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복이 깃들기를: 유현미의 《Good Luck: 십장생》 전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복이 깃들기를: 유현미의 《Good Luck: 십장생》 전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8.2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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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구원

유현미는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중견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업은 1990년대 중반 조각과 설치미술을 시작으로 점차 회화, 조각, 설치, 건축, 사진, 영상이 횡단하고 융합하는 다원적 성격을 띠며 발전했다. 특히 이 작가가 2007년 즈음부터 주력해온 작업은 실제 사물과 공간의 표면, 나아가 인물의 피부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려 초현실적으로 연출한 후 사진 촬영하고 그것을 최종적으로 전시하는 형식이다. 이 유형의 작품들은 그간 《Still Life-차원의 경계》, 《Bleeding Blue》, 《Cosmos》 등 다수의 개인전을 통해 꾸준히 소개되면서 유현미의 미술 중에서도 독립된 계열로 인정받아왔다. 2024년 7월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열린 개인전 《Good Luck: 십장생》은 그 계열에 또 하나의 주제를 추가한 작업들이 선보였다. 이제부터 이 작업을 편의상 ‘조각-회화-사진 계열’이라 부르면서 전시작들에 다가가 보자.

이번 《Good Luck: 십장생》전에서 주목할 점은 ‘회화-조각-사진 계열’의 조형성과 함께 그것들이 시각적 이미지로 전달하고자 하는 특별한 메시지다. 이미 전시 타이틀에 힌트가 담겼다. ‘해·산·물․구름(때로 달)·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를 일컬어 불로장생不老長生을 상징하는 ‘십장생’이라 하지 않는가. 유현미는 그 십장생을 모티프로 한 자신의 최근작들이 감상자에게 구복究福의 이미지로 접속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무병장수하는 열 가지 생물十長生처럼 좋은 운good luck을 얻어 행복하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그 영험하고 길吉한 자연 존재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부터 조선시대 경복궁의 자경전 굴뚝에 이르기까지, 옛사람들의 8폭 자수병풍부터 서민의 통속화까지 우리 전통 문화의 여러 형식들 안에서 면면히 표현되어왔다. 그만큼 자연의 막강한 힘과 질서에 비해 한없이 약하고 유한한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빌며 귀히 여긴 구원의 표상들이었다. 그림이나 병풍 속에 묘사된 거북이와 사슴, 해와 달이 실제로 마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 여부는 선조들에게 중요치 않았으리라. 다만 그 형상들을 통해 어딘가, 누군가 절대적 힘의 존재에게 닿아 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 유현미의 작품들은 과학적 실증성이나 현실의 유효성을 좇는 대신 그 자체 현대미술로서/로써 복을 구하고자 하는 미적 행위다.

 

예술의 역할

유현미, 〈달 밝은 밤〉,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62×112cm, ⓒ유현미

한편,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이처럼 애써서 행복과 장수를 기원하며 이미지를 갈고닦아왔는데 왜 우리 인간의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여기서 잠시 옆길로 새자. 어느 날 프란츠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트와 대화하던 중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상계를 넘어선 곳에는 “희망이 충분히, 무한히” 많지만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라고 단언했다. 일화는 1934년 발터 벤야민이 ‘카프카 10주기’에 발표한 문학비평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에 소개되었다. 벤야민은 출처가 불분명한 그 짧은 대화를 근거로 카프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논했다. 그에 따르면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무희망성Hoffungslosigkeit, hopelessness”이다.1 ‘희망 없음’이 미적 원인이라니, 어떻게 그런가? 하지만 카프카의 대표작 『변신』에서 하루아침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참혹한 최후를 생각할 때, 또 『소송』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죄를 짓고 불행한 운명에 말려드는 K를 떠올려볼 때 벤야민의 판단이 맞는 것도 같다. 독자는 그 작품들을 읽으며 허무주의와 절망의 미학에서 뿜어져 나오는 삶의 비극적 진실에 동감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논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독자는 카프카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이 눅눅하게 다져진 그의 소설들 속에서 위로받는다. 세상엔 원인 없는 불행이 너무나 많고, 위험이 닥쳐도 손 쓸 수 없을 때가 허다한데 카프카의 주인공들은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님’을 대변하며 인류애(?)를 느끼게 한다. 살면서 자신이 때때로 느껴온 억압감, 부당함,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의 원인이 ‘좋지 않은 절대자의 기분 상태’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인가 싶어 어이가 없으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예술은 우리를 세계의 비의적esoteric 차원으로 안내하고, 인생의 힘겨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짐을 나눠지면서 외롭지 않게 한다. 사실 선사시대부터 내려오는 예술의 가장 근원적이고 오래된 역할이란 이 같은 것이다. 요컨대 예술을 통한 가상적 구원. 그래서 조르주 바타유는 “예술의 영향력은 실리적인 활동에 대립해 기호들-유혹하고, 감정에서 비롯되고 또 감정에 호소하는 기호들-의 형상화라는 무익한 활동”2에 있다고 썼던 것이다.

