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역사의 시간을 몸소 감각하는 경험: 아트선재센터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역사의 시간을 몸소 감각하는 경험: 아트선재센터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
  • 정다현(드라마터그)
  • 승인 2024.08.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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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Tzu Nyen, T for Time, 2023-2024, Photo: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 2024.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중고등학생 때 나는 ‘역사’라는 과목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시험 직전 교과서를 몽땅 외워버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나는 역사를 공부할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곤 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한두 문장들로써 단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역사 또한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역사는 ‘지나간’ 시간일 뿐인가? 지나간 시간의 기록인 역사가 오늘날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로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까?

2024년 6월 4일부터 8월 4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된 전시 《호추니엔: 시간과 클라우드Ho Tzu Nyen: Time & the Cloud》은 역사와 시간, 정체성 등의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천착해왔던 작가 호추니엔이 설계한 “비판적 사유 실험”1들을 응축해놓은 듯한 전시였다. 호추니엔은 싱가포르 출신의 현대 미술가로, 비디오 아트와 설치 미술을 주로 작업하는 아티스트다. 내가 처음 접했던 호추니엔의 작품은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 ‘아시아포커스’ 〈의문의 라이텍〉이었다. 이 작품은 1939년부터 1946년까지 말레이 공산당 총서기이자 삼국(프랑스, 영국, 일본)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라이텍에 관한 작품으로, 내게 개인사를 넘어 역사는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편집되고, 재서술될 수 있음을 알려주며 그러한 세계에서의 기억에 대한 문제의식을 남겼다.

Ho Tzu Nyen, Timepieces, 2023-2024, Photo: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 2024.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이번 전시는 총 세 작품2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시간(타임)의 티〉와 〈타임피스〉에 대해 살핀다. 두 작품은 아시아의 근대성과 시간성에 대한 작품으로 〈시간(타임)의 티T for Time〉는 호추니엔이 2012년부터 지속해오고 있는 〈동남아시아 비평사전The Critical Dictionary of Southeast Asia〉의 일환인 작업이다. 이는 동남아시아의 역사, 문화, 정치, 정체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A부터 Z까지 26개의 알파벳을 통해 구조화한 작품이다. 다층적이고 복잡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점을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알파벳의 기호로서 접근해 시각화했다. 가령 이 작업은 2021년에 국내 전시회에서도 소개된 적 있는데, 제2회 ‘가상정거장’3에서 소개되었던 호추니엔의 VR 작업 〈R for Resonace〉가 그것이다.

비평사전의 신작 〈시간(타임)의 티〉는 아트선재센터 3층 스페이스1에 들어서면 좌측 거대한 스크린에서, 전시실 우측엔 다양한 크기의 43개 평면 스크린들에서 〈타임피스〉가 각각 상영되고 있었다. 〈타임피스〉의 영상들은 시간에 관련된 영상들로 조각조각 재생되고 있었다. 나의 경우 〈타임피스〉의 작업을 먼저 찬찬히 감상하고 〈시간(타임)의 티〉의 작업을 감상했는데, 〈타임피스〉과 〈시간(타임)의 티〉의 작업들이 호추니엔이 바라 본 아시아의 시간성에 대한 “서로 다른 얼굴을 갖고 있는 쌍생아”4와 같은 작업임을 알 수 있었다. 파편화되어있던 시간의 조각들Timepieces의 영상들이 〈시간(타임)의 티〉 영상으로 수렴되었다. 〈시간(타임)의 티〉는 시간과 근대성이 모두 서구에 의해 발명되었음을 구명해내는 일종의 도큐멘트 같았다.

Ho Tzu Nyen, Hotel Aporia, 2019, Photo: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 2024.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이 전시가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점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다층적으로 감각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화이트 큐브에 그저 작품을 전시해놓는 게 아니라 두 겹의 스크린-애니메이션이 투사되는 전면 스크린과 실사 이미지들이 투사되는 후면 스크린-을 병치하여 시좌視座를 선택해 작품의 세계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라는 것 같았다. 프리재즈 솔로 색소폰의 트랙 위로 영상의 스크립트가 발화되고 흩어지는 청각적인 경험은 눈뿐만 아니라 오래 우리 마음에 남게 했다. 이러한 감각적 전략들은 묻는다. 역사에서 이면과 표면의 현실(혹은 진실)은 무엇인가? 그리고 켜켜이 쌓여온 역사의 시간들을 겪으며 나는 현재 무얼, 어떻게 볼 것인가?

Ho Tzu Nyen, Hotel Aporia, 2019, Photo: Seowon Nam. Courtesy of Art Sonje Center ⓒ 2024.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전시실을 나올 때쯤 호추니엔이 설계해놓은 레이어layer와 공명resonance을 곱씹으며, 예술(미학)과 정치에 대해 말했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전언이 떠올랐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하지 않기, 눈을 감고 있었으면서도 보았다고 말하지 않기, 본 것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기, 그저 이름만 붙여놓고는 그것을 설명했다고 믿지 않기이다.” 5

 


1  손옥주, 「동남아시아란 무엇인가: ‘가상정거장’ 호추니엔」, 《연극in》, 2021. 12. 23.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2624
2  나머지 한 작품은 일본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호텔 아포리아(Hotel Aproia)〉(2019)이다.
3  “여러 멀티버스들을 잇는 장”을 표방한 전시회로, 2021년 11월 23일부터 12월 5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가상현실, 증강현실, 뉴미디어, 온라인 게임 등을 바탕으로 한 국내외 작가들이 다수 소개되었다. 손옥주 글 참고.
4  아트선재센터 전시 소개글 참고.
5  자크 랑시에르, 양창렬 옮김, 『무지한 스승』, 궁리, 118쪽.

 


정다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 전공 졸업. 주로 공연예술 관련 글을 쓰고, 프로덕션 드라마터그 작업을 함.

 

* 《쿨투라》 2024년 9월호(통권 1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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