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어떤 풍경은 조지아 오키프처럼 도발적이며 낯설게 클로즈업된다
깊은 그리움이 발산한 치명적인 매력
- 김해연(Jenny Kim)의 그림에세이집 『사랑 그 소중함』
김해연 재미작가가 그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해온 그리움의 치명적인 매력을 두 번째 그림에세이집 『사랑 그 소중함』(도서출판 작가) 통해 발산했다.
저자 김해연은 이화여대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에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했고, 현지 작품활동으로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Country Art Fair》에서 두 차례의 대상과 장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에서 각각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2009년 《한국수필》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오랜 기간 《미주한국일보》의 칼럼 필진으로 글을 썼다. 2020년에 상재上梓한 첫 그림에세이 『나비, 세상 속으로 날다』 이후 이번의 책은 두 번째가 되는 셈이다.
이번에 펴낸 김해연의 그림에세이집에 담긴 글과 그림은 한결같이 온정적이면서도 유현幽玄한 의미의 축적을 지향한다. 평범한 일상을 범박한 방식으로 말하거나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의도와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무슨 고급한 지적 수준이나 배타적 자기영역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이 글의 제목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따뜻하고 그윽한’ 세계의 주인공이기를 원한다. 소박하면서도 품위 있고, 조촐하면서도 그 내부에 숨은 열정으로 인해 화려한 글과 그림! 그러고 보면 거기에 영일 없이 자신을 독려하며 걸어온 인생 세간의 깨달음과 원숙함이 배어 있다.
그래서일까. 이번 책의 그림은, 그 이미지가 강렬하고 선명하다. 아마도 이는 그가 세상을 관찰하는 눈이 명료하게 정돈되고, 그 마음에 합한 방향성을 확정했다는 증좌가 아닐까.
김종근 미술평론가는 추천사를 통해 김해연의 그림을 천천히, 조금 더 깊게 한 번 들여다보면, “어떤 풍경은 마치 폴 세잔처럼 큐비즘처럼 신선하기도 하고, 또 어떤 풍경은 조지아 오키프처럼 도발적이며 낯설게 클로즈업되어 눈앞으로 쳐들어온다.”고 말한다. “부채에 그려진 〈고유의 색상〉 선면화扇面畵는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균형〉의 테이블은 무생물이지만 이 사물의 추상개념에 인격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의인화처럼 다가온다”고 평한다.
이처럼 김해연의 작품들은 어떠한 형식이나 규정에 얽매이기보다 거침없는 감정의 생채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또한 그녀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세련미와 색채의 조화와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렇게 생경하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묘사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묘사의 미학이야말로 김해연 그림이 주는 또 하나의 진솔하고도 시각적인 즐거움이다.
일상 속의 소소함과 그 소중함
글쓰기에 있어 이미 일정한 등급을 확보한 그의 그림에세이들은, 반면에 차분하고 정교한 발걸음을 옮겨놓는다. 마치 찰랑거리는 시냇물처럼 그 소리가 청아하고, 밝아오는 여명처럼 읽는 이의 가슴을 훈훈하게 덥혀준다. 그림과 연동된 글은 순후하고 조화로운 악수를 나누고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문장의 결이 고우면서도 힘이 있다. 이를테면 평론가의 날 선 눈으로도 별반 흠결을 찾아낼 수 없는 수준이다. 모르긴 해도 이러한 상황은, 그가 인생관에 있어 윤리적 완전주의자이면서 예술관에 있어 완결성의 미학을 추구한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완전주의’라는 것은 참으로 곤비困憊한 길을 가는 발걸음과도 같다. 다만 김해연은 기꺼이 그리고 고집스럽게 그 길을 가는 작가다.
