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땅과 삶: 정영선의 조경 일대기와 기후위기 시대의 전시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땅과 삶: 정영선의 조경 일대기와 기후위기 시대의 전시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7.3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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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본 그 공간의 조경(가)

예술의 전당, 국립중앙박물관, 탑골공원, 광화문광장, 청계천, 경춘선숲길, 올림픽 공원과 선수촌아파트, 대전엑스포 광장, 국립수목원, 정부대전청사, 코엑스, 호암미술관, 휘닉스파크, 남해 사우스케이프, 서울아산병원, 선유도공원, 인천국제공항…. 이렇게 나열한 장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한국 사람 중 다수가 적어도 한 번, 그중 한 곳이라도 가봤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용자의 관점 대신 제작자의 관점에서 공통점은 그곳의 조경이 한 사람의 손을 거쳐 이뤄졌다는 점이다.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자 여성 1호 국토개발기술사로서 올해 83세의 정영선이 당사자다.

정영선, 경주 불국사 성역화 프로젝트 팀과 마스터 플랜 모형 앞에서, 1947. 《환경과조경》 1998년 6월호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서두에 열거한 곳들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공공기관이나 기념 공간, 업무지구이거나 근린 시설이며, 특정 직업군에게는 일터이고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에게는 일상의 장소다. 거기서 조경에 주목한 이가 얼마나 될까?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한 이유는 그 공간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우선이라 미처 조경을 의식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연보(작성: 조경진, 심주영, 김이경),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실 입구 설치. 2024. 사진: 강수미

그런데 나는 정영선의 50년 넘는 조경 이력이 시대사적 흐름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특성으로 분기되면서 그 공간들의 장소특정성에 기여했기에 사람들이 그곳에서 과시적 ‘조경’을 맞닥뜨리지 않았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197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정영선의 조경은 정부 주도의 근대화부터 세계화까지의 과정, 예를 들어 국토개발사업, 국토경관계획, 문화진흥정책 등과 궤를 같이 하면서 건축물의 권위와 장소의 형식적 질서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 전경. 사진: 강수미

그러다가 〈선유도공원〉(2002) 작업에서 보듯, 2000년대 들어 전 세계적으로 강해진 생태환경의 회복 필요성과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자연친화적 정책에 호응하는 조경 경향에 선행적으로 임한 것 같다. 정영선의 조경은 그렇게 한편으로는 공간의 제도적이고 객관적인 정체성에 수렴하는 양식을 취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숨 쉴 수 있고 자연에 녹아들 수 있는 환경을 구현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 쪽으로든 우리가 가본 그 공간의 조경(가)을 과하게 의식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전경. 사진 정지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한국 조경 역사와 조경가의 전시

1941년 경북 경산 출생인 정영선은 조경설계 분야는 물론 건축계 등 다양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며 여전히 현역 조경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원로 조경가의 팔십여 년 삶 중 삼십 대 이후는 1970년대 초 시작된 한국 조경의 역사와 운행을 같이 한다. 그 시간대는 박정희 정부의 국토 개발 사업이 박차를 가한 때로 전국적으로 공공 건축물이 세워지고 유적지 정비, 관광단지와 공원 조성 사업 등이 본격화되었다. 서두에 정영선의 조경 작업이 이뤄진 곳으로 소개한 장소들 다수가 그러한 배경에 속한다. 그런 만큼 한국의 조경 분야에서 정영선의 활동과 기여는 뚜렷한 이력으로 기록되어왔고 시대사적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조경학이 국내 소개된 1970년대 초, 잡지 《주부생활》의 기자로 일하던 정영선은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의 첫 대학원생이 되어 당시 국가가 주도한 유적지 복원 사업에 참여하며 이력을 시작했다. 1974년 경주 불국사 성역화 프로젝트 팀과 찍은 한 장의 흑백사진은 젊은 정영선에게 찾아든 운명적 기회와 더불어 한국 조경 역사 속에 이 사람의 영향력이 뿌리내리게 된 단초를 시사한다 .

그로부터 정확히 50년 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기획전(2024. 4.5. - 9. 22.)을 통해 이 조경가의 삶과 작업(정영선이 1987년 설립해 운영해온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주)과 함께)을 조명하고 상찬했다. 전시는 정영선이 수행한 수백 개의 프로젝트 중 60여 개를 선정해 7개의 세부 주제를 가진 하나의 총체로 제시했다.

1.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 2. 세계화 시대, 한국의 도시 경관 3. 자연과 예술, 그리고 여가 생활 4. 식물, 삶의 토양 5. 하천 풍경과 생태의 회복 6. 정원의 재발견 7. 조경과 건축의 대화가 그것이다.

