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메스티아국제단편·산악영화제] 산과 영화, 그리고 전설이 만나는 곳: 제4회 메스티아국제단편·산악영화제
[제4회 메스티아국제단편·산악영화제] 산과 영화, 그리고 전설이 만나는 곳: 제4회 메스티아국제단편·산악영화제
  • 설재원 에디터
  • 승인 2024.09.03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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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하투나 훈다제 집행위원장, 라인홀트 메스너, 디애나 메스너

한 폭의 그림 같은 코카서스 산맥에서 펼쳐지는 제4회 메스티아국제단편·산악영화제(이하 메스티아영화제)가 지난 7월 23일(화)부터 27일(토)까지 조지아 스바네티 지역의 중심 도시 메스티아에서 열렸다. ‘전설이 만나는 곳Where Legends Meet’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올해 영화제의 주빈Guest of Honour은 전설적인 산악인이자 영화감독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이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인류 최초로 히말라야 산맥의 8,000m급 고봉 14개를 무산소 단독 등정한 살아 있는 전설이자 슈퍼 알피니즘의 역사 그 자체이다. 2016년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이후 8년 만에 영화제 개막식에서 다시 만난 우리는, 조지아에서 재회한 것을 신기해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전설이 만나는 곳

‘전설이 만나는 곳’은 조지아와 소련의 전설적인 산악인 미하일 헤르기아니와 라인홀트 메스너의 만남을 염두에 둔 네이밍이자 세계 산악 역사 200년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스티아는 조지아와 소련의 전설적인 산악인 미하일 헤르기아니를 배출한 도시이다. 메스티아인에게 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일부이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가장 존경하는 산악인인 미하일 헤르기아니는 스포츠인으로서 7번이나 전국 산악 챔피언에 오른 뛰어난 성과를 보인 인물이지만, 그에게 있어 등반은 스포츠보다는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산을 사랑했고, 산과 사람의 동행을 중시했다. 그가 평생에 가장 자랑스러워 한 것은 수많은 메달이 아닌, 등반 과정에서 위험에 빠진 여러 목숨을 구한 구조자로서의 활동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라인홀트 메스너가 메스티아를 찾은 것은 아주 특별하다. 올해는 54년만에 라인홀트 메스너의 동생인 귄터 메스너의 신발 한 짝을 되찾은 해이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귄터 메스너는 1970년 파키스탄 낭가파르밧의 루팔벽을 초등했다. 두 사람은 정상까지 오른 후 산을 넘어 반대쪽 디아미르벽을 이용해 하산했는데, 오직 라인홀트 메스너만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이후 ‘야망에 찬 라인홀트가 귄터를 남겨두고 정상으로 향했고, 귄터는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루팔벽에서 사망했다’는 루머가 평생을 메스너를 따라다녔고, 그는 캠프의 도움을 받는 대신 단독 등정을 하며 고독한 산행을 이어갔다.

그러다 2004년 수정 채취에 나선 현지인이 디아미르 하산길에서 신발 한 짝과 뼈를 발견하는데, 라인홀트의 DNA와 대조한 결과 귄터의 것이 확실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22년 6월 디아미르벽에서 귄터의 나머지 신발 한 짝이 발견되어 지난 3월 라인홀트에게 전달되었다. 이로써 50여 년 동안 라인홀트 메스너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루머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카티 발리아니(가운데)와 게기 팔리아니부집행위원장(오른쪽)

그의 메스티아 방문은 동생을 버렸다는 오명을 벗어 던지고 마침내 그가 가장 존경했던 헤르기아니의 고향을 찾은 것이다. 영화제 기간 중에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미하일 헤르기아니의 생가를 방문하여, 그의 아내인 카티 발리아니와의 감동적인 만남이 성사되기도 했다. 발리아니는 102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와 직접 악기 연주를 선보이며 메스너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헤르기아니 생가를 찾아 그의 흔적을 둘러본 메스너는 “1920년대 초부터 유럽의 전문 등반가들이 알프스를 떠나 더 높고 험준한 등반을 하기 위해 코카서스를 찾았다”며 “메스티아의 우쉬바산은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산 중 하나”이고, “등산 100주년을 맞은 코카서스 산맥을 축하하며, 지속적인 발전과 성과를 바란다”는 말을 건넸다.

아르칠 바드리아슈빌리와 라인홀트 메스너

영화제 기간의 하이라이트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조지아의 후배 산악인들과 메스티아 주민들을 만나 진행한 마스터클래스였다. 특히 이번 영화제에는 ‘전설이 만나는 곳’이라는 주제에 맞게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았다. 바로 2022년 황금피켈상Piolet d’Or을 받은 조지아의 신성 아르칠 바드리아슈빌리Archil Badriashvili이다. 촉망받는 산악인인 바드리아슈빌리는 2019년 낭가파르밧을 등정한 최초의 조지아인이고, 지난 8년 동안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에 코카서스 등반 경험을 기고하며 이 지역을 알렸다.