이 책의 1부 〈균형을 잡으며〉는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 가운데서 지혜롭게 포착할 수 있는 긴요한 각성, 또 이를 토대로 한 이성적이고 엄정한 자기관리에 관한 글이 위주로 되어 있다. 서두에 있는 「가을에 전하는 안부」를 보면, 오랜만에 소통하는 지인과 정호승의 시를 화두로 문자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그런데 인용된 시의 제목이 매우 격렬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로 발전하다니. 시로 읽을 때와 문자로 교환할 때의 어휘들은 당연히 달라야 마땅하다. 이 난감한 국면을 잘 추스르고 넘어간 작가는, 성숙한 심경으로 ‘시가 고픈 가을이다’라고 고백한다. 작가가 생각하는 ‘강한 사람’은 건강·경제·정신이 튼튼한 사람이며, 작가 스스로도 그 경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균형」에서는 의자 하나를 그리며 열 번도 더 지우고 고치고 하던 경험을 토로한다. 그는 ‘그림 속 의자 하나가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이 든다’는 것을 그 경험 끝에 체득한다. 세상의 사물과 우리 삶의 형편이 이렇게 한 묶음으로 공존하는 것이 아닌가. 이 경우에도 정답은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살기인 것 같다. 그래서 작가는 ‘포장하며 살기’를 그만하겠다고 단언한다. 「결실」이나 「그네」 같은 글에는 그 기저에 지속적으로 가족의 담화가 잠복해 있다. ‘눈 내리는 3월’에 보낸 모친은 아직도 그의 가슴 한편을 점유하고 있는 터이다. 이 모든 관계성이 남겨둔 그리움들은 언제나 ‘나의 몫’이다. 그것은 작가에게 마음의 짐이기도 하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설레는 마음으로 살게 하는 광원光源이기도 할 것이다.
2부 〈사랑 그 소중함〉에 이르러서도 이제까지 유지해온 글쓰기의 유형과 행보가 그대로 이어져 있다. 2부에서는 특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아픔에 대한 서술이 많다. ‘나’와 연관된 모든 것들에 대한 작고 소탈하고 귀한 사랑이 하나의 행렬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동백꽃」에서 신혼여행의 추억, 「또 다른 어머니날이 오면」에서 채워져 있던 자리가 빈 공허감, 「바람 자욱」에서 느닷없이 받은 가까운 이의 부고 등이 그렇다. 「사랑 그 소중함」에서 ‘짧은 하루만의 풋사랑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더없이 좋다는 언술이나 「소살리토」에서 ‘나만의 구석 자리’에 대한 술회도 마찬가지다. 마침내 작가는 ‘시간이라는 삶의 비밀’을 갖고 있다고 말하며, ‘스스로가 가진 외로움을 껴안고 가듯 부족함도 껴안으며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는 언표言表에 이른다.
‘나’의 길 찾아가는 설렘의 여정
이 책의 3부 「언어의 온도」에서는 작가 자신이 ‘나’의 길을 찾아가는 방향성과, 그 길에 있어서의 교류와 소통에 대한 생각을 주로 담아낸다. 기실 자기에게 합당한 생애의 길을 찾은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때의 길은 세속 저잣거리의 명성이나 재물의 축적과 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한 개인이 그 가슴 속에 비밀스럽고 곱게 간직하고 있는 내면의 속사람, 그 품성의 가치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와 판단의 기준은 저 오랜 옛날부터 지금 여기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값을 가늠하는 시금석試金石이 되어왔다. 「신데렐라」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꼭 내가 해야 하는 것으로 내가 나의 신분을 상승해주고 싶다는 욕구’는 바로 이것을 말한「언어의 온도」는 작가가 읽은 다른 책의 제목을 빌려 왔다. 그는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라는 문장에 경도傾倒된다. 여기 ‘서로에게 가슴으로 번지는 따뜻한 온도의 말’이 있다. 「열정과 아름다움」에서 작가는 ‘다양성과 창의성’에 대해 언급한다.
김종회(문학평론가)는 추사 김정희의 금언인 “난초를 그리는 데 있어 법이 있다는 말도 안 될 말이지만 법이 없다는 말도 안 될 말이다!”를 인용하며 “예술의 창의성과 규범성을 함께 말하는 이 격언은, 김해연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에게 두루 적용되는 방향 지시가 될 것으로 본다.”고 평하며, 김해연의 두 번째 그림에세이집을 “따뜻하고 그윽한 글과 그림의 만남”이 오래 곰삭아 빚어낸 “원숙하고도 숭고한 예술미학”으로 해석한다.
