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이준혁의 가치
사람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대부분 꽃피는 봄날처럼 화사한 20대를 생각한다. 백세 시대를 맞이해 조금 넉넉하게 잡아도 30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보여줌’의 미덕이 요구되는 배우에게 젊음은 중요한 재능으로 여겨진다. 그중에서 로맨스 주인공은 누구보다 빨리 꽃을 피워내야 하는 숙명을 갖는다. 2000년 〈가을동화〉의 배우 원빈은 24살, 2016년 〈별에서 온 그대〉의 배우 김수현은 25살이었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낙엽이 지는 자연의 순리를 유유히 거스르는 한 사람이 있다. 동재 동재 우리 동재, 바로 배우 이준혁이다. 작년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좋거나 나쁜 동재〉를 통해 원톱 배우로 등극한 그는 2025년 나이 마흔에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SBS 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온 헤드헌팅 회사 CEO 강지윤과 그녀를 완벽히 보좌하는 비서 유은호의 사내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익숙한 맛, 아는 맛, 그래서 특별할 게 없지만 특별할 게 없어서 오히려 ‘편안한 특별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답정너’ 간증이 많았다. 그리고 그 모든 특별함이 향하는 곳에는 ‘로코 킹’ 배우 이준혁이 있었다. 그동안 장르물에서 ‘얼굴 낭비’를 한 배우 이준혁을 향한 원성 아닌 원성이었다.

돌봄 능력의 가치
〈나의 완벽한 비서〉가 구사하는 인기의 절반이 배우 이준혁 덕분이라면 남은 절반은 그가 연기하는 유은호에게 있다. 딸아이의 머리를 묶어주고 딸아이에게 맛있는 밥을 해서 먹이는 것처럼 유은호는 손을 다친 강지윤에게 자상하게 반창고를 붙여주고 바쁜 일정 틈틈이 끼니를 살뜰하게 챙겨준다. 그의 ‘완벽한 돌봄능력’ 앞에서 회사 대표를 사랑하는, 아이 홀로 키우는 싱글 대디라는 그의 현실적인 장벽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헤드헌터. 사람의 가치와 역량을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그게 맞는 일을 소개하는 사람. 헤드헌팅 회사 대표 강지윤은 유은호의 뛰어난 돌봄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를 찾아준다. 바로 자신의 옆자리.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 때문에 외롭고 힘든 유년 시절을 보낸 ‘과거의 그녀’와 바쁜 일정 탓에 스스로 챙길 여유가 없는 ‘현재의 그녀’의 니즈에 딱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인재. 혼자 딸아이를 돌보며 살아온 그의 지난 시간은 그의 “흠”이 아니라 그의 가치를 높이는 ‘경력’으로 작동한다. 지금의 ‘돌봄 킹’ 유은호를 만든 그의 아픔과 슬픔을 강지윤은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극중 강지윤이 유은호의 조력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렵게 그려진다는 점에서 미성숙한 여성과 구원자 남성의 구도로 읽힐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강지윤에게 유은호의 돌봄이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강지윤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탄생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타인의 돌봄에 철저히 기대어 있다. 강지윤의 사랑에 힘입어 유은호 또한 ‘의기소침한 싱글 대디’에서 ‘사랑스러운 돌봄 능력자’로 거듭났다. 사람은 늘 누군가의 도움과 돌봄이 필요하며 돌봄은 이 시대 최고의 능력임이 분명하다.

서브 남주의 가치
한국을 넘어 세계로. 다정함을 넘어 돌봄으로. 최근 K-로맨스 남주의 새로운 자격 조건에 ‘돌봄 능력’이 추가되는 추세다. MBC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의 남자 주인공 천연수 역시 뛰어난 돌봄 능력을 가졌다.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수의사인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동물에 대한 사랑도 넘치는, 돌봄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다. 자고로 사랑은 편애에서 시작하는 법.