마스터클래스 중 산악인으로서 그가 생각하는 최고의 성과를 묻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지금 이 순간 이자리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든 평생 동안 산과 함께한 세월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특히 그는 산 정상을 정복하는 기쁨보다 무사히 하산하는 행복을 강조했다. 그는 “봉우리가 높을수록 정상에서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짧은 대신 길고 어려운 하산이 기다리고 있다”며 “산 중턱에 무사히 도착하여 온전히 숨 쉬고 가족과 함께 성공을 축하하는 순간이야 말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한 기분이 드는 성취의 순간”임을 밝혔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 앉은 청중은 메스너의 답을 듣고 박수갈채를 보냈다.

하지만 메스너의 답변이 무색하게도 이 자리에 참석한 아르칠 바드리아슈빌리는 8월 10일 코카서스 산맥에서 낙뢰로 추락해 세상을 떠났다. 폐막날 메스너와 돌로미테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한 지 불과 보름만에 일어난 참사였다. 영화제는 사고 이후 고인을 추모하는 성명을 내며 그를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라인홀트 메스너의 마스터클래스

 

영화 프로그램과 부대행사

올해로 4년째를 맞는 메스티아영화제의 개막작은 주빈인 라인홀트 메스너가 만든 〈낭가파르밧: 나의 핵심 산Mein Schlüsselberg〉이다. 이 작품은 1970년 낭가파르밧 정복 당시의 미공개 원본 영상을 사용하여 메스너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시간을 이야기한다. 라인홀트와 귄터 형제의 비극을 담고 있는 〈낭가파르밧〉은 고산의 두려움과 형재의 우애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냈고, 마지막 순간 벌목꾼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남은 라인홀트를 보여주며 안타까움과 감동을 동시에 전달하였다.

단편경쟁과 산악경쟁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올해에 눈에 띄는 점은 이미 장단편으로 뚜렷한 성과를 낸 감독들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단편경쟁에서 대상은 오랜만에 단편을 선보인 게오르게 오바슈빌리의 〈서리와 꼬마 남학생The Frost and a Little Schoolboy〉이 받았다. 이 작품은 동명의 조지아 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폭설이 내리는 시골 마을의 소년과 소녀의 일화를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감독인 오바슈빌리는 〈옥수수 섬〉으로 카를로비바리영화제 대상을 받은 바 있는 베테랑이며, 늘 한국인 스태프와 작업을 함께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시상식에서 만난 오바슈빌리는 현재 준비중인 장편 차기작 편집을 위해 올 하반기 한국에 머물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특별언급상은 알리 리자 바야짓의 〈관습Tradition〉이 차지했다. 이 작품은 튀르키예의 고물상과 재단사가 힘을 합쳐 권력에 맞서는 모습을 담아냈다.

심사위원상을 받는 감독 리비우 마기단(오른쪽)과 배우로 참여한 그의 가족

산악경쟁 부문에서는 프랑코 가르시아 베세라의 〈바위와 구름 사이로Through Rocks and Clouds〉가 에코상을, 리비우 마기단의 〈피난Refuge〉이 심사위원상을, 라파엘라 클라우디아 토리첼리의 〈오레스트의 오두막〉이 대상을, 호세 다비드 아펠의 〈동굴의 우화〉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에코상을 받은 〈바위와 구름 사이로〉는 페루의 월드컵 도전과 알파카 농장의 8살 꼬마가 바라보는 도시화의 위험을 교차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올해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K플러스 국제심사위원상을 받기도 했다. 심사위원상의 〈피난〉은 부모의 이혼 후 매년 가족 산악 여행에서만 재회하는 두 남매가 함께 더 오래 있기 위해 몰래 도망치는 이야기이다. 루마니아의 자연을 담은 이 작품은 마기단의 아내와 두 자녀가 배우로 참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대상을 받은 〈오레스트의 오두막〉은 해발 2,600미터에 위치한 오레스트 산장에서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가족이 운영하는 이 오두막은 비건 음식이 제공되며,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곳으로, 빙하가 녹아내리는 기후 위기 시대에 산과 인간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영예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동굴의 우화〉는 아르헨티나 투쿠만 산의 동굴에서 50여 년을 산 80세의 페드로의 삶을 다루고 있다. 감독인 아펠은 반세기 동안 동굴에서 은둔하며 살아온 그의 삶과 놀라운 자연을 함께 보여주며 신비롭고 불안한 공생을 매력적으로 그려냈다.

그랑프리를 받은 호세 다비드 아펠(왼쪽)과 하투나 훈다제 집행위원장(오른쪽)

이 외에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의 이사를 역임한 바바라 가세르의 마스터클래스와 같은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 영화제를 빛냈다. 그는 올해 오스트리아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 FIPRESCI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그의 마스터클래스를 듣기 위해 수도 트빌리시에서 조지아국립쇼타루스타벨리연극영화대학의 비평 전공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는 영화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세와 덕목을 설명하며, 미래 세대에게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를 누비는 문화예술인이 되길 강조했다.
4년차를 맞는 메스티아영화제는 이제 주민들이 기다리는 지역의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문화 불모지인 메스티아 지역에 영화를 뿌리내리겠다는 의지로 시작된 메스티아영화제는 ‘산악’이라는 지역 특색을 살린 테마로 어느새 ‘전설’ 메스너가 찾을 정도의 규모 있는 축제가 되었다. 코카서스 산맥 아래 모두가 하나 되는 경험, 이것이 작지만 강한 메스티아영화제의 내일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이다.

 

 


* 《쿨투라》 2024년 9월호(통권 12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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