「음악」에서 예거한 ‘구속이 아닌 그윽함’이나 「진심」에서 진심을 ‘손끝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느낀다는 표현은, 작가의 글솜씨가 한결 고아高雅한 자기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음을 감각하게 한다. 「이름값」은 해연海燕, 바다제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를 아버지의 기억과 함께 반추하고 있는 뜻깊은 글이다. 이렇게 이미 지나가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은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 그것을 가슴 저 밑바닥에서 느낄 수 있기에 문인은 글을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린다. 누가 있어 이 모양을 두고 한 생애에 부여받은 숙명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는 「집은 그 사람이다」에서, 이에 대해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썼다. 이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책을 준비하면서 느낀 욕망과 부끄러움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나에게 자랑하며 칭찬받으며 또 예쁨 받고 싶다’고 선언했다. 그렇다. 우리 모두 스스로의 자리와 지위를 알뜰하게 지키지 않는 한 삶의 보람이 있을 수 없다. 이 책이 김해연에게 있어 바로 그 존재 증명이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한 보헤미안 방랑자의 이야기처럼, 김해연 작가의 진솔한 예술적 감수성을 담아낸 이 그림에세이는 우리의 내면을 더 높고 깊은 심상心象의 세계로 인도하며, 우리들의 눈과 귀를 솔깃해지게 만들 것이다.
김(이)해연 Jenny Kim(Hae Yeon Kim)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2009년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수상
2009년~2013년 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필진으로 활동
Santa Clara 《Country Art Fair》에서 두 차례 대상과 장려상 수상
2010년 10월 27일, 1회 개인전 《 Butterfly-나비 그 흔적들》(Aegis Gallery, Saratoga CA)
2020년 2월 4일 첫 작품집 『나비, 세상 속으로 날다』 출간
2020년 2월 4일 서울에서의 첫 개인전(한국잡지박물관 M 미술관)
2014년 5월부터 2024년 현재까지 《San Francisco Journal》에 「김해연의 글과 그림」 연재 중
2024년 1월 31일 두 번째 작품집 『사랑 그 소중함』 출간과 전시회
추천사
낯선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본 사람들에게는 정말 기막힌 공통점이 있다. 한국말만 얼핏 스쳐도, 아니 대한민국 태극기만 봐도 울컥울컥 차오르는 것이 있다. 이는 자기를 낳아준 나라를 떠나본 사람들이 갖는 조국에 대한 진한, 더할 나위 없는 그리움인 것이다.
파리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해 본 나또한 그랬다. 그렇다. 그래서인지 김해연의 진솔하고 애틋한 그리움에 사무친 글과 그림들을 보면서 난 조국을 떠난 사람들의 심경에 동화되어 나도 모르게 그렇지! 그랬어! 하는 공감의 감탄사를 반복했다. 마치 꼭꼭 숨겨둔 나의 비망록이나 서랍 속 일기를 꺼내보기라도 하듯이 가슴이 뭉클했다.
이처럼 김해연 작가가 낯선 이국땅에서 작업해온 이 적지 않은 글과 그림의 붓질 하나하나에는 작가의 실핏줄 같은 조국을 향한 그리움과 이방인의 풍경이 그대로 읽혀진다. 특히 김해연의 그림은 그 모티브와 깊은 붓 터치에서 중년 여류작가의 삶의 지혜와 연륜이 그 울림을 더하고 있다.
“모든 예술가에게 가장 위대한 스승은 자연이다”라고 세관원 출신의 화가 앙리 루소는 절규했다. 화가에게도 자연보다 더 나은 스승이나 교육은 없다는 것이다. 앙리 루소는 단 한 번도 프랑스를 떠나본 적이 없지만 그는 화폭 가득 정글의 야생동물과 울창한 숲으로 가득 찬 아프리카의 이국적인 자연과 풍경을 상상으로 재현하였다.
앙리 루소처럼 김해연의 그림 또한 자연의 풍경을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현해서 일까. 그녀의 그림은 소박하지만 은유적인 내면의 깊이를 더한다. 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기에 진솔하고 소박한 자연의 꽃과 풍경들을 가슴속에 새기듯이 담아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두 번째 작품집을 묶으면서 “욕망과 질투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부끄럽고도 솔직한 심경을 고백했다.