 

조각-회화-사진 계열

《Good Luck 십장생》 전시장 전경, 사진: 강수미

다시 유현미의 《Good Luck: 십장생》 전시로 돌아와 보자. 감상자는 그 전시를 어떻게 보는가? 이 질문은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보는 방식’이 관건인데, 유현미의 작품과 전시에서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측면과 조형적 기법을 분석하면 우리는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가치와 의미’의 문제로서 그 작품들이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으며 감상자에게는 어떠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문학적 판단력이 풍부하면 할수록 좋을 텐데 기본적으로 자유롭게 열린 질문이기 때문이다.

먼저 유현미의 ‘조각-회화-사진 계열’이 만들어지는 제작 형식을 알아보자(이는 얼핏 작품을 형식주의로 다루는 것 같지만, 이 작가의 미술에서는 작품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나는 유현미가 처음 이 시리즈 작품을 선보인 2007년, 《Still Life-차원의 경계》 개인전 도록에 이렇게 썼다.

 

“최근 이 작가의 상상력은 사물과 사물 사이를 날아다니고, 미술 장르 사이를 횡단했던 것 같다. 그 결과가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일련의 사진작품들이다. 이 상상력의 횡단은 이를테면, 우리가 습관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사물과 매체의 속성을 가로지르고 융합하고, 관계의 망을 부수고 다시 조립해서 서로 내포적 관계로 만드는 쪽으로 나아간다.”3


여기서 중요한 논지는 ‘장르 사이의 횡단’이다. 유현미의 ‘조각-회화-사진 계열’은 시각예술분야가 미술사 및 미술제도에 따라 관행적으로 구분해온 그 세 장르의 매체 및 조형언어를 동시에 활용하고 하나로 종합한다는 의미다. 이번 전시작 중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No. 1>을 예로 들어보자. 작가는 구체, 사각형 판, 그리고 모래시계·바위·지구본·물방울·종이학·사슴·집 형태의 오브제들을 조각한 후 그것들의 표면에 각각 채색을 해서 명암처리도 하고 그림자도 그려 넣었다. 다음, 그것들을 절묘하게 균형을 맞춰 수직으로 쌓아올렸다. 그렇게 연출한 사물과 공간의 상황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이미지를 다시 캔버스 천에 잉크젯으로 프린트하고 유화로 부분 부분을 미세 조정해 완결했다. 전시장의 관객들은 그 최종 형태로 벽에 걸린 평면화를 보게 되는데, 대부분은 그 앞에서 ‘사진인지, 그림인지’를 궁금해 한다. 그만큼 유현미의 작품들이 두 영역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다.

하지만 세심히 보는 감상자는 사진이자 그림인 그 작품에 설치미술 기법 또한 구사되었음을 알 것이다. 작가가 조각적으로 만들고 회화적으로 채색 표현한 십장생 오브제들은 물리적 힘이 작용하는 현실 공간에 설치미술 스타일로 배치된 후 사진 촬영되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감상자가 보는 최종 작품은 하나의 캔버스지만, 그것은 최소 4가지 예술의 절차와 표현방법들이 상호작용하고 응축되어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2007년 이후 현재까지 약 17년 동안 유현미의 작업에는 매체 융합적이고 장르 횡단적인 속성이 그 계열의 본질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 것이다.

