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숙한 신예’ 작가. 이런 형용모순이 등단 7년차 이경란 소설가에게 어울린다. 문인 경력이 길지 않지만 다양한 삶의 체험, 폭넓은 독서, 치열한 문제의식 때문에 그러하리라.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지금까지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다섯 개의 예각』 『사막과 럭비』와 장편소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 『디어 마이 송골매』 등을 냈다. 신문에 칼럼을 쓰고 강연회에도 자주 초대 받는다. 2024년 12월 9일 서울 용산 CGV에서 만나 커피숍에서 인터뷰했고 그날 저녁 영화 〈힘을 낼 시간〉 시사회에서 함께 관람했다.
청소년 때부터 문인 꿈을 품으셨는지요?
“대구에서 초등학생 때 집 부근 만화방을 들락거리며 만화를 엄청나게 봤습니다. 신명여고에 다닐 때는 문학소녀도 아니었고… 연세대 국문과를 86학번으로 들어갔어요. 문인은 특별한 재능을 지녀야 된다고 알았기에 대학에서 국어학을 공부할 포부를 가졌답니다. 마광수 교수의 소설론, 정현종 교수의 시론 등 문학 과목을 수강하긴 했는데 이론 위주이지 창작에 중점을 두지는 않더군요.”
연세대 출신의 걸출한 소설가들이 많은데 교유가 있었나요?
“최인호, 김영하, 공지영, 성석제, 김인숙… 이런 분들이죠. 공교롭게도 국문과가 아닙니다. 그러니 국문과 졸업생들은 콤플렉스를 느꼈는데 한강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한 방에 해소됐습니다. 하하하….”
한강은 이 작가의 3년 후배인데 입학 때부터 장편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쓴 한승원 소설가의 딸이라 해서 학과 선배들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한다.
“학자 자질이 없어서 잡지사 기자로 취업했답니다. 여원, 에꼴, 엘르 등 여성잡지에서 주로 패션, 화보를 맡았습니다. 첫 직장인 여원이 부도 나면서 저도 한동안 고초를 겪었지요.”
기자 때 소설 창작도 겸했는지요?
“잦은 야근, 출장 탓에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냈어요. 그래도 소설은 꾸준히 읽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졸리는 눈을 부비며 서너 정거장 갈 때도….”
소설을 쓰게 된 계기는?
“딸아이 학업을 뒷바라지한다고 퇴사했는데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자 좀 허탈해지더군요. 경력 단절녀를 아무도 고용하지 않을 것이고… 혼자 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이 무얼까 궁리하다 ‘소설을 써보자!’고 결심했지요.”

홀로 습작하셨는지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썼습니다. 처음 단편 하나를 탈고하니 성취감이 크더군요. 일상의 고뇌를 잊을 수 있고 뭔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 같고… 그러나 작품의 질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전문 문인들에게 배워야겠다고 판단해 2014년 중앙대 문예창작전문가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근 4년간, 7학기를 배우면서 역량을 다졌지요. 수강생이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 심화과정에 등록하기도 했답니다.”
수강하니 도움이 되었는지요?
“물론입니다. 방현석, 정지아, 손홍규, 백가흠, 정용준, 윤고은… 쟁쟁한 소설가 교수님에게서 배웠지요. 과제물인 습작을 교수님과 수강생들이 합평하는데 여러 군데 지적을 받고나면 고칠 점이 보였어요.”
그때 배운 소설 작법 노하우를 소개해주실까요?
“초고를 퇴고할 때 입으로 소리 내며 읽어봅니다. 그러면 어색한 표현이 드러나지요. 하룻밤 자고나서 이튿날 다시 읽어보면 또 미흡한 곳이 발견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음독하는 게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국내 소설가는 누구신지요?
“성석제, 박민규… 두 분 모두 해학의 달인이지요.”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오늘의 루프탑」에는 아이돌 연예인의 코디네이터 보조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당선소감에서 ‘재미없고 실용적인 나의 뇌 구조는 그대로이지만 달라진 내가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고 밝혔지요?
“기자라지만 연예인 패션 촬영 때는 행거 옷뭉치를 든 ‘노가다’였어요. 당시 체험이 작품에 반영되었지요. 저는 스토리텔러 재능이 풍부하지 않아 현장취재를 열심히 하고 꾸준히 쓰는 작가입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겸손한 말씀입니다. 단편, 장편 할 것 없이 모두 흥미진진한 스토리, 현실감 넘치는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첫 장편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에서는 재건축 예정인 아파트의 쇠락한 모습, 노량진 공무원 준비생 동향이 핍진하게 묘사되었더군요.
“서초동 무지개 아파트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삼았지요. 노량진에서도 살았고 조카아이가 ‘공시생’이었기에 체험담을 많이 들었고 저도 공무원 학원 안팎 풍경을 열심히 취재했답니다. 작품을 구상하면 현장을 찾아가 세심히 살핍니다. 뜻밖의 상황도 목격하는데 예를 들면 여의도에서 불꽃놀이를 벌일 때 노량진의 사육신묘가 붐빕니다. 그곳에서 돗자리를 깔고 앉아 불꽃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이 몰려들기 때문이죠. 다단계 피라미드 사업의 실태를 파악하려고 그들 모임에도 가봤습니다. 소설가가 머리만 굴리기보다는 발품을 팔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어요.”
주인공 대부분이 이른바 ‘루저loser’들인데 작가님의 인생 행로에서 그들과의 접점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요?
“문인이라면 당연히 소외된 자, 소수자, 마이너리티 계층을 주목해야지요. 제가 노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 강사로 간 적이 있는데 제 운명도 자칫하면 그 수강생 사이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운이 좋아 강사 자리에 서 있다고 느꼈답니다.”
신인 시절에 「라면과 홍차와 미자」란 단편이 이상문학상 우수상에 선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2000년에 이상문학상 행사가 취소되는 바람에 수상작가는 공식 발표조차 되지 않았지요. 아퀴가 지어지지 않고 불편한 나날이 한 달 넘게 지속됐답니다. 어느 선배가 ‘어깨를 두드린 손길은 여전히 있는 것’이라 위로했는데 용기를 내 다시 일어났습니다.”

