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재즈의 시중
[재즈] 재즈의 시중
  • 정은혜(피아니스트)
  • 승인 2024.06.04 16: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중時中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때에는 그에 따른 알맞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때에 맞는 것이 지금은 맞지 않는다. 이 말에서 무엇보다 숙고해볼 점은 바로 그 때의 중심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를 물리적 현실로 이해하기 위해서 지구만 한 예가 없다. 지구는 팽이처럼 휘청거리며 돌면서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시속 11만 킬로미터로 달린다. 지구는 시시각각 운동하고 변하여 그 시중을 달리하지만, 결국 자신의 중심축을 돈다.

재즈 애호가들이 자신이 맛본 재즈의 아름다움을 설파하고 그 취향을 나누는 이야기는 시중市中에 꽤나 많이 돌아다닌다. 와인 한 잔 홀짝거리며 분위기에 취해볼 수 있는 흥겹기도 하고 감상적이기도 한,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음악. 그 정도가 ‘재즈’라는 이름을 간판에 건 시장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경험인 듯하다. 그러나 재즈의 달콤 쌉쌀한 분위기와 우리의 온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 에너지는 때로 마치 아득히도 먼 별과 행성에서 비추는 빛과 같다. 반짝이는 별빛은 낭만적이고 아름답지만, 막상 그 별과 행성에 가까이 가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될 것인가? 그 별의 현실과 그 별의 시중은 몇 광년 떨어진 우리 눈에 도달한 한 점의 반짝임 만으로 알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필자는 즉흥이라는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창작 방식과 음악의 생동감에 이끌려 20대 초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재즈에 입문했다. 사실 당시에 나는 예술가에 대한 동경을 갖고 다양한 예술에 파고들었었다. 마크 로스코의 끝을 알 수 없는 색 덩어리, 추사의 먹물마저 살아있는 듯한 글씨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캐나다 출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바흐 연주가 귀에 들어왔고, 재즈 피아니스트 델로니우스 몽크의 음반에서는 어떤 반짝임을 보았다.

굴드와 몽크, 이 두 피아니스트는 그저 뛰어난 연주자가 아니었다. 특히 몽크의 경우 피아니스트 매튜 쉽이 규정하는 ‘블랙 미스터리 스쿨’ 계보의 시초로 꼽힌다. 그만큼 그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이 발을 딛고 있던 세계관을 뒤집는 전혀 다른 차원의 소리를 이 세계에 선포하는 듯 하다. 그 타협 없는 혁신성이 가득한 음악을 도대체 어떻게 구현해 내는 것인지, 그 원리와 동력, 그 창조력의 중심축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재즈를 시작한 후 미국에서만 열두 해를 보내고 나름의 연차가 쌓여갈 즈음에야 그 해답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무엇보다 음악가들의 현장에서 재즈 역사의 큰 흐름에 직접 참여하는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단언컨대 재즈는 미국 흑인 문화의 결정체다. 이는 타인종이 재즈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음악이 탄생시킨 주체, 즉 어떤 토양과 씨앗이 재즈라는 존재의 중심을 만들었는지를 짚어보는 말이다. 미국 내에서 흑인 예술가들은 세상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전위적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그만큼 흑인 예술가가 스스로 자기 됨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 나아가 존재함 자체가 백인주류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이다. 이는 자신의 역사 안에서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해체하는 유럽인에 의한 유럽 예술의 전위와는 다른 것이다. 미국 흑인들의 저항은 억압이라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면서도 자기 됨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는 지극히 당위적인 용기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기 됨을 지키는 저항의 노래는 삶의 애환이 짙게 물든 블루스가 되고, 땀방울 송골송골 맺히도록 밤새 모여 춤추게 만든 스윙이 되고, 엘리트적인 음악적 지성과 테크닉이 한껏 휘몰아치는 비밥이 되고, 단절된 역사를 잇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었던 아프로 퓨처리즘이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어느 순간 모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음들의 시중에 충실하게 된 프리 재즈, 자유 즉흥연주가 또 다른 스타일과 매너리즘이 되어 창작자-연주자가 오히려 첨예한 시중의 소리를 내지 않게 되는 점을 의식한 크리에이티브 뮤직까지. 지난 1세기 동안 숨 가쁘게 자신의 축을 중심으로 끝없이 변모하였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시장과 대중에게서 한참 멀어진 재즈는 제도권에 편입되고 학제화 되는 과정에서 본래 정신이 흐릿해진 채 스타일과 형식이라는 껍데기로 전해지는 것 같다. 정작 변혁의 빛을 가져다준 아티스트들의 그 비밀 코드는 가르치고 배울 수 없는 것이 되어 과거의 현재 속에서 박혀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정신은 다른 모습으로, 때로는 “재즈” 같지 않은 음악으로 여전히 살아있다. 재즈라는 중심축을 돌리며 그 정신을 잇는 아티스트들은 현재적 재즈의 시중을 제시하며 우리가 재즈라고 믿는 과거의 모습을 벗어난 음악의 총천연색을 뿜어내고 있다.

인간의 듣는 행위는 분명 능동적이고 상호적이며 나아가 창조적인 일일 것이다. 음악을 나의 취향에 멋을 더해주는 배경이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유아唯我적인 듣기를 넘어서서, 반짝이는 별빛의 근원과 그 시중을 가까이에서 만나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재즈와 교류하기 시작한다면 우리 각자의 자아의 품이 넓어지며 더 커진 세상과 율동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은혜 버클리 음대 영화음악 작곡/재즈 연주, 국제학 부전공. 밴프 아트센터 TD Bank 장학금 수여.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IICSI Improvisation 콜로퀴엄 패널. 와다다 레오 스미스, 조 맥피, 배일동 등과 협연. 7개 이상의 음반 발매. 현 뉴욕 ESP-Disk’ 레이블 소속, 모나드 서울 by CAC 대표.

 

* 《쿨투라》 2024년 6월호(통권 120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