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가능하지만 경험 바깥인: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가능하지만 경험 바깥인: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5.03.2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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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위그, 〈리미널〉, 2024-현재.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작가, 갤러리 샹탈 크루젤,
마리안 굿맨 갤러리, 하우저&워스, 에스더 쉬퍼, 타로 나수, 안나 레나 필름 제공. 리움미술관 제공

현대미술의 대규모 스펙터클과 복잡한 개념성은 대중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 점이 컨템포러리 아트에 대한 비난과 악평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타 문화예술 분야와 구분해서 현대미술의 시각적 멋짐을 동경하거나 전위적 성향을 존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매체 순수성에 입각한 자기 지시적 추상화를 ‘반反사회적 예술 엘리트주의’라고 공격하던 담론과 비평은 이제 미술 이론서의 고전적 지문으로 읽힐 뿐이다. 또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후기자본주의 비판의 일환으로 탈 거대서사·탈 매체·비물질·비 오브제, 타자 지향을 외치던 작업들은 아트 바젤의 “무제한Unlimited1 섹션처럼 막강한 미술시장에 효과적으로 수렴해 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모가 2000년대 초반부터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동안 미술인art people도 지속적으로 새로 주조되며 세대교체가 되었고, 집단의 취향과 성격도 무척 다원화했다.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와 제4차 산업혁명에 연동된 IT산업, AI테크놀로지가 그 변화의 가동성을 떠받치고 견인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현대미술의 새 감상자 대중이 그러한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과 디지털 기술혁신 생태계의 원주민native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감각에 쿨하고 스펙터클한 체험 기회를 제공하면서 지적으로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판단과 참여를 요구하는 미술을 이 원주민들은 꺼리지 않는다. 꺼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테면 ‘이것이 바로 현대미술This is contemporary art2이라는 최첨단 미술의 자의식이 공기처럼 흐르는 미술관 문화를 한껏 즐기고 싶어 한다. 예컨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기획전을 찾는 일반 관람객의 양적 증가(2024년 총 관람객 200만 명 돌파)나 리움미술관의 해외 현대미술가 개인전에 쏠리는 대중의 폭발적 관심(2023년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 6개월, 총 관람객 25만 명)이 그 미적 태도 전환의 강도를 말해준다.

피에르 위그, 〈주드람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 껍데기.
이시카와 재단 소장. 《리미널》 전시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사진: LESS 레스

고도로 생성적인 미술

그런데 리움미술관이 2025년 첫 전시로 개최한 《피에르 위그: 리미널Pierre Huyghe: Liminal》(25. 2. 27. - 7. 6.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은 이제까지의 현대미술이 획득한 확장성과 복합성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의 작업을 보여준다. 피에르 위그는 1962년 파리 태생으로 경력 초창기인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국제 미술계에서 혁신적이고 도발적인 예술 실험을 지속해온 현대미술가 중 한 명으로 평판이 자자하다.

그 원동력은 스스로 밝히듯이 “[우연성, 예측 불가능한 것, 알려지지 않은 것]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무언가 일시적인 것을 찾는 데 관심”을 두며 작업해온 작가적 의식에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서술했는데, 피에르 위그가 “비관습적인 질료와 기술을 사용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칠고, 경작되지 않은 세계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길을 우리에게 제공”해왔다는 것이다.3 이와 같은 관점을 공유하면서 리움미술관은 《피에르 위그: 리미널》에 “현대미술의 고정된 형식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해온 세계적 작가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4이라는 의의를 부여하였다.

이상 작가 자신의 진술부터 국내외 영향력 있는 미술관의 판단까지 꿰어보면, 그 작업의 특성이자 강점으로 꼽고 있는 사안이 일관됨을 알 수 있다. 어휘는 다소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피에르 위그가 정통 미술의 안정된 범주 안에서 작업하는 대신 불확실하고, 일시적이고, 관례를 벗어나고, 답이 정해지지 않는 미결정성의 예술을 시도해왔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도의 성공으로 작가는 “세계적” 명성과 국제적 활동무대를 얻었고, 감상자인 “우리”는 인간의 반복된 경험으로 다듬어진 관습과 통념의 세계 바깥, 문명화된 현실 너머의 가능태로서 무언가를 조우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위그의 작품을 통해 말이다. 그럼, 그 무언가가 무엇일까?