연대기 순은 아니지만 분명 정영선의 조경 일대기를 근간으로 구성한 그 소주제들은 한국의 근현대화 과정 및 토건 산업의 변화와 맞물린다. 동시에 인간의 삶과 생태계의 질서를 둘러싼 동시대 글로벌 어젠다를 정영선의 작업과 결부시켜 보려는 학예적 관점도 보인다. 그렇게 전시는 정영선의 조경이 토대를 둔 시대적 맥락과 조경 분야의 현재적 경향성을 혼합시킨 기획 목적을 물리적 디스플레이와 부가 언어들을 통해 강조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밝히듯이 “‘조경’이라는 분야를 주목”하고 정영선을 “작가”로서 초대해 전시를 기획한 데는 건축의 주변부처럼 여겨져 온 대상을 조명하는 목적(“엄연히 존재했지만 역사화 되지 않았던 서사”)이 전제됐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생태 환경에 대한 주제의식 또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시장 초입의 벽면에 제시된 대형 연보에 복합적 메시지로 새겨져 있다. “정영선 개인 서사, 한국 조경 역사, 세계의 환경 관련 주요 사건”을 세 축의 타임라인으로 만든 연보에서 두 개의 그래프가 20세기 후반을 경계로 X자를 그리며 반전한다. 요컨대 “대지와 해양의 연평균 온도”가 상승하는 현상은 상향 그래프로 그리고, “꿀벌 군집 수의 개체수”가 줄어드는 현상은 하향 그래프로 그렸다.1 이는 기후위기의 징후로서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에 속한다. 그런데 전시에서는 정영선의 삶과 조경작업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자연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온”2 과정의 근거로 의미 부여되었다.

 

호암미술관 희원 전경, 2002년. 사진: 양해남.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사실 1980년대, 90년대에 정영선이 작업한 조경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생태적 관심을 담은 것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이는 조경가가 자연, 생태, 환경을 무시했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지금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 이후의 자연계, 생물 환경, 기후의 위기를 고민하는 인식과는 다른 양태로 접근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말하자면 그즈음 조경은 개발도상국 한국의 관 주도 토건사업이라는 커다란 프레임에 부가적 요소로 포함되었다. 그런 과거를 동시대적 이슈를 투사해 조명하면 오히려 정영선의 조경이 군사정권의 건축적 경직성과 개발 만능주의의 반자연주의를 완화하고자 들였던 노력이 퇴색된다. 그런 맥락에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에서 소주제 “패러다임의 전환, 지속 가능한 역사 쓰기”가 독특한 역할을 했다. 관객들은 전시장 바닥에 강화유리로 장을 만들어 배치한 기록 자료들(스케치, 설계도면, 다이어그램 등 500여 점)을 훑어보며 정영선의 과거 조경이 취한 제한된 태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프로젝트를 수주한 다작의 방식을 직관적으로 알아챌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앞서 썼듯이 2000년대 초반 즈음부터 정영선의 조경은 보다 생태 지향적이고 땅의 원초성을 추구하는 쪽으로 이행한 것 같다. 1999년 현상설계를 위해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완성한 〈선유도공원〉 조경이 그 전환점이었을 것으로 판단한다. 조경설계 서안, 조성룡도시건축, 다산컨설턴트가 컨소시엄을 이뤄 진행한 그 프로젝트는 기존 정수장 시설의 구조와 건축 자재를 철거하는 대신 적극 활용해 새로운 조경을 구현해냈다. 나아가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한강 둔치 특유의 환경을 조경의 핵심 변수로 수용했고, 그렇게 해서 미래의 변화에 열린 조경 방법론을 선보였다.

가령 ‘녹색 기둥의 정원’은 과거 정수장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뜯어내고 남은 종횡의 기둥들에 덩굴식물들이자라도록 한 것이다. 정영선은 2002년 7월에 발표한 글에서 “〈선유도공원〉은 이제 막 태어났고 또한 이 순간부터 변화할 것”3이라 단언했는데, 이후 이 작가의 조경이 행해진 양상을 보건대 그 변화는 당사자에게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원다르마센터〉(2011) 작업을 소박하지만 지속가능성의 실천에 부합하는 조경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정영선은 미국 뉴욕 허드슨강 상류에 위치한 선 수련원인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이 직접 과수를 재배하며 교류할 수 있도록 광활한 대지의 원래 식생을 수용했고 그 생태계에 근거한 조경을 설계했다. 특히 자연 질서와 생태계 섭리에 순응하는 한국의 전통 정원에 영감을 받은 토마스 한라한Thomas Hanrahan의 건축 설계와 합을 맞춤으로써 자연, 건축, 조경, 인간, 전통과 변화의 공존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호암미술관 희원 식재 현황도, 1997, 트레싱지에 펜. 101 x 87 cm. 작가 소장.

