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총선을 코앞에 두고 열린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역시나 정치적 메시지로 시작했다. 지난 2월 13일(목)부터 23일(일)까지 11일간 열린 이번 영화제는 개막 기자회견에서부터 AfD를 필두로 한 극우 세력에 대한 반대를 천명하였고, 심사위원장을 맡은 토드 헤인즈도 반트럼프 발언을 얹으며 영화제가 지향하는 방향성을 선명하게 내비쳤다. 또한 올해는 런던레즈비언게이영화제(현 런던 LGBTQ+영화제)와 런던국제영화제를 거쳐 지난해 4월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한 트리시아 터틀 체제에서 열리는 첫 영화제로, 여성과 LGBTQ+에 대한 관심도 유난히 두드러졌다. 경쟁부문에서는 19편의 영화 중 8편이 여성 감동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었고, 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퀴어 작품에 수여하며 마무리되었다.

세상에 같은 미키는 없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
올해는 8편의 한국영화가 베를린을 찾았다. 2023년 3편, 2024년 6편에 그쳤던 예년에 비해 다양한 부문에 여러 작품이 초청받았다. 가장 화제를 모은 작품은 봉준호 감독이 6년 만의 신작 〈미키 17〉였다. 이번 신작은 인간 프린팅 기술이 도입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빚쟁이에 쫓기는 주인공 미키가 우주로 떠나기 위해 익스펜더블이 되는 길을 선택하며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키 17〉을 끌고가는 두 가지 이야기 축은 개발되지 않아야 했을 프린팅 기술과 나타나선 안 될 지도자를 문제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이다. 근미래 배경에서도 윤리적 문제로 지구 밖에서만 사용되는 프린팅 기술은 미키를 말 그대로 소모품expendible으로 전락시키며 늘 스스로의 쓸모와 가치를 구걸하게 만든다. 심지어 크리퍼들이 그를 크레바스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주었을 때조차 미키는 이들에게 자신이 먹힐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이 사건은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멀티플’로 존재하게 되는 계기인데, 미키를 익스펜더블로 여겨 당연히 죽이는 티모와 그를 생명체로 여겨 당연히 살리는 크리퍼의 대조는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장면이다.
이런 미키에게 그의 쓸모와 가치를 알아준 유일한 존재가 연인 나샤이다. 거듭되는 삶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독특하게 이어가는 두 사람의 로맨스는 미키를 익스펜더블이 아닌 사람으로 존재하게 한다. 모든 미키를 사랑한 나샤는 미키에게 미키 1부터 미키 18에 이르는 모든 미키가 다르다는 걸 알려주었고, 그가 소모되어 마땅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한편 우주개발에 앞장서는 유력 정치인 케네스는 인간 프린팅과 같은 비윤리적 행태를 서슴지 않으며 이와 같은 과학 기술을 활용하여 행성을 정복하고, 그곳을 우월한 인간만의 낙원으로 만들고자 한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청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인기를 이어가고,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반대파의 입을 틀어 막는 다분히 폭력적인 캐릭터이다. 하지만 결국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이다. 케네스가 행성의 선先주민인 크리퍼를 정리하려 할 때 봉준호 감독은 특유의 유머로 정복자의 서부극 공식을 비틀어낸다. 무력으로 행성을 점령하려던 케네스의 야망은 크리퍼의 ‘뻥’ 앞에 무릎 꿇는다.
〈미키 17〉은 SF를 골자로 봉준호식 장르 트위스트twsit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SF를 선택한 만큼 〈미키 17〉은 현 세태에 대한 반성이 우화적으로 그려진 풍자극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다양한 장르를 특이하게 버무려 놓음으로써 주제와 비판 의식은 명확히 하면서도 장르적 재미까지 확보하였다. 여기에 주연을 맡은 로버튼 패티슨은 캐릭터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커리어 최고 연기를 펼쳤다.

한편, 경쟁부문에 초청받은 홍상수 감독의 33번째 장편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또한 호평 속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마쳤다. 이번 작품 역시 우연과 즉흥성이 두드러지며, 소소한 갈등을 통해 제기되는 감독의 수사학적 질문들은 유머러스하게 해소된다. 또한 이번 작품에서도 〈물 안에서〉에 이어 홍 감독의 촬영 실험이 계속된다. 정적인 카메라 위에 펼쳐지는 흐릿한 초점과 거친 줌 등은 투박한 색감과 함께 새로운 영화 경험을 선사한다.
이 외에도 베를리날레 스페셜에는 민규동 〈파과〉가, 가장 실험성이 강한 섹션인 포럼에는 강미자 감독의 〈봄밤〉과 김무영 감독의 〈폭력의 감각〉이 이름을 올렸고, 이장욱 감독의 〈창경〉과 차재민 감독의 〈광합성하는 죽음〉은 포럼 익스팬디드에 초청받았다. 마지막으로 2011년 단편부문 황금곰상을 받은 박찬욱·박찬경 감독의 〈파란만장〉(2011)은 14년 만에 단편 스페셜 섹션에서 재상영되었다.

하루거루드의 퀴어 성장드라마
〈드림스〉 황금곰상 수상
올해 경쟁부문에는 총 19편의 영화가 초청되었다. 최고상인 황금곰상은 노르웨이 감독 다그 요한 하우거루드의 〈드림스Drømmer〉가 차지했다. 다그 요한 하루거루드의 〈드림스〉는 지난해 베를린 파노라마 섹션에서 상영된 〈어바웃 섹스〉와 베니스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사랑일까요〉를 잇는 ‘섹스 드림스 러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현대 북유럽 사회의 섹슈얼리티, 갈망, 범죄를 주제로 3부작을 만든 다그 요한 하우게루드는 퀴어라는 공통분모 안에 관습과 전통에 도전하는 대안적 섹슈얼리티를 논의한다.