그림을 잘 그리든, 글을 잘 쓰든, 예술가들에게 세상이 말하는 그러한 기준은 중요치 않다. 이 지구상에서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다 완성하고 나면, 왠지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어 좀 더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못한 것만 같아 자꾸만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다.
김해연의 그림을 천천히, 조금 더 깊게 한 번 들여다보자. 어떤 풍경은 마치 폴 세잔처럼 큐비즘처럼 신선하기도 하고, 또 어떤 풍경은 조지아 오키프처럼 도발적이며 낯설게 클로즈업되어 눈앞으로 쳐들어온다.
부채에 그려진 〈고유의 색상〉 선면화扇面畵는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균형〉의 테이블은 무생물이지만 이 사물의 추상개념에 인격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의인화처럼 다가온다. 그 외에도 〈그네〉나 〈그리움〉은 추억에서 길어 올린 한국 안방에서의 생활 장면이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외로움이 묻어난다.
이처럼 김해연의 작품들은 어떠한 형식이나 규정에 얽매이기보다 거침없는 감정의 생채기를 담백하게 풀어낸다. 또한 그녀의 그림이 주는 감동은 세련미와 색채의 조화와 아름다움도 있지만, 이렇게 생경하지만 꾸밈없고 솔직한 묘사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묘사의 미학이야말로 김해연 그림이 주는 또 하나의 진솔하고도 시각적인 즐거움이다.
모든 예술가의 시작은 어쩌면 중독이다. 그래서 한번 이 중독성 깊은 예술세계에 발을 담군 화가들은 이 세계를 빠져나가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잠시 이 세계에서 절망하여 방황하며, 이탈할지라도 언젠가는 다시 나를 미치게 했던 아티스트의 길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숙명처럼 그림 작업에 내 모든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김해연 작가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한 보헤미안 방랑자의 이야기처럼, 김해연 작가의 진솔한 예술적 감수성을 담아낸 이 그림에세이는 우리의 내면을 더 높고 깊은 심상心象의 세계로 인도하며, 우리들의 눈과 귀를 솔깃해지게 만들 것이다.
- 김종근 미술평론가 「그 깊은 그리움의 치명적인 매력」 전문, 본문 8쪽
작가의 말
욕심 하나로 시작하였다. 질투는 욕망이란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맹렬히 달려오는, 미처 이루지 못한 욕심의 아픈 감정이라는 것이다. 어느 한순간 참을 수 없는 통증으로 마침내 터져버린 질투는, 두려움과 열등감과 모자람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겁이 없는, 용기와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새롭게 시작할 이유를 주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둘 다 완전히 가지고 싶은 나의 욕망은, 쉽게 꺼지지 않는 화로 속의 열기처럼 스스럼없는 따뜻한 온기로 추운 마음을 껴안는다.
가끔은 내가 쓴 글과 그림을 보면서 부끄러워한다. 그것은 처음보다 조금은 성장해서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며, 그 부끄러움으로 먼 훗날 더 나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본다. 자신을 온전히 내보이는 것이 두려워, 혹시라도 예전으로 돌아가는 실수를 반복할까 무서워, 뒤를 되돌아보지 않으려고 나비의 날개를 퍼덕인다. 시간의 뻔뻔함으로 그리고 세월의 숫자로 끝까지 버틸 무모함이다. 돌아보며 후회하는 것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더 강한 질투와 욕망으로, 오늘 지금 다시 책상 앞에서 짧은 머리 묶으며 희망한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자랑하며 칭찬받으며 또 예쁨 받고 싶다.
- 2024년 1월, 김해연 「두 번째 책을 준비하면서」 전문, 본문 117쪽
본문 속으로
며칠 내내 그녀 생각을 하며 지냈다. 햇살 밝은 날에 다시 전화할까 망설이다, 무얼 하기보다는 그냥 지나간 옛날로 내버려 두는 것이 제일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관계는 설명 하나 없이도 길게 이어진다. 나와 그녀의 기억 속에 한동안 머무르다, 또 다른 가을 늦은 밤 문득 서럽게 외로워지면 서로를 찾아내어 스쳐 지나가듯 짧게 마음을 열어놓을 것이다. 내어놓지 못하고 덮어놓은 무거운 장독간의 뚜껑처럼, 가끔 한 번씩은 그것을 열어 진한 햇빛으로 말려주어야 밑에 있는 무언가가 더없이 잘 익어 깊어질 것이라 믿어본다.