이렇게 보면 정영선의 조경은 크게 두 개의 스펙트럼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미적인 차원에서는 꽤 일관된 속성을 유지했다. 공공공간의 제도적 조경에서든 생태 지향적 조경에서든 정영선의 조경미학은 과장된 형식이나 과시적 표현을 경계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특정 장소에 생명력과 조형성을 부여하는 힘은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정영선은 지역의 자생 식물을 비롯해 대형 수목까지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공간에 끌어들여 식생植生을 조성하고, 기존의 구조물은 물론 크고 작은 지형지물을 설계에 포함시켜 공간에 색채와 질감을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

작가는 여러 곳에서 이에 관해 “검이불루 화이불치”라는 인용구를 들어 설명해왔다.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백제의 건국왕인 온조왕 15년(BC 4년)에 축성된 궁궐에 대해 ‘백제본기’에서 평한 말이 그 출처다. 요컨대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 정영선이 참여한 공공기관, 미술관, 기념 공간, 위락시설 등이 모두 그러한 면모를 갖췄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공간들에 조경한 땅과 식생의 모습들이 검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은 맞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생각하는 사례는 〈남해 사우스케이프 암각동산〉(2018)이다. 정영선은 럭셔리 골프장인 그곳의 클럽하우스와 호텔 주변 경관을 조성했는데, 암각동산을 다듬어 바다 쪽으로 길을 열고 바위들 사이에는 풀을 심었다. 그 모습이 마치 원초적 자연의 단면 같아서 뒤로 축성된 초현대식 건물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정영선, 〈남해 사우스케이프 암각동산〉, 2018. 사진: 서안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더불어 삶

정영선이 조경업의 특성상 고객인 위촉 주체(관, 지자체, 기업, 개인)의 요구는 물론 다양한 이해관계에서 유발된 문제 때문에 겪은 힘든 경험을 “마음이 어려운 탓에”4라는 문학적 표현으로 대신한 글을 읽었다. 나는 정영선의 조경 미학과 성공적 일대기가 아마도 그러한 은근함, 에두름, 조심스러움에 근거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어느 정도는 옛사람의 시적 교양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시 제목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는 작가가 애호하는 신경림 시인의 작품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 시에는 유독 “더불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5 정영선의 조경 일대기가 일정한 삶의 깊이를 말해주기에 그 ‘더불어’는 진정성 있게 여겨진다. 또한 이 작가의 평생 직업으로서 조경 분야의 속성이 다른 존재와의 협업과 조화에 있기에 그 ‘더불어’는 정영선의 인생 화두가 아닐까 싶다.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마당. 2042. 사진: 강수미

전시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부마당과 전시마당에는 정영선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되었다. 그곳에서는 이제 천연기념물인 가침박달을 비롯해 병아리꽃나무, 팥꽃나무, 진달래, 모란, 노루귀, 미선나무, 물철쭉, 둥글레 등 한반도 자생식물과 야생화가 자라고, 인왕산을 빌려온 듯 단단해 보이는 작은 암석들이 사방을 균형 있게 맞들고 있다. 더불어 사는 땅과 삶의 질서가 그런가 싶다.

사우스케이프 오너스클럽 클럽하우스 및 스파 & 스위트 조경배치도, 2013. 조경 서안, 디자인스튜디오 loci, 건축 매스스터디스, 조병수 건축연구소. 디자인스튜디오 loci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 이지회,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24, pp. 6-11 중 6 인용.
2 같은 글, 같은 곳. 이지회는 “X자를 그리는 이 수치들은 왜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이 조경가의 작업을 조명하는지에 대한 당위성과 긴급함을” 드러낸다고 썼는데 그 구체적 논점은 전개하지 않았다.
3 정영선, 「흐르는 강물, 흐르는 시간 위의 선유도공원」(2002년 7월 《월간건축문화》 발표),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24, 244쪽.
4 정영선, 「나의길, 나의 작품」(1998년 6월-11월 《환경과조경》 122호-127호 연재),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도록, 국립현대미술관, 2024, 26-37쪽 중 31쪽.
5 “…산과 더불어 바다와 더불어 강과 더불어 나무와 풀과 꽃과 바위와 더불어…” 신경림,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위하여」, 『사진관집 이층』, 파주:창비, 2014, 72쪽. 이지회, 같은 글, 6쪽 참고.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서울특별시 박물관미술관진흥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8월호(통권 12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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