이번에 선보인 〈드림스〉는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의 섬세한 퀴어 성장 이야기이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17세 주인공은 프랑스어 선생님에게 반한 후 자신의 강렬한 감정을 개인 에세이로 쏟아낸다. 영화의 초점은 8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녀의 저술을 마주한 어머니와 할머니의 반응이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작품은 성적 학대와 창의적 글쓰기라는 두 가지 주제를 세련되게 다룬다.
2등상격인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은 브라질 감독 가브리엘 마스카로의 〈블루 트레일〉이, 은곰상 심사위원상은 아르헨티나의 이반 푼드의 〈더 메시지〉가 차지했다. 세 편의 남미영화 중 미첼 프랑코의 〈드림스〉를 제외한 두 편의 작품이 심사위원대상과 심사위원상을 받은 만큼, 올해 베를린에서는 남미영화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가브리엘 마스카로의 신작 〈블루 트레일〉은 감독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소름끼치는 근미래의 상황 속에서 아마존을 배경으로 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품은 ‘고려장’을 떠올리게 하는 노인 유배시설을 통해 권위주의와 감시를 이야기하며, 억압받는 이들 사이에서 침묵하는 동조자들에 대한 비판 의식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이반 푼드의 〈더 메시지〉는 ‘동물 커뮤니케이터’로 고용한 소녀가 살아있거나 죽은 반려동물의 메시지를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흑백 로드무비를 통해 소박하지만 기발한 방식으로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은곰상 감독상과 각본상은 멩 후오의 〈리빙 더 랜드〉과 라두 주데의 〈콘티넨탈 ‘25〉의 몫이었다. 중국 감독 멩 후오의 〈리빙 더 랜드〉는 올해 수상작 중 유일한 아시아영화이다. 주인공이 살아가는 공간은 시골 농촌으로, 급격한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있던 농촌 밖 중국과 완전하게 분리된다. 카메라는 광활한 대지 속 농촌의 삶을 관망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전통적인 삶의 양태는 순환하는 계절과 함께 생동하는 봄에서 혹독한 겨울로 진행된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유로파 ’51〉에서 이름을 따온 라두 주데의 〈콘티넨탈 ’25〉는 50년대 네오리얼리즘을 계승하듯 정제된 형식 속 고통받는 군상을 그리고 있다. 라두 주데에게 황금곰상을 안긴 〈배드 럭 뱅잉〉과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감독 특유의 부조리한 블랙코미디나 거칠고 시끄러운 전환보다 윤리적 반성과 종교적 성찰이 두드러진다.


If I Had Legs I'd Kick You © Logan White © A24
은곰상 주연상은 메리 브론스타인의 〈이프 아이 해드 렉스 아이드 킥 유If I Had Legs I’d Kick You〉에 출연한 로즈 번이 받았다. 〈엑스맨〉 시리즈의 모이라 맥태거트로 친숙한 로즈 번은 이번엔 치료사이자 어머니로서 딸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연상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블루 문〉에서 리처드 로저스 역을 맡은 앤드류 스콧이 차지했다. 〈블루 문〉은 1943년 3월 31일 로렌즈 하트가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뮤지컬 〈오클라호마!〉의 초연을 주요 사건으로 다룬 전기영화이다. 이 작품은 링클레이터와 〈비포〉 시리즈, 〈보이후드〉를 함께한 에단 호크와 최근 아트시네마에서 가장 조명받는 마가렛 퀄리가 참여하여 공개 전부터 화제를 모았는데, 앤드류 스콧은 그 가운데서도 발군의 연기력을 뽐내며 조연상을 거머쥐었다.

Iván Fund © Richard Hübner Berlinale 2025
예술공헌상은 〈아이스 타워〉의 감독 뤼실 하지할릴러비치가 차지했다. 예술공헌상은 영화 제작팀 전체에 수여되는 상으로, 그녀의 수상은 〈아이스 타워〉의 촬영, 의상 및 프로덕션 디자인 전반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안데르센의 우화 「눈의 여왕」을 각색한 이 작품은 가출한 어린 소녀를 홀린 영화 〈눈의 여왕〉 속 스타 배우의 삶을 조명하는 판타지 영화이다.
폭설과 교통 파업 및 정치적 쟁점으로 조금은 어수선했던 현장 분위기와 별개로, 이번 영화제는 훌륭한 영화 프로그램 사이에서 따스한 시선이 힘을 받으며 포근하게 마무리되었다고 평할 수 있다. 이번 라인업에는 지난해 황금곰상을 거머쥔 〈다호메이〉와 같은 파격적인 작품은 없었지만, 그동안의 베를린영화제가 지닌 예술적·실험적 경향 아래 알찬 수작들로 구성되었다. 토드 헤인즈를 필두로 한 심사위원단의 선택은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황금곰상을 〈드림스〉에 수여하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터틀 체제가 예년보다 대중적인 영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결과 33만 6천여 장의 티켓을 팔며 높은 입장 수익을 기록했다.

영화제가 마무리된 지금, 중도보수연합과 AfD가 독일 총선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베를린영화제로서는 위기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그동안 베를린영화제가 독일의 극우화에 앞장서서 반대해온 만큼, 유럽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영화제의 행보에 세계영화계가 집중하고 있다. 올해의 영화제가 막 끝난 지금, 베를린은 벌써부터 내년 영화제 계획을 시작하며 ‘베를린’다운 2026년 축제를 예고하고 있다.
사진제공 베를린국제영화제
* 《쿨투라》 2025년 3월호(통권 12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