피에르 위그, <주드람 4>, 2011. 《리미널》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전시 제목인 ‘리미널’에 힌트가 있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리미널은 “경계 또는 임계값의 양쪽을 점유하는, 중간적이거나 과도기적 있음being5을 의미하는 형용사다. 이는 작가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무엇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6로 보다 구체적으로 정의됐다. 나아가 피에르 위그의 작업 전반을 관통해서 그 의미를 해석하자면 리미널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인공/기술/기계장치, 물질과 비물질, 현실과 가상 따위로 이분화한 경계 짓기의 문턱 같은 존재 상태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인간 이성이 편리하게 양쪽으로 구분해서 틀에 고정한 세계가 아니라 그 모든 존재와 사물이 살아 움직이며 변태/변질하는 잠재공간latent space을 추적하기도 하고 지각 가능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미술art’이라는 느슨한 이름과 ‘조형plastic’이라는 너른 행위성을 따라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기성 미술의 이념이나 아름다움, 표현 재료나 시각언어 등이 아니라 그 있는 것들의 위와 아래, 표면과 심부, 안쪽과 바깥의 경계를 미묘하게 달궈서 어떤 것은 고사시키고 어떤 것은 다른 것으로 태어나게 하는 전략을 쓴다. 애초부터 미술이 인위적인 제작의 기술techne인 것처럼 피에르 위그의 리미널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의 역학을 실행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세계적 작가”의 현대미술을 미술이라는 안락한 집Heim에서 깨어나는 ‘겁나 낯선 것un-heimlich, un-familiar, uncanny, weird’, 친숙한 존재들의 심부에서 변종이 자라나는 ‘이소증ectopia 작용’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피에르 위그, <주기적 딜레마(엘 디아 델 로호)>, 2017.
수족관, 장님동굴테트라(Asytanax mexicanus), 조류, 동굴을 스캔하여 떠낸 시멘트 주물, 검은 변색 유리, 위치 기반 프로그램.
피에르 위그, <이디엄>, 2024-현재.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목소리, 금색 LED 마스크 《리미널》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기괴한, 매혹적인, 비애의 열린 시나리오

리미널을 표제로 삼아 “과도기적 상태”의 미술을 선언한 피에르 위그의 이번 전시작들이 죽은 미적 오브제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캔버스 천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림, 대리석이나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처럼 작가의 작업실에서 조형적으로 완결된 작품이 아닌 것이다. 심지어 그것들은 비디오아트, 설치미술, 퍼포먼스 같아 보여도 닫힌 구조와 시스템의 그것이 아니다. 가령 포스트프로덕션까지 끝난 비디오처럼 보이는 <리미널>(2024-진행)은 센서를 통해 실시간 수집된 환경 데이터를 인공신경망이 머신러닝하며 즉흥으로 이미지를 생성해 프레젠테이션 하는 영상작업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컴퓨터과학의 건조한 프로세스가 연상될 것이다.

하지만 <리미널>은 독일 바로크비애극Baroque Trauerspiel이나 고딕회화처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색채, 질감, 심지어 인간(?)의 형체와 몸짓을 하는 형상으로 조형된 화면을 제공한다. ‘칠흑’이라는 단어가 딱 들어맞는 색조의 화면에서 그보다 더 칠흑 같은 색으로 뻥 뚫린 얼굴/비얼굴을 한 나체의 여성(?)이 기고 구부리고 뻗치고 헤매고 하는 것이다. 보는 이는 그로부터 어딘가 폭력적인 존재의 무 상태와 기괴한 운동성을 지각 경험한다. 그리고 약간 기가 눌리는 불쾌감과 동시에 막막한 매혹의 정서에 빠져든다. 리움미술관에서 첫 선을 보인 <리미널>이 이번 개인전의 대표작인 데는 이렇듯 작품의 강렬한 자극과 그에 대한 수용자 반응이 충분히 기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그가 긴 작업이력 동안 지켜온 예측불가능성에 대한 지향은 <리미널>에서 생성형 AI 기술력과 예술사의 고전적 가치에 힘입어 구체화됐다. 덕분에 감상자 대중은 익숙한 경험 범위 바깥에서 그 잠재태를 실증적/가상적으로 경험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블랙박스 전시장 한곳에 어두운색 미니멀 큐브처럼 설치된 <주드람 4 Zoodram 4>(2011)는 또 다른 맥락에서 생성적이며 과도기적이다. 그것은 수족관 기능을 하는 조각 작품이다. 물탱크 내부에는 인공으로 만든 소라껍데기가 뉘여 있고, 그 안에는 실제 소라게가 살고 있다. 압권은 그 인공 소라껍데기가 바로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브론즈 조각 <잠든 뮤즈>(1910)를 모방해 수지로 만든 소형 조각이라는 점이다. 둘 사이 크기 차이는 물론 형태적 유사성을 배반하는 기능 차이와 미적 콘텍스트의 간극 때문에 감상자, 특히 미술 전문가는 잠깐 지각적 말더듬을 겪을 수 있다. 이어 마치 해저에 가라앉은 고대 여신상의 파편 같은 그 고요한 마스크를 집 삼아 몸을 숨기고 있는 소라게를 보고 있자면 작가가 욕망해온 “계획된 프로토콜보다는(…) 열린 시나리오들”7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납득하게 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상태, 라이브인 것이다. 사실 현대미술계에서 살아있는 것들, 가령 동 식물이나 해조류, 곤충 등을 작품의 일부로 제시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예를 들어 안규철은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5: 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동심원 형태의 큰 수조를 만들어 아홉 마리 금붕어를 키우고 공중과 바닥에 다수의 식물 화분을 배치해 전시 기간 내내 돌봤다. 그러나 피에르 위그의 ‘살아있는 것들’은 자연에서 유기체로 태어난 생물의 범주가 아니라 유기체의 사라짐과 무기체의 출현, 인간 중심 안정화와 비인간적 개방 운동, 종의 단절과 이종異種의 산포를 넘나드는 사건들 범주에 있다. 리움미술관 1층 블랙박스의 매우 어두운 전시 환경에서, 지하 그라운드갤러리의 열린 디스플레이에서 작품들이 열린 시나리오를 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논리에서 성립한다.