‘나인우 보려고 왔다가 김태형에게 빠진다’는 시청자 반응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본투비’ 로맨스 남주라서 나이브한 태도로 일관하는 천연수에 비해 태생부터 존재 인정에 목말라하는 ‘서브 남주’ 금석경은 늘 분주하고 열심이다. 모든 사람에게 퍼주는 인류애적인 사랑 따윈 그에게 사치다. 오로지 지강희 한 사람만을 공략한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강희와 클라이언트 관계로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뛰어난 디자인 능력과 진취적인 성격에 매혹된 그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플러팅하기 시작한다. 강희의 공적인 사업 파트너이자 사적인 인생 파트너, 그의 목표는 명확하고 그의 전략은 치밀하다.
“강희 씨는 도망친 게 아니라 도전한 거죠.” 강희가 과거 도망쳤던 자신을 고향 친구들과 비교하며 씁쓸해하자 금석경은 강희가 자신의 지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강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모두 다 품어버리는 강력한 플러팅. 또 한 명의 ‘돌봄 킹’ 탄생이다. 금석경의 눈에 비친 강지윤은 바람난 외국인 엄마를 둔 지방대 출신의 혼혈 무명 디자이너가 아니다.
‘돌봄 킹’ 금석경은 고정관념과 편견에 겹겹이 가려진 지강희의 가치를 발굴해낸다. 23년 된 첫사랑 천연수도 알아채지 못한 지강희의 가치를. 마치 헤드헌터 강지윤이 ‘아이를 홀로 키우는 싱글 대디’에 가려진 유은호의 가치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금석경이 숙박앱 창업자이기 때문이다. ‘본투비’ 호텔 상속자에 안주하지 않고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도전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도전을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장담하건대, 만약 현실에서라면 지강희는 천연수가 아니라 금석경을 선택했을 것이다. 과거의 첫사랑이 아닌 새로운 미래의 ‘인생 헤드헌터’를.

아이러니의 가치
사람의 가치를 ‘너무’ 잘 알아봐도 문제가 생긴다. tvN 드라마 〈원경〉은 서로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생의 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조선의 3대 국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애증의 가족사. 실존 인물이 주인공인 팩션 사극이다.

역사에 기록된 원경왕후는 왕후가 되기 전 이미 왕족과의 혼인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생각의 결이 비슷한 이방원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왕으로서 그의 가치를 알아본 그녀는 그를 왕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고려 말, 시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그녀는 은밀히 준비한 무기를 내놓고 남편에게 갑옷을 입히며 출전을 독려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사랑 고백. “이것이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한 나라의 역사를 바꾼, 세상에서 가장 호방한 사랑 고백이다.
그러나 그 호방함이 문제였다. 보위에 오른 태종은 원경왕후의 집안을 철저하게 견제하기 시작한다.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의 행보는 한 나라의 왕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 여자의 남편, 그러니까 잘난 부인과 처가 때문에 지독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못난 남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왕이 되었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드는 신하들의 말을 무심히 넘길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원경의 가치를 태종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로 너무나 잘 아는 부부였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 잘 알아도 문제, 잘 몰라도 문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치졸한 그의 속마음은 후궁을 19명이나 두는 것으로 발산되었다. 그것도 원경왕후의 몸종을 후궁으로 삼는 방법으로 아내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며 아내의 마음을 짓밟았다. 더 아이러니한 일은 태종과 원경왕후가 여자 문제로 갈등의 골이 깊었지만 둘 사이에 자녀가 12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왕자의 출생이 원경왕후 나이 만 47세였다. 왕위 계승이나 자손 번창과 거리가 먼,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희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뜨겁게 사랑하고 치열하게 싸운 그들의 애증의 역사는 ‘가치’가 있었다. 그들의 셋째 아들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위태로운 애증 관계를 유지했던 부모님 밑에서 성장한 덕분에 세종은 한글 창제로 가는 험난한 과정을 모두 버텨내고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끝으로, 이 글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당신은 한 명의 독자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소중한 분입니다.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중.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문화평론집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외 다수가 있음.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 수상.
사진제공 SBS, MBC, tvN
* 《쿨투라》 2025년 3월호(통권 12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