“문인이라면 당연히 소외된 자, 소수자, 마이너리티 계층을 주목해야지요.
제가 노숙자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에 강사로 간 적이 있는데 제 운명도 자칫하면 그 수강생 사이에 앉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운이 좋아 강사 자리에 서 있다고 느꼈답니다.”
『디어 마이 송골매』는 착상부터 탈고까지 오랜 세월이 걸린 역작이군요. 중년 여성이 된 여고 동창생들이 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송골매 콘서트에 가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실제로 공연을 관람하셨겠네요?
“2022년 9월 11일 응원봉을 들고 가서 열광했지요. 소설 덕분에 배철수 가수가 진행하는 음악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답니다. 록 음악을 즐기는 취미 덕분에 탄생한 작품입니다.”
창작 이외에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요?
“문학탐방 해설을 맡기도 합니다. 김광섭, 조지훈, 한용운, 이태준 등 성북동 일대의 문인 생가를 문학애호가들과 함께 방문하지요. 답사 프로그램이어서 동선을 미리 세심하게 살펴 시간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여행 시절」이란 단편도 쓰셨던데 해외여행은 자주 가시나요?
“지난 15년간 한 번도 해외에 못 갔어요. 문학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시키다 보니 그렇게 됐지요. 친구들도 별로 만나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새해 들어 해외여행, 대만에 갑니다. 『오로라 상회의 집사들』이 대만과 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는데 대만에서 북토크가 열려 참석합니다. 대만판을 보니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 번자체여서 익숙하더군요. 태국판을 보고는 모기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 어지러운 비문증을 느꼈답니다. 동글동글한 태국 문자가 생소했기 때문이죠.”
지금 어떤 작품을 집필중인지요?
“최근 원고지 천 매가량의 세 번째 장편을 탈고했습니다. 1960년대, 1998년 IMF 외환위기, 2020년 등 3대에 걸친 여성 노동자의 파업을 그린 내용이에요. 퇴고중입니다.”
문학평론가 정은경 중앙대 교수는 이경란 작가의 문장이 ‘장식보다는 정직과 리얼리티를 지향’한다고 평했다. 작가는 사회성 짙은 내용의 세 번째 장편을 취재, 집필하느라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명작 출생을 기대한다.
영화 〈힘을 낼 시간〉은 좌절한 아이돌 그룹 가수 셋이 제주도 여행에서 더욱 좌절했다가 새로운 희망을 찾는 스토리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내면세계가 공허할 수 있는 아이돌 연예인의 실상을 절묘하게 그렸다. 이경란 작가는 이 영화에서도 모티브를 얻어 새 작품을 구상하지 않을까. ‘만화광’이었던 작가의 DNA를 물려받았음인지 딸은 요즘 웹툰 회사에 다니며 만화 보는 게 직업이 되었단다.

고승철 소설가, 아마추어 성악인. 경향신문 파리특파원, 동아일보 경제부장 및 출판국장 등으로 신문사에서 일했고 나남출판 사장, 문학사상 사장 역임. 장편소설 『은빛 까마귀』 『개마고원』 『여신』 『파피루스의 비밀』 『소설 서재필』, 시집 『춘추전국시대』.
* 《쿨투라》 2025년 1월호(통권 127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