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월평] 어둠을 견디게 하는 순간의 희망: 〈새벽의 모든〉(미야케 쇼, 2024)
[영화월평] 어둠을 견디게 하는 순간의 희망: 〈새벽의 모든〉(미야케 쇼, 2024)
  • 이지혜(영화평론가)
  • 승인 2024.10.02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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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없는 영화

미야케 쇼의 〈새벽의 모든〉(2024)은 동명의 소설 『새벽의 모든』 (세오 마이코, 2022)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배운 것처럼 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소설은 ‘누가 어디에서 어떤 갈등을 겪는가?’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 서사의 진행에도 인물, 사건, 배경은 필요하다. 특히 등장인물이 ‘병에 걸리는 것’은 대부분 영화에서 사건으로 특별하게 다루어진다. ‘발병’은 평이했던 스토리에 파고를 만들고, 인물 간의 관계에서 갈등이나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재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병’을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후지사와가 앓는 PMS생리전증후군이 매달 착실하게 돌아오는 일상이고, 야마조에의 공황장애도 매일 불현듯 따라붙는 일상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미야케 쇼는 두 인물의 고독하고 고단한 나날을 어떠한 미화도 없이 16㎜ 아날로그 필름 속에 반복해서 담는다.

따라서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쿠리타 과학’에서 동료로서 마주하는 것은 영화 초반부가 다 지난 후다. 이미 병을 앓는 것이 생활이 되었고, 각자가 갖은 방법으로 나아지거나 덜 괴롭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며 사회에 겨우 적응하기 시작한 도중이다. 물론 PMS 증상이 발현된 후지사와가 야마조에에게 매몰차게 쏘아붙이는 순간이나, 두 사람이 서로의 병을 알아채는 찰나를 언뜻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인물은 장면이 전환되자마자 화해한다. 기존의 영화들에 비하자면 갈등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 미비하다.

이처럼 〈새벽의 모든〉은 우리가 흔히 단발의 사건이라고 치부하는 것에서 파생되는 고독과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홀로 매일 이겨내야 하는 ‘일상’이라는 시선을 고요히 유지한다. 그리고 ‘사건’의 자리에 ‘배경’을 둔다. 말하자면 〈새벽의 모든〉은 사건은 없고, 배경에 집중하는 작품이다. 인물을 둘러싼 일상과 풍경의 변화 과정에 세밀히 골몰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다니는 소기업 ‘구리타 금속’(소설 번역 표기를 따름)을 미야케 쇼가 영화에서 ‘쿠리타 과학’으로 바꾼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배경’이 있는 영화

후지사와는 어렵게 입사한 대기업을 PMS를 치료하기 위해 복용한 약 부작용으로 그만둔다. 이때 후지사와는 “이상한 사람 취급받으며 1분도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렇지, 오늘 안에 사표를 내자. (중략) 있으나 없으나. 아니, 내 경우엔 없는 편이 나은 존재였을 것이다.”라고 내레이션한다.

언뜻 충동적으로 그만둔 것처럼 보이지만, 퇴사 직후 후지사와는 불확실한 미래를 착실히 걱정하며 점집에 들르고, 휴지를 나눠주는 길거리 아르바이트도 한다. 그는 끊임없이 증명사진을 자르며, 재취업을 시도한다. 미야케 쇼는 이러한 실패의 ‘과정’을 찍는데 영화 초반부를 전부 할애한다. 이렇게 공들인 시퀀스는 “동정이나 걱정을 바라지 않는다. 돈 없인 생활이 안된다. 투덜거려봤자 별수 없다.”라는 후지사와의 대사와 함께 화면의 암전과 막을 내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5년 후의 후지사와와 그의 새로운 회사인 ‘쿠리타 과학’이 등장한다.

‘쿠리타 과학’은 어린이 교재용 현미경이나 플라네타륨planetarium, 천체투영기를 만드는 직원 열 명 미만의 소기업이다. 원작 소설의 ‘구리타 금속’은 우수관이나 기와 등의 큰 건축자재부터 못과 철사 같은 작은 요소까지 철물점이나 인테리어 업체에 납품하는, 직원 여섯 명의 작은 회사다. 회사의 규모도, 일하는 구성원도 엇비슷한데 미야케 쇼는 왜 굳이 ‘구리타 금속’을 ‘쿠리타 과학’으로 바꿨을까?