피에르 위그, 사진: 올라 린달 Pierre Huyghe Photo Ola Rindal

암, 핵…이슈들

《피에르 위그: 리미널》전시는 피에르 위그를 대표하는 기존 작품과 신작이 균형 있게 구성되었다. 덕분에 감상자 입장에서는 이 작가의 미술세계를 압축적으로 조망하는 동시에 각 작품에 특정한 주제와 사용된 조형 및 기술 형식을 세분화해서 읽어나갈 수 있다. 신작으로 앞서 다룬 <리미널>을 포함해 <카마타Camata>와 <이디엄Idiom>(2024~진행)이 나왔다. 대표작으로는 <휴먼 마스크>(2014)를 비롯해 <오프스프링>(2018), <U움벨트-안리UUmwelt – Annlee>(2016-진행), <암세포 변환기Cancer Variator>(2016) 등이 전시되었다. 이렇게 총 12점의 작품 중 영상들은 설치작품의 일종으로서 거대한 스크린에 상연되어 감상자의 시야와 동선을 압도한다. 세 개의 수족관 작품 <주드람 4>(2011), <주기적 딜레마Circadien Dilema(El Dia del Ojo)>(2017),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2018)과 <암세포 변환기>는 좌대 위의 (죽은)조각 같은 양태로 전시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매순간 살아 숨 쉬는 생물 개체와 시공간적 조건 변화를 반영한 데이터에 의해 잠시도 멈추지 않는 기이한 생태계를 품은 작품들이다.

그런데 누군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문제를 유발한다고 했던가. 생명은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지만 모든 조건에 상관없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암세포는 젊고 활동성이 강한 인체 속에서 더욱 기승을 부리고,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발생한 핵연료 잔해는 그냥 둘 수도 완전 제거할 수도 없는 초고위험 물질로서 어딘가에 잠겨 있다. 이번 리움미술관 전시에서 삼성서울병원과 협력해 진행되는 피에르 위그의 <암세포 변환기> 작업을 보자. 그것은 시험관에 가설된 암세포가 환경 변화에 따라 변이하는 양태를 리듬으로 해석하고 시각이미지로 생성해 <U움벨트-안리>에서 불규칙하고 미결정성의 화면으로 제시한다. 암으로 고통 받는 환우와 그 가족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으면 ‘기이하다’고 할 현대미술이지만, 위그의 이 작업은 이를테면 ‘암세포는 제거 대상이 아니라 내 몸과 공존하는 이질적 존재로서 관리 대상’이라는 임상의학의 전환을 일깨우기도 한다.

피에르 위그, <휴먼 마스크>,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피노 콜렉션, 안나 레나 필름 제공.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 《미디어시티 서울》에서 크게 대중의 이목을 끈 영상 <휴먼 마스크>는 또 다른 맥락에서 인류에게 이종의 합성이 강제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것도 현실의 참사를 근거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 이후 후쿠시마는 방사능 핵 위험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폐쇄되었다. 위그의 비디오는 그렇게 텅 비어버린 마을을 배회하는 원숭이-인간 마스크를 쓴 행위 주체를 묘사한다. 가부키 화장을 한 어린 소녀 같은 마스크와 검은 머리 가발로 얼굴이 가려진, 그러나 팔다리와 몸짓을 보건대 원숭이임을 숨길 수 없는 <휴먼 마스크> 속 유일한 생명체가 피폭된 일본 식당에서 창문 밖을 내다보는 장면은 그래서 특히 비극적인 인상을 준다. 다만 그 인상은 시각적 연민의 완성이 아니라 감상자의 성찰이 에스컬레이션 하는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1 Art Basel “Unlimited”, https://www.artbasel.com/basel/basel/basel/unlimitedoverview
2 미국 휴스턴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s Museum Houston)은 1948년 《This Is Contemporary Art》 전을 개최했다. 이 사례는 컨템포러리 아트가 어휘 그대로 특정 시점/당대의 최신 미술을 함축하는 어휘임을 말해준다. https://camh.org/event/this-is-contemporary-art/
3 MoMA, “Art and artists-Pierre Huyghe”, https://www.moma.org/artists/26245-pierre-huyghe
4 리움미술관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소개 https://www.leeumhoam.org/leeum/exhibition/85?params=Y
5 Oxford Dictionary, “liminal”, https://www.oed.com/dictionary/liminal_adj?tab=meaning_and_use#39195743
6 리움미술관, 같은 곳.
7 “Pierre Huyghe by Doug Aitken”, BOMB, (Fall, October, 1 2004) https://bombmagazine.org/articles/2004/10/01/pierre-huyghe/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서울특별시 박물관미술관진흥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5년 4월호(통권 13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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