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본질적 진실과 만나는 단시조의 리듬: 낭만적 이데아가 펼쳐지는 윤경희 시조집 『아화』
[북리뷰] 본질적 진실과 만나는 단시조의 리듬: 낭만적 이데아가 펼쳐지는 윤경희 시조집 『아화』
  • 이정훈 객원기자
  • 승인 2024.08.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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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현시대와 복잡미묘한 현대인의 감정을 극히 짧은 3장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영도시조문학상신인상, 대구예술상, 대구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한 윤경희 시인의 다섯 번째 시조집 『아화』가 작가 기획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보이는 게 너무 많아 말이라도 줄이기로 했다”는 윤경희 시인의 새 시집을 펼치면 초중종장의 문장은 서사적 인과관계나 비유적 유사성에 의지하면서 모방하거나 재현된 세계가 아니라 지시세계로서의 세계, 바깥으로서의 세계를 즉자적으로 보여준다. 즉 언어로 포착되지 않으나 언어로 말해야 하며, (잘) 보이지 않는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들의 세계가 바로 이번 윤경희 시집의 시-세계다.

이숭원 문학평론가는 “단시조는 응축이 생명이다. 무한히 펼쳐지는 자연의 변화와 인간사의 파랑을 3장 6구에 담아내는 고도의 압축미학에 창조의 열쇠가 담겼다. 윤경희 시인의 시야에는 다양한 체험의 단층이 인생의 축도로 다가온다. 구름 뒤로 번지는 달무리의 음영이 첫사랑 사내아이의 아련한 촉감으로 다가오고, 사루비아꽃 피고 지는 순환에서 가고 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체감한다. 뒤축이 닳은 신에서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연상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에서 생의 진실을 떠올리는 장면은 참으로 절묘하다”고 평한다.

 

붕어빵을 굽고 있던 여자가 사라졌다

겨우내 온기 그득한 리어카도 사라졌다

그 길목, 붕어빵 같은 목련이 부풀고 있었다

- 「우수와 춘분 사이」 전문

 

이번 시집에서는 특히, 계절의 경계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확인할 수 있다. 우수와 춘분 사이 그 어디쯤의 모월 모일은 달력에서 숫자로 확인할 수 있으나, 윤경희 시인에게 있어 우수雨水와 춘분春分 사이, 즉 이제 막 겨울이 끝나가면서 봄이 시작되는 경계는 숫자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시적 주체에게 있어 봄의 시작은 “붕어빵을 굽고 있던 여자”와 “겨우내 온기 그득한 리어카”가 사라질 때다. “붕어빵 같은 목련”이 부풀기 시작하니, 독자들은 앞으로 매해 봄마다 목련이 붕어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목련을 “한동안 견딜 수 없는 내 눈먼 사랑”(「자목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봄은 “도톰한 입술 내밀며 스님 무릎 위에 툭,”(「쌍계사 홍매화」) 떨어진 홍매화로부터 시작된다. “하필이면/ 그것도, 법당 앞에 버젓이” 말이다. 그렇게 겨울 지나 봄은, 스님 무릎 위에 떨어진 홍매화나 붕어빵 같은 목련으로부터 온다. 얼마나 아름다운 은유인가.

 

머리카락 풀어헤친 밤의 영혼들이

날 세운 칼바람과 역모를 꾸미는지

맨발로 작두를 타며 서서히 접신 중이다

- 「소한小寒」 전문

 

이번에는 가을에서 겨울로 향한다. 24절기 중 ‘한로’와 ‘소한’을 제목으로 한 두 작품은 이번 단시조집에서 수작秀作으로 꼽아도 손색없다. 24절기의 일반적인 풍경이 아닌, 윤경희 시인만의 개성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늦사리 늙은 호박”이 “키 작은 햇살을 끌고” 간다는 「한로寒露」의 묘사가 빛나지만, 「소한小寒」 역시 묘사가 날카롭다. 소한의 맹추위와 매서운 칼바람을 ‘밤의 영혼’ 혹은 ‘귀신’의 이미지로 포착해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니 “머리카락 풀어헤친 밤의 영혼”이 날아다닐 것 같고, 밤중에 창밖으로 들리는 겨울바람 소리에 우리는 “날 세운 칼(바람)”을 들고 “맨발로 작두를 타며 서서히 접신 중”인 ‘밤의 영혼’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윤경희 시인은 계절의 경계 혹은 계절의 변화를 붕어빵 같은 목련, 스님 무릎 위에 떨어진 홍매화, 사루비아, 붉은 잠자리, 늙은 호박, 밤의 영혼 등의 사물 하나로 보여준다. 이는 하나의 사물에서 계절감 혹은 계절의 경계가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사물 하나, 단어 하나가 한 계절을, 시조 3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힘이자 가능성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이번 시집에서 군더더기 없이 계절의 경계 혹은 계절감만 충일하게 보여주기 위해 시인이 단시조를 전략적으로 선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남규 시인은 해설에서 “윤경희 시인은 하나의 사물과 단어로 계절의 경계를 나누고, 감각-환유의 방식으로 상상력에 근거한 환상 세계를 보여주면서, 삶의 비극성과 시대정신을 표출하는 알레고리를 시집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그러나 이때, 윤경희 시인은 우주를 한 면에 담는 거울이 아니라, 개별 삶을 비추는 거울 조각들을 시집 전체에 펼쳐 놓았다. 마치 별빛처럼 말이다. 단시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고, 단시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한다.

저자 윤경희 시인은 경주에서 태어나 2003년 《중앙일보》 지상백일장 월 장원과 함께 시조에 입문하였다. 2003년 종합 문예지 《생각과 느낌》에 수필로, 2006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유심신인문학상》에 시조로 등단했다. 시조집 『사막의 등을 보았다』 『태양의 혀』 『붉은 편지』 『비의 시간』, 시선집 『도시 민들레』가 있으며, 이영도시조문학상신인상, 대구예술상, 대구문학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아름답고 기억할 만한 단시조의 리듬으로 우리가 본질적 진실과 만나기를 기대하는 윤경희 시인, 그의 낭만적인 이데아가 펼쳐지는 시조집 『아화』의 행간 속으로 떠나보자.

 

 


 

* 《쿨투라》 2024년 8월호(통권 12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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