 맞으면 늙은 굴참나무도 찬찬히 비를 맞는 곳이다.
이봉명은 땟국물 주르르 흐르는 옥수수 파는 아낙의 얼굴에서 송아지 눈망울 같이 맑은 눈을 보는 시인이다. 그걸 보는 게 시인의 눈이다. 쑥대가 타는 모깃불에서 쌀알처럼 반짝이는 별을 보는 시인이다. 여름 저녁 찬 밥을 말아 먹고 잠들어도 별빛이 개똥벌레로 날아다니는 꿈을 꾸는 시인이다.
따뜻한 슬픔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 슬픔의 입자들이 모여들어 투명하게 반짝이는 별, 형벌이면서 구원인 별, 기쁨, 슬픔, 아름다움, 아픔이 삶에 똑같은 비중으로 있다는 깊은 언어를 우리에게 건네는 시인, 가슴 속에 빛나는 별 하나로 살아가는 시인, 이봉명. 적상산 아래에서 반짝이는 그 별, 우리 곁에서 오래오래 빛날 것이다.
- 도종환(시인)
이봉명 시인의 시엔 현대문명에 훼손되지 않은 근대 이전 농촌 사회의 장삼이사들의 풍속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들의 삶은 비록 궁핍하고 누추하지만 질박하고 건강한 생기가 돈다. 아이들은 모닥불에 꼬시랑 머리 태우며 쪼그라진 양은 냄비에 콩을 볶았다. 백석이 그려냈던 그 모닥불처럼 토속적 정서가 무주 적상산 아래 궁벽한 마을을 배경으로 시에 되살아난다. 그러나 백석과 다른 점은,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근대 이전의 삶을 사실화풍으로 그려냄으로써 오늘의 우리 사회가 얼마나 개인이기주의에 물들고 자본과 물질주의에 병들었는지 돌아보게 하며 “지금 이 풍요로움이 거저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한다는 것이다.
- 복효근(시인)
시인의 말
이산 저산 갈황색미치광이버섯이
온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
젖은 꽃잎처럼 종종종 반짝이는 별을
마을 입구 둥구나무 가지에 마냥 걸어두고 싶어서
좀이 쑤시고, 배곯던 고향에서 자꾸자꾸
까마귀 떼가 저녁나절 내내
늙은 밤나무 가지 타고 울었다.
여름밤이면 탱자나무 가시로
고동을 쏙쏙 빼
아이들 입 속에 넣어 주던 어머니와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분간 못 하는
개맹이 없는 마을에서 사는 게
나는 더 없이 좋았다.
2024. 10. 적상산 아래 포내리에서
이봉명
본문 속으로
달이 지고 나서도 어머니는 호롱불을 끄지 않았다
넋이 빠졌는지 탯방문을 넘어가는 어머니 허리가 더 굽었더
지난가을부터 나는 한쪽 다리를 절었더
당골네 굿판은 원 없이 쏟아졌다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훔쳤다
찢어진 삼베적삼 소맷자락이 펄럭이는 밤이면
별똥이 자꾸 서쪽으로
서쪽으로 또 떨어지고 있었다
- 「그 겨울밤」 , 본문 13쪽
늙은 굴참나무 사이로 찬찬히 봄비가 내린다
스무 살 새댁은 돌배기 안고 무작정 비를 맞는다
삼베적삼은 온몸을 끌어안고 지긋이 비틀리고
재수없게시리 오래된 굴참나무 가지에서 까마귀 울었다
새댁 왼쪽으로 쓰러져 비를 맞는 아이는
가만가만히 어미의 젖을 만지고 있다
- 「오래된 굴참나무도 비에 젖는다」 전문, 본문 22쪽
적상산 아래 사기점골 신작로 갓길에서 땟국물 주르르 흐르는 볼살 터진 얼굴로 아낙은 찐 옥수수를 팔았다 콧물과 눈물범벅인 딸 얼굴에 파리 떼가 시커멓게 달라붙었고 딸을 등짐같이 업은 아낙의 눈은 송아지 눈망울같이 맑았다 날은 어제처럼 또 지나갔다
- 「아낙의 눈은」 , 본문 75쪽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그 겨울밤 13
서늘한 날 14
모닥불 16
별은 17
뇌깔스러운 18
덜깨기 19
비 그친 뒤에 20
오래된 굴참나무도 비에 젖는다 22
총총 빛나는 별들에 23
감자 서리 24
시인의 아내 26
제2부
제삿날 밤에 33
말복 34
가을은 더 슬프지 않았다 35
아주까리 기름불이 흔들리는 밤에 36
이웃들 38
괭이밥 39
항상 바우는 40
나는 빈 꿀통이다 42
어떻게 사는가 44
쑥부쟁이 45
늑대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46
산은 푸른데 48
제3부
운동장 53
그믐달 58
만남 59
맵싸롬한 물곳죽을 60
두 여인 61
흉년 끝에 가뭄 62
다시 무궁화 63
산지당골 64
아버지께 66
호미씻이 72
박점숙 씨 74
아낙의 눈은 75
제4부
산새가 얘기를 79
저녁노을 80
소쩍새 81
여름밤은 깊어지고 82
외갓집 84
싸락눈 85
떡갈나무 등걸에 86
갈황색미치광이버섯 88
기억 속의 풍경 89
봄날 90
새 한 마리의 상황 92
별들을 총총 닦아서 94
발문 / 나비 문양에 적힌 한(恨)의 시학_이병초 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