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석의 디카시 안테나] 김경화 시인의 「은퇴의 꿈」
[오민석의 디카시 안테나] 김경화 시인의 「은퇴의 꿈」
  • 오민석(시인, 단국대 명예교수)
  • 승인 2024.10.10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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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의 꿈

김경화

하얀 근심이 날고 있다

 

방향 키 따라 흔들렸던 어제가

정박하는 시간

 

아직은 태평양으로 나가고 싶다

 

 


김 경 화
디카시집 『디카시, 섬광의 유혹』 출판.

 

 


저기, 불안의 바다를 떠가는 배

프로이트는 불안(근심)을 자동적인 불안automatic anxiety과 신호적인 불안signal anxiety으로 나누었다. 전자는 실제로 어떤 위험하거나 심각한 상황이 터져서 그것에 압도된 자아가 느끼는 불안이고, 후자는 (아직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자아가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서 자아의 방어 기제가 발동되면서 생겨나는 불안이다. 어떤 경우이든 불안은 인간 존재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자아란 불안이 실제로 머무는 자리이다The ego is the actual seat of anxiety”라고 하였다. 자아라는 의자에 근심 걱정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을 캐리커처로 연상해 보라. 그게인간의 모습이다.

“하얀 근심”이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다. 시인에게 구름은 근심과 공포의 움직이는 메타포이다. 그것은 ‘신호적 불안’의 상징이다. 미래라는 항로 앞에서 누구나 이런 불안감에 노출된다.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의 “방향키”는 매일 흔들린다. 그렇게 일상은 “어제”로 굳어진다. 구름 아래 실루엣처럼 검은 건물은 미지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은유이다. 근심으로 가득찬 거대한 하늘만큼 배의 크기와 위용도 만만치 않다. 그리하여 시인이 디카시로 재현한 불안의 심리학은 마치 서사시처럼 웅장하다. 역설적이게도 근심의 세계는 밝은 창공으로, 그것에 맞서는 자아의 세계는 검은 배로 형상화되어 있다. 자아는 알 수 없는 심리의 복잡한 미로이다. 그러므로 근심이 자아를 온전히 지배할 수 없다. 자아는 자신을 깔아뭉개고 있는 근심을 털어내며 조용히 말한다. “아직은 태평양으로 나가고 싶다”.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단국대 명예교수. 1990년 월간 《한길문학》 창간 기념 신인상에 시 당선.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당선, 시집 『굿모닝, 에브리원』 외, 평론집 『이 황량한 날의 글쓰기』 외. 시작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수상.

 

* 《쿨투라》 2024년 10월호(통권 12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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