《Good Luck 십장생》 전시장 전경, 김희선 촬영, 뮤지엄한미 제공

 

행운을 빌어요… 십장생

유현미,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No.1〉,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94×130cm ⓒ유현미

그런데 이번 전시작품들에서 특별히 더 주목할 부분은 유현미가 십장생이라는 전통적 모티프의 전형성을 깨고 그것을 새로운 이미지로 형상화한 점이다. 앞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No.1>에서 작가가 제시한 십장생의 이미지는 옛 것 느낌이 아니라 현대적 감성이다. 또 십장생을 둘러싼 서사 대신 기하학적 디자인에 초점이 맞춰진 화면임이 뚜렷이 드러난다. 전시제목의 가이드가 없다면, 사람들은 굳이 거기서 십장생과 연관된 맥락을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대중가요에서 차용했기에 귀에 꽂히듯 익숙한 작품 제목과는 달리 <저 푸른 초원… No.1>은 초현실주의 스타일로 연출한 화보나 모던한 디자인의 포스터그래픽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요즘 각광받는 Open AI사의 소라SORA나 달리Dall-E,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써서 제작한 그림인가 오해할 수도 있다. 유현미의 작품처럼 현실에서 기하학 형태의 오브제들을 쌓아올리기란 중력 때문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유현미, 〈핑크 에피소드 No.1〉, 2024, Oil paint and inkjet print on canvas, 194×130cm ⓒ유현미

<달 밝은 밤>, <핑크 에피소드 No.1>에서는 그러한 물리적 불가능성이 작품의 내적 긴장감과 강렬함을 더한다. 사물들이 아주 얄팍하고 작은 접점들만으로 서로 연결되어 3차원 공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팍팍하게 짓눌린 우리 일상에 서커스의 즐거움이라도 불어넣으려는 듯 그 오브제들을 절묘하게 한 화면에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십장생 중에 학은 종이학으로, 사슴은 작은 순록 피규어들로, 거북이 또한 작은 모형을 써서 재현함으로써 작품은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문학적 알레고리처럼 보는 이에게 자의적인 해석을 허용한다.

나는 유현미의 《Good Luck: 십장생》전시가 이제까지 작가가 지속해온 ‘조각-회화-사진 계열’에 속하면서도 유독 의미가 값진 이유를 이와 같은 점에서 찾는다. 즉 서커스의 재미처럼 가볍게, 대중가요 가사처럼 익숙하게, 작은 우화처럼 소박한 기호들signs로 작품을 구현한 그 감수성이 특별하다. 실제로는 매우 어렵게 균형을 잡아야만 나오는 구성들이고, 노래의 비물질적 표현과는 달리 직접 질료를 쓰고 노동을 해야 표현이 되는 이미지들이며, 인생의 쓰디쓴 기의signified를 간명한 기표signifier로 전환할 때만 가능한 기호들이지만 말이다. 그 점에서 앞서 바타유의 정의처럼, 나는 유현미의 작업들이 유혹하는 예술의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굳이 행운을 빌어주는 말과 상투적 제스처 없이도 보는 이들의 복을 기원하는 이 작가 나름의 십장생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카프카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모든 원고를 “읽지 말고 불태우라”는 유언의 집행자로 브로트를 지명했는데, 그는 친구의 유언을 배반하고 사후 출판과 전기 작업에 헌신함으로써 카프카의 문학예술을 인류역사에 길이 살렸다. 철학자 김진영은 2017년 7월 자신이 연재하던 칼럼에서 카프카의 그 말을 동시대적 의미로 해석했다. 그가 긴 투병 끝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난 때가 2019년 10월이니 약 2년 전의 글이다. “카프카의 희망론을 되새겨야 할 때 (…) 희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사실은 꿈의 권리가 주장될수록 기억되어야 한다.”4 내가 유현미의 《Good Luck: 십장생》전을 보며 왜 카프카의 ‘희망 없음’을 떠올렸는지 스스로도 몰랐으나, 이 글을 마칠 때쯤에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위한 복에 매달리는 대신 서로의 복, 타인의 복을 빌어준다고 믿고 싶기 때문인 듯하다.

 

 


1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67-68쪽.
2  조르주 바타유,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 차지연 옮김, 워크룸 프레스, 2017, 20쪽
3  강수미, 「환영의 지표 – 조각·회화가 내포되어 있는 유현미의 사진들」, 『Still Life-차원의 경계』 전시도록, 갤러리인, 2007.
4  김진영, 「카프카의 희망」, 한겨레, 2017. 7. 13.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2737.html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서울특별시 박물관미술관진흥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9월호(통권 1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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