앞서 후지사와의 말인 “없는 편이 나은 존재.”라는 문장을 통해 그의 의도를 더듬어 짐작할 수 있다. ‘구리타 금속’은 건물의 건축을 위해 필요한 못이나 나사 같은 작은 부품까지 파는 곳이다. 아무리 쓸데없어 보여도 필요하기에 만들어졌고, 필요 없는 부품은 없다. 영화 〈새벽의 모든〉이 소설 『새벽의 모든』의 ‘구리타 금속’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세상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는, 캐릭터에 집중된 메시지를 좀 더 직관적으로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야케 쇼는 영상문법을 사용하는 영화감독이다. 그러므로 영화라서, 스크린이 있기에 가능한 시도인 ‘쿠리타 과학’으로의 배경 전환을 꾀한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계절의 변화를, 밤하늘의 풍경을 스크린 위에 긴요하게 담아낸다. 이는 인물이 겪는 ‘사건’, 즉 ‘순간의 절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이 ‘일상’으로 치환되는 ‘과정’을 스크린에 현현하고자 한 미야케 쇼의 선택과도 맞닿아 있다.

 

각자의 어둠을 인정할 때

천체관측키트는 천체, 납작하게 말해 어두운 곳에서 항성이나 별자리를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든 시뮬레이션 기기다. 어두운 반구형 또는 구형 돔 안에서 작동시키면, 밤하늘 별의 모습을 비교적 손쉽게 관찰할 수 있다. 천체관측키트는 ‘쿠리타 과학’의 주력 상품이자 최고 인기 상품이다. 이에 보답하듯 ‘쿠리타 과학’은 지역 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1년에 한 번 초등학교에서 상영회를 가진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동료로서 함께 이 행사를 준비한다.

〈새벽의 모든〉이 특별한 것은 ‘함께’라는 지점을 그리는 방식이다. 여성인 후지사와가 여성의 장기로 앓는 PMS를 남성인 야마조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내면의 병인 ‘공황장애’를 겪어보지 않은 후지사와는 야마조에의 고통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둘은 각각의 존재와 각각의 고통을, 서로가 홀로 온전히 버텨내야 하는 긴 어둠의 시간을 인정한다. 대신 이 과정 속에서 오직 서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물질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 손길을 상대에게 내밀어 아픔을 담백하게 위무한다.

예컨대 후지사와는 공황장애를 ‘경험’할 순 없어도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알아볼 순’ 있다. 야마조에는 PMS를 ‘경험’할 순 없어도, 관련된 전문 서적을 통해 ‘알아볼 순’ 있다. 그 덕분에 후지사와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공황발작을 일으키므로 미용실에 갈 수 없는 야마조에의 집을 방문해 그의 더벅머리를 잘라줄 수 있고, 새해에 신사에서 그의 무운을 빌어줄 수 있다. 야마조에는 PMS 증상이 발현되면 한껏 예민해지는 후지사와가 한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둘은 서로에게 의지해 밤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다. 이러한 도움은 어쩌면 ‘쿠리타 과학’의 지역 공헌 활동과도 닮은 도움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네는 다감한 마음이다.

 

새벽의 모든 ‘희망’

항성은 일정한 자리에 고정되어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천체를 말한다. 항성의 다른 이름은 ‘별’이다. 항상 일정한 자리에 있어서 ‘붙박이별’이라고도 부른다. 사람들은 고정된 별들 사이에 인위적으로 줄을 그어 여러 모양의 별자리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으면, 별자리를 보고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도 있다.

땅에서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은 아름답다. 그런데 어둠 속에 붙박인 별이 스스로 빛과 열을 내는 것은 천체에서 열핵 융합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별은 오도 가도 못 하고 고독하게 활활 타고 있는 가스 공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철학자 니체가 말한 것처럼 본질은 의미의 다양성을 전제로 한다.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저것은 내게 무엇인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사물에 대한 각자의 의견이자 해석일 뿐이다. 의견이자 해석에는 감정이 깃들 수밖에 없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해석은 확정된 존재being가 아니라 과정becoming이다.

후지사와와 야마조에는 상영회를 위한 잔업 후 한밤의 귀갓길에서 별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은 이제 함께, 또 각자 별자리를 알아볼 수 있다. 이들에게 별의 본질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별은 어둠을 버티게 한 찰나의 희망이고, 아침을 기대하게 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닿아도, 가서 닿지 않아도 좋다. 살면서 스쳐 지나간 모든 사람에게 이 영화를 건네고 싶다.

 

 


이지혜 영화평론가·문화평론가. 제16회 《쿨투라》 신인상 영화평론부문 등단.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A로 문화현상을 연구하며 경희대에서 강의.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르몽드》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하며 서울형책방 지원사업을 진행. 전주국제단편영화제(2023) 전북부문 심사위원, 서울역사영화제 집행위원(2024).

 

* 《쿨투라》 2024년 10월호(통권 12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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