이제 다시 시詩가 고픈 가을이다.
내 마음도 잘 모르면서 다른 이의 깊은 마음에서 우러난 진한 시를 이해한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해온 잊지 않는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다 늦은 가을의 외로운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 「가을에 전하는 안부」 중, 본문 18쪽
어느 하루 그림을 그리려 텅 빈 하얗고 네모진 캔버스를 앞에 놓고 앉으면, 막막하면서 두렵고 순간 무섭다. 무엇을 그리며 무슨 색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채, 사각의 나무로 만든 판 위에 던지듯 나를 내려놓는다. 감정의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막막함으로, 잘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제법 괜찮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욕망도 끄집어 놓는다. 세상 밖으로 나가 각 생물체의 부딪힘으로 보이는 생명의 불꽃 송이도 바라보고 또 내 안에 숨어있는 감성과 열정을 밖으로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도, 감정은 미끄러지고 의욕은 힘이 빠지고 생각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 그러나 문득 이것은 여전히 나만의 색상을 찾으려 애쓰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요일 성당 안 미사 중에 떠올랐다. 겸손의 무릎을 꿇고 원하고 소원하는 마음에 고스란히 집중하면서 같은 공간에서 깊은 마음 하나로 기대고 올리는 하나하나의 기도가, 바로 각자 본연의 색상인 채도와 명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고유의 색상」 중, 본문 26쪽
사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뽀송한 털이 여전히 부슬거리는 아기 강아지같은 사랑이라도 낯선 여행지에서의 수많은 사람 속 잠시 스쳐 지나가는 눈빛의 사랑이라도, 미워하고 싫어하고 원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왠지 모르게 점점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을 따뜻함 대신, 감정의 솟구침을 감추지 않은 채 그대로 분출되는 분노의 무서운 이야기들이 늘어가는 아침 뉴스에 눈을 감는다. 언제나 더 좋은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는 내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믿고 싶다..
- 「사랑 그 소중함」 중, 본문 71쪽
‘작은 버드나무’라는 소박한 뜻을 가진 소살리토Sausalito는 잔잔한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이쁜 집들과 많은 화가와 작가들 그리고 오래된 화랑과 식당들이 아기자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동네이다.
태어나 자랐던, 그렇지만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고향의 앞바다처럼 푸근하다. 마음이 헝클어지는 날에는 위로받고 싶어 한밤중에도 달려간다. 늘 마음속 평화를 기도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닫는 한계를 마주치거나, 그것이 아픔으로 휘몰아쳐올 때는, 바다를 바라보며 위로를 받고 속내를 털어놓으며 울기도 한다.
- 「소살리토Sausalito」 중, 본문 75쪽
차례
추천사_김종근 미술평론가 · 8
작품해설_김종회 문학평론가 · 10
1부 균형을 잡으며
가을에 전하는 안부 · 18
강한 사람 · 20
결실 · 23
고유의 색상 · 26
균형 · 28
그네 · 30
그리움 · 33
거꾸로 본 세상 · 36
나의 몫 · 40
달리기 · 43
독립기념일 · 44
2부 사랑 그 소중함
동백꽃 · 49
또 다른 어머니날이 오면 · 52
마음속에 있는 지도 한 장 · 57
바람 자욱 · 61
밥상 너머 · 62
변화의 시간 · 65
사는 냄새 · 66
사랑 그 소중함 · 71
삶의 골목길에서 · 72
소살리토Sausalito · 75
시간 · 77
시간은 지나간다 · 80
3부 언어의 온도
신데렐라 · 84
언어의 온도 · 87
열정과 아름다움 · 88
음악 · 92
이름값 · 95
잠길에서 · 96
지붕 위의 가을 · 99
진심 · 100
집은 그 사람이다 · 104
한강 다리 위에서 · 108
함께 성장하며 · 111
흐르는 강물처럼 · 113
작가의 말_김